2003년 5월호

一笑一少에 버금가는 一步一少

  • 글: 표정훈 출판칼럼니스트 medius@naver.com

    입력2003-04-29 15: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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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一笑一少에 버금가는 一步一少
    현생 인류의 직접적 조상은 아니지만 직립 보행을 처음 한 호모 에렉투스가 출현한 때는 약 150만년 전. 그렇게 오래됐기 때문일까? 두 다리로 대지 위를 힘차게 걷는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물과 공기의 소중함을 잊고 살 듯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걷는다는 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지극히 자연스런 신체동작 외에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 물음에 대해 ‘결코 그렇지 않다’며 걷기의 각별한 의미를 강조하는 책들이 있다.

    걷기는 개인 존재의 확인

    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기 예찬’(현대문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가는 기회를 얻게 된다. 걷는다는 것은 한 곳에 집중하기 위한 과정이다.’ 제어장치 없이 빨라지기만 하는 현대사회의 속도에 제동을 걸고, 걷기를 통해 몸의 의미를 본래대로 되돌려놓자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사실 대부분의 걷기는 약속시간을 맞추기 위한 걷기이거나 노동의 연장선이 됐다. 대낮에 도시 한복판을 하릴없이 한참 동안 어슬렁거린다면 검문당하기 딱 알맞다.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걸으며 사색할 수 있는 길, 걷다 지치면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곳이 마련돼 있는 길, 그런 길을 찾기도 힘들다. 때문에 걷기를 미친 듯한 리듬을 타고 돌아가는 현대성에 대한 도전으로, 개인 존재의 확인인 동시에 승리의 보증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저자의 말이 사뭇 비장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처음 이 책을 접하면 걷기에 대한 서정적이고 여유 넘치는 에세이로 간주하기 쉽다. 하지만 이 책은 속도를 숭배하는 현대문명 일반에 대한 심각한 이의 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동차, 오토바이, 기차, 지하철,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탈것들을 발명함으로써 인간은 거리와 시간의 제약에서 해방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탈것들로 인해 인간의 몸이 삶으로부터 소외돼버렸다고 지적한다.



    시대·지역 뛰어넘는 五感의 교류

    역시 프랑스 사람으로 생물학자이자 걷기 예찬론자인 이브 파칼레는 ‘걷는 행복’(궁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효율성을 숭배하고 속도의 강박증에 걸려버린, 그리고 오로지 결과와 잇속만이 횡행하는 이 사회를 싫어한다. 나는 우회, 주저, 뒤로 걷기, 맴돌기, 방랑의 편이다. 시간과 공간의 풍성한 결합을 선호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고속도로보다는 야생의 오솔길을 좋아한다. 놀람, 갈림길, 숨을 곳, 비밀을 직선보다 좋아한다. 길을 가다가 만나는 뜻밖의 경이를.’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태어나서 첫걸음을 뗄 때부터 죽을 때까지 대략 12억5000만 걸음을 걷는다. 이는 지구를 22번 도는 거리. 그래서 저자는 걷는다는 것이 인생의 은유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어디로, 무엇을 향해 걷는가?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목적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직 우리가 걷는 길 그것뿐이다.’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을 보면 누구나 좀 놀랄지도 모른다. 이브 파칼레는 ‘한국의 걷는 친구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자신이 한강의 발원지까지 가볼 것이며, 동해의 푸른 물을 만질 것이고, 울진과 영덕 근처를 걸을 것이며, 아름다운 수묵화가 품고 있는 소나무를 배경으로 심호흡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윤선도(1587∼1671)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가운데 봄 노래와 ‘오우가(五友歌)’의 구절을 인용한다.

    자신은 걸음으로써 400년 전 윤선도의 피부 속으로, 몸 속으로, 귀 속으로, 눈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그와 소통하고, 난초의 향기를 들이마시며, 붓꽃의 꽃잎을 만지고, 대나무와 소나무를 스칠 수 있다고 한다.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는 오감(五感)의 교류가 자연 속에서 걷는 일을 통해 가능하다는 걸 말하는 셈이다.

    걷기와 건강의 관계에 대한 파칼레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으면 지금 당장 걷고 싶어진다. ‘걷기는 골격을 강화시키고 골다공증을 예방하고 치료에 도움을 준다. 걷기는 근육을 발달시키고 근육의 저항력을 증가시키며 근육의 노화를 늦춘다. …(중략)… 걷기는 스트레스를 줄이고 성격을 차분하게 한다. 순환기 계통의 질병을 가지고 있다면 매일 산책을 하는 것보다 더 좋은 치료는 상상하기 힘들다.’

    보행자 소외시키는 도시문명

    이상 두 권의 책을 걷기의 철학, 걷기의 인생론이라고 한다면, 문예비평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레베카 솔닛의 ‘걷기의 역사’(민음사)는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 걷기의 문화사, 걷기의 사회사라고 할 수 있다. 걷기가 자유와 해방을 위한 저항이라는 정치적·사회적 의미를 지닌다는 지적이 인상적이다.

    정치적 의미에서의 걷기의 창시자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다. 그는 바다까지 행진해 직접 소금을 만드는 소금 행진을 통해 영국이 식민지 인도에서 시행하던 세제법에 비폭력으로 저항했다. 그밖에도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30주년 추모행진,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에 반대하는 ‘영혼의 달리기 대회’ 등 내면의 신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방법, 비폭력 저항의 수단이 된 걷기의 많은 사례를 들고 있다.

    걷기의 페미니즘에 대한 내용도 흥미롭다. 19세기 말 영국 여성들은 밤에 거리를 걸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거리의 직업여성으로 의심돼 감옥에 갇혔고, 프랑스에선 감옥에서 혹사당하거나 매춘부로 등록해야만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저자는 19세기까지 여성작가들의 작품세계가 제한적이었던 까닭도 여성들이 마음대로 거리를 걸을 수 없었던 것에서 찾는다.

    앞서 소개한 두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다. 저자는 러닝머신을 비판의 실마리로 삼는데, 인간이 러닝머신을 찾는 것은 걸을 공간 자체가 사라졌음에 대한 역설이라는 것. 걸으면서 풍경을 바라보고 추억하고 사색하는 대신 사람들은 신화 속 시시포스처럼 러닝머신 위에서 노동한다.

    더구나 보행자를 소외시키는 현대 도시문명 속에서 사람들은 폐쇄된 실내에서 또 다른 실내 공간으로 왕복할 뿐, 걷기를 통해 사회와 뒤섞이려 하지 않는다. 설사 그렇게 하고 싶어도 운전자의 도시에서 이미 인도는 사라지고 공간은 사유화됐다. 횡단보도는 사라지고, 출입문 대신 주차장이 건물의 전면에 나섰으며, 도심 번화가는 쇼핑몰이 점령했다. 자동차를 통해 활동영역은 넓어졌지만 사람이 기꺼이 감내하는 산책의 거리는 자꾸만 줄어든다. 이 책은 사라져가는 걷기 문화에 바치는 비가(悲歌)로 읽힐 수도 있다.

    걷기만을 주제로 한 책은 아니지만, 최근 우리 도서시장에서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틱낫한 스님의 ‘힘’(명진출판)을 비롯한 몇몇 저서도 이른바 ‘걷기 명상’을 중요한 수행법으로 제시한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에 주의하면서 천천히 집중하여 걷는 것이 요체인데, 걷는 행위를 다분히 우주적 명상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 점이 특기할 만하다. 틱 스님의 철학을 가장 잘 요약한 말이 ‘내딛는 걸음마다 평화’라고 하던가.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천천히 집중해 걷는 것이 요체

    ‘그냥 대지 위를 천천히 걸어라. 차가운 아스팔트가 아니라 아름다운 지구별 위를 걷는다고 생각하라. 다음, 생각을 놓아버리고 그냥 존재하라. 숨을 들이쉬면서, 마음에는 평화, 숨을 내쉬면서, 얼굴에는 미소. 그대 발걸음마다 바람이 일고, 그대 발걸음마다 한 송이 꽃이 핀다. 나는 느낀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경이로운 순간임을.’

    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해 4월 발표한 ‘건강을 위한 운동(Move for Health)’이란 권고문에 따르면, 매년 운동부족으로 200만명이 사망하고 있으며, 운동부족이 원인인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사람도 3000만명에 달한다. 특히 아시아·태평양지역 사망자 10명 중 6명은 운동부족으로 목숨을 잃고 있는데, 도시화와 자동차 이용 확대, 서구식 식생활 등이 원인이다. WHO가 내놓은 대책은 간단하다. 당뇨병, 심장질환, 우울증, 스트레스 등 성인병의 60∼70%는 간단한 산책이나 계단 오르기, 심지어 춤을 추는 등의 가벼운 운동으로 예방할 수 있다는 것. 이를 위해 공원이나 산책로를 조성하는 등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권고문은 강조했다.

    일소일소(一笑一少)란 말이 있다. 한 번 웃으면 그만큼 젊어진다는 뜻이다. 이 말을 일보일소(一步一少), 즉 한 번 걸으면 그만큼 젊어진다는 말로 바꿔도 좋을 것이다. 웃음이 명약이듯 걷기도 명약이다. 특히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이동하는 걷기가 아니라 목적을 지니지 않은 자유롭고 가벼운 걷기, 그런 걷기만큼 몸과 마음에 두루 좋은 명약도 없으리라.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달린다.’ 2000년 11월22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체코의 ‘인간기관차’ 에밀 자토페크가 남긴 말이다. 그의 말을 이렇게 조금 바꾸어 말하면 어떨까.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걷는다.’ 따뜻한 봄볕이 우리를 자꾸만 밖으로, 밖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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