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호

혈통 계승 둘러싸고 분열된 이슬람 갈등의 영원한 불씨

  • 글: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 lee200@dreamwiz.com

    입력2003-05-26 13: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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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라크 인구의 65%를 차지하면서도 수니파인
    • 후세인 정권에 의해 정치적 박해와 경제적 박탈을 당해왔던 시아파들이 이라크전쟁 이후 권력 전면에 나서면서 두 세력간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여기에 ‘해방군’ 미국이 개입, 더욱 복잡한 양상을 연출하고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어떻게 다르며 왜 대립과 반목의 역사를 거듭하는 것일까.
    혈통 계승 둘러싸고 분열된 이슬람 갈등의 영원한 불씨
    이라크전쟁으로 인해 지난 25년 동안 온갖 권력과 부를 독점했던 수니파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자, 그간 억눌렸던 소외계층과 종파 그룹이 일제히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인구의 65%를 차지하면서도 후세인 정권에 의해 정치적 박해와 경제적 박탈을 당해왔던 시아파들이 급속히 결속하면서 권력 전면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사담 후세인 제거를 반기면서도 강력한 반미투쟁을 전개하고 있어 미국을 당혹케 한다.

    대다수 중동전문가들은 전쟁이 끝난 후 이라크인들의 뿌리깊은 반미정서가 폭발할 것으로 예측해왔다. 사담 후세인을 권좌에서 몰아냄으로써 미국이 이라크 내에서 입지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어불성설이었던 것이다.

    사실 후세인의 장기독재를 가능하게 했던 요인 중 하나는 그가 미국에 대항해 싸운다는 이미지를 이라크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미국은 이라크에 대해 경제제재 조치를 취했고 이로 인해 이라크 국민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후세인의 권력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즉 이라크 국민들은 후세인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횡포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에 그를 대안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후세인을 영웅시하는 일부 계층을 제외하고는 이라크 국경을 넘어 아랍 전체에 퍼져 있는 일반적인 정서다. 1991년 걸프전쟁 직후 후세인의 무차별 공격으로 대량학살을 경험한 남부 지방의 시아파들이 이라크전 이후 강력한 반미데모를 벌이고,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은 서방통 세속주의자 찰라비를 과도정부 구성 책임자로 임명했다. 사실 그의 선택은 대단한 모험이다. 그가 시아파이고 미국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임명됐지만 찰라비는 이라크 내 지지기반과 대중적 영향력이 미약하다. 바그다드 중심의 아랍인 수니파와 꾸준히 독립을 추구하고 있는 북부 쿠르드족 수니파, 남부 아랍인 시아파의 각기 다른 요구들 사이에서 그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라크라는 한 지붕 아래서 각 종파들이 권력을 분점하면서 연방국을 구성할 수 있을까. 아니면 레바논 내전과 같이 종파간 분열의 길을 갈 것인가. 우선 수니파와 시아파의 성격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봄으로써 그 윤곽을 가늠해보도록 하자.

    후계자 갈등이 결별의 시초



    현재 이슬람권의 90% 정도가 수니파이고 10% 정도가 시아파다. 하지만 두 종파로 구분하기 애매한 소수 종파도 적지 않다. 시아파는 지금의 이란에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는 반면 수니파는 세계에 골고루 퍼져 있다. 시아파의 최대 종주국은 이란이고, 시아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나라는 이라크와 오만, 예멘, 레바논, 바레인 등이다.

    시아는 ‘시아트 알리(Shiat Ali)’의 약칭으로 이슬람의 4대 칼리프(정교일치의 최고 통치자) 알리를 추종하는 종파 집단이다. 처음부터 수니 종파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아파가 주류집단을 박차고 떨어져나가자 예언자의 언행인 순나(Sunnah)를 따르는 집단이란 의미로 기존 집단을 수니로 불렀다. 알리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하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로 무하마드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또 그는 두 번째 이슬람 개종자로서 탁월한 용맹성과 지혜를 가졌으며 시종일관 무하마드의 곁에서 성실하게 그를 보필했다.

    632년 무하마드가 후계자를 임명하지 않고 사망하자 이슬람 사회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누구를 후계자인 칼리프로 정할 것인가에 대해서 알리의 추종자들은 예언자의 혈육이고 모든 면에서 뛰어난 알리가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랍 부족장 회의 슈라(shura)에서는 아부 바크르(632~634)를 초대 칼리프로 선출했다. 슈라에서 만장일치 합의제(이즈마)로 칼리프를 선출하는 방식은 초기 이슬람 사회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2대 칼리프 우마르(634~644), 3대 칼리프 오스만(644~656)이 이 방식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우마르와 오스만 모두 예배 도중 반대세력에 의해 무참히 피살됐고 이후 알리가 4번째 칼리프로 등장했다. 그런데 알리가 오스만의 살해세력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자, 무하마드의 부인이자 오스만을 지지했던 아이샤의 비난과 공격을 받게 됐다. 두 세력간의 알력은 전쟁으로 비화됐고 656년 최초 이슬람 내전이라 할 수 있는 낙타전투에서 알리가 승리한다. 그러자 오스만의 사촌이었던 무아위야가 알리에게 대항했다. 창 끝에 코란을 달고 돌진하는 무아위야의 군대를 향해 알리는 화해를 요청했고 협상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화해 협상에 대해 불만을 품은 알리의 강성 추종자는 661년 알리를 살해한다.

    시아파는 알리의 장자인 하산이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직적 군대를 가졌던 무아위야는 스스로가 칼리프임을 선포했고 하산에게 칼리프를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하산은 다음해 갑자기 목숨을 잃는다. 시아파들은 무아위야가 하산을 독살했다고 믿고 있다. 알리의 둘째 아들 후세인은 현실적 상황을 받아들여 무아위야가 살아있는 동안 칼리프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한다. 이는 무아위야의 사후 칼리프직을 후세인에게 물려주겠다는 묵시적 선언이었다. 그런데 680년 무아위야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야지드는 약속을 깨고 칼리프직을 찬탈했다. 후세인은 즉각 야지드에 대항했다. 이렇게 해서 680년 시아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카르발라 전투가 벌어졌다.

    군사력의 절대적 열세에도 후세인과 그의 추종자들은 장렬하게 싸웠다. 하지만 모두 처참히 살해당하고 만다. 이 전투에서 후세인의 어린 아들 알리만 겨우 피신해 시아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카르발라 전투 후 이슬람 세계에서 정통 칼리프 시대는 끝나고 왕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시아파들은 통한의 응어리를 안고 지금의 이라크 지방에 별도의 둥지를 틀었다. 이후 예언자의 혈통인 후세인이 무참하게 도륙당한 680년 이슬람력 1월10일은 시아파에게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날이 됐다. 후세인의 묘당이 있는 카르발라는 시아파 최고의 성지가 됐으며 1월10일은 그의 무덤을 순례하는 가장 의미 있는 날이 됐다.

    모든 시아파 순례객들은 예리한 칼로 자신의 몸을 난자하며 피를 뿌리는 끔찍한 행진을 한다. 당시 후세인의 고통을 직접 체험한다는 종교적 동일체 의식의 표현인 것이다. 동시에 예언자의 혈족을 살해하고 종교적 신성함을 훼손한 수니파에 대한 역사적 원한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칼리프직을 찬탈했던 무아위야가 창건한 우마이야조는 750년 아부 알 압바스 장군에 의해 멸망한다. 이때 무하마드 가문 출신인 압바스는 시아파의 절대적인 협력을 받으며 시아파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후세인의 증손자인 자파르 알 시디키를 자신의 후계자이자 칼리프로 옹립하려는 구상을 했다. 하지만 754년 압바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알 만수르가 자파르를 살해하고 자신이 칼리프로 취임했다. 시아파로서는 두 번째 배반을 당한 셈. 이 왕조가 압바스 제국으로 1258년 몽골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거의 500년간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다. 시아파는 중앙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몇몇 시아파 왕조를 건설했지만 그 세력은 미미했다. 하지만 16세기 현재 이란 지역에 시아파인 사파비 왕조가 들어선 후 대다수 국민들이 시아파로 개종했다. 이것이 현재 최대 시아파 국가인 이란의 모태다.

    이처럼 수니파와 시아파는 교리적 논쟁이 아닌 계승권 분쟁을 둘러싼 정치적인 갈등으로 인해 갈라졌다. 혈통 계승을 주장하는 시아파에게 유일한 칼리프는 무하마드의 사촌인 알리뿐이다. 그 전 세 명의 칼리프는 찬탈자로 간주한다. 이런 정치적 견해 차이를 제외하면 두 종파간의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다. 코란의 절대성을 인정하고 마지막 예언자 무하마드를 따르는 기본적인 코드는 서로 같다.

    결정적 의식의 차이 ‘아슈라의 날’

    그럼에도 두 종파는 의식의 실행과 종교적 관점, 이슬람 율법의 해석과 적용에서 많은 차이를 보여왔다.

    가장 뚜렷하고 결정적인 의식의 차이는 ‘아슈라의 날’에 나타난다. 아슈라는 후세인이 순교한 이슬람력 1월의 열흘간을 의미한다. 카르발라 전투에서 후세인이 처참하게 전사한 고통을 기억하는 의식이다. 사이파는 자신의 가슴을 채찍으로 후려치고 칼로 긋는 행위(마아탐)를 통해 당시 후세인의 죽음을 방치한 나태함에 대한 참회(타으지아)를 한다. 후세인의 순교 정신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나누는 것. 시아파는 이런 참회 의식을 행하면 최후 심판의 날에 후세인이 중재자로 등장해 자신들을 천국으로 이끌어줄 것으로 믿고 있다. 이에 대해 수니는 역사를 왜곡하고 알리와 후세인에 대한 그릇된 종교의식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이 행사의 과격성과 시아파의 수니파에 대한 적대적 감정은 두 종파간에 마찰이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다.

    일상적인 삶에서도 부분적인 차이를 보인다. 우선 이슬람의 기본 의무인 예배에 있어 수니파는 시간에 맞춰 하루에 다섯 번씩 예배 보는 것을 철저히 지킨다. 하지만 시아파는 상당한 융통성을 부여한다. 예배를 묶어서 한꺼번에 보기도 하고 하루 다섯 번의 예배를 세 번으로 줄이기도 한다. 선 자세에서 두 손을 배 위에 올리지 않고, 절을 할 때도 바로 바닥에 이마를 대는 것이 아니라 카르발라에서 가지고 온 작은 돌 조각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절을 한다.

    혈통 계승 둘러싸고 분열된 이슬람 갈등의 영원한 불씨
    이슬람의 첫 번째 원칙인 신앙 고백(샤하다)에서도 수니파는 “알라는 유일신이고 무하마드는 그의 사도임을 증언한다”는 구절을 암송하지만, 시아파는 이 구절에 알리에 관한 구절(알리는 신의 대리인이며, 예언자 무하마드의 계승자이며, 최초의 칼리프다)을 첨가한다.

    예언자 무하마드에 대해서도 수니파는 ‘그가 원래 무학의 인물이었으며, 신의 계시를 인간에게 전달하는 단순한 임무만을 부여받은 보통 인간이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시아파는 ‘무하마드가 높은 학식을 소유했던 완전무결한 존재였으며 신의 빛을 부여받고 신적 속성을 소유했던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시아파는 그런 속성들이 무하마드의 딸 파티마, 그녀의 남편 알리, 그리고 이들의 자손들에게도 부여됐다고 주장한다.

    수니파는 시아파가 주장하고 있는 알리와 그의 자손 중심의 이맘(종교적 지도자) 제도를 단호히 거부한다. 이맘 제도와 관련해 시아파는 873년경 은둔한 12대 이맘이 마흐디(메시아)로 다시 등장할 것이라고 믿는다(상자 기사 참고). 즉 12대 이맘이 마흐디로 재림함으로써 이슬람 공동체는 궁극적인 정의와 평등, 단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인물 중심 종교활동이 강한 시아파

    이슬람 법 적용에 있어서도 수니파는 한발리파, 말리키파, 샤피이파, 하나피파 등 정통 4대 법학파를 모두 인정한 반면 시아파는 6대 이맘 자파르 알 사디크가 편집하고 성문화한 ‘자파르 법전’만을 신봉하고 있다.

    신앙의식에서도 시아파는 수니파에 비해 인물 중심의 종교활동이 강하게 나타난다. 시아파의 성인 숭배 의식이 대표적. 특히 무하마드 가문 출신의 성인들에 대한 숭배 의식과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지에 흩어져 있는 주요 시아파 지도자들 묘소에 대한 방문과 순례가 주기적으로 이뤄진다. 이란의 주요 기관이나 가정에는 이맘 알리, 이맘 후세인, 그리고 카르발라 전투 등에 대한 사진들이 걸려 있다. 하지만 수니 세계에서는 그런 사진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시아파는 계약결혼제도인 ‘무트아(mu’tah)’를 인정한다. 무트아는 무하마드 시대에 일부 허용됐으나 수니파에서는 죄악으로 금지한다. 시아파 국가인 이란의 여성운동가들은 ‘일생동안 13명의 여성과 결혼했던 예언자 무하마드도 처녀와의 결혼은 단 한 번뿐이었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여성의 처녀성에 대한 사회의 지나친 고정관념을 깨고 기혼 여성의 자유로운 결혼을 확대하는 방편으로 무트아를 지지하고 있다. 시아파는 수니파에 비해 여성의 상속권을 광범위하게 인정한다. 이란 여성의 정계 진출과 전문적 사회활동이 다른 아랍지역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활발한 것은 이런 시아 교리의 영향이 크다.

    시아파의 또 다른 특징은 ‘따키야(taqiya: 거짓 믿음)’를 인정한다는 것. 시아파는 수니파의 정치적, 종교적인 박해로부터 자신의 존재와 종교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경우 거짓으로 자신의 신앙을 숨길 수 있도록 했다.



    수니파에는 일반적으로 분파가 없다. 한발리, 말리키, 샤피이, 하나피 등 4개의 학파가 수니 세계에 골고루 분포해있다. 하지만 학파간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코란과 무하마드 언행록인 하디스를 기본으로 하면서 시행 세칙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정도. 가장 엄격한 한발리파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퍼져 있고, 말리키는 북아프리카, 샤피이는 말레이시아와 동남아시아, 하나피는 터키와 중앙아시아에 집중 분포해 있다.

    하지만 시아파에는 70여 개의 분파가 존재한다. 시아의 주류파는 12이맘파다. 알리를 초대 이맘으로 보고 12번째 마지막 이맘은 죽지 않고 은둔했으며, 언젠가는 마흐디에 다시 나타날 것으로 믿고 있는 그룹이다. 이란을 중심으로 한 12이맘파는 전체 시아의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온건파이며 교리상으로 수니파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12이맘파 다음으로 중요한 시아파 갈래는 이스마일파다. 6대 이맘 자파르 알 사디크가 사망하자 두 아들 이스마일과 무사의 추종자들이 이맘 승계권을 각각 주장했다. 그런데 문제는 장남인 이스마일이 아버지보다 5년이나 먼저 사망함으로써 불거졌다. 생존하는 차남 무사를 적통으로 인정해 그의 후손들을 정당한 이맘으로 삼은 그룹과 장남인 이스마일을 지지하면서 그의 아들 무하마드를 7대 이맘으로 추앙한 그룹이 갈라진 것. 후자가 바로 이스마일파로 7대 이맘파로도 불린다. 이스마일파는 909년 이집트에서 파티마 왕조(909~1171)를 세웠다. 알리의 부인이자 무하마드의 딸인 파티마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이 왕조는 북아프리카 지중해 해안을 따라 세력을 확장했다. 969년에는 카이로를 점령해 수도로 삼았다. 이때 세계 최초의 대학인 알 아즈하르 대학이 세워졌다.

    이스마일파는 파티마 왕조가 멸망하기 직전 다시 ‘누구를 이맘으로 볼 것인가’를 놓고 니자리파와 무스탈리파로 나뉜다. 당시 니자리파는 이란 에후르즈 산맥의 알라무트 성채에 은거했다. 흔히 12세기 암살단(Assassin)으로 불리며 적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던 그룹이 이 부류에 속한다. 현재 파키스탄 북동부에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으며 중국 신장성과 동부 아프리카에도 퍼져있다. 무스탈리파는 인도 구자라트 지방과 동부 아라비아 지역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시아파 중 또 다른 중요한 갈래는 자이드파다. 시아파에 속하면서도 수니파의 전통에 가장 근접한 교의를 고수하고 있다. ‘숨은 이맘’ 사상과 같은 전통적인 시아 교리를 거부하는 독특한 분파다. 자이드파는 890년경 예멘 지역에 나라를 세웠으며 지금도 예멘의 공식적인 교의로 남아 있다.

    현재 종파 분쟁에 의한 레바논 내전과 관련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시아 분파는 드루즈파다. 정통 이슬람 세계에서는 드루즈파를 아예 이단종파로 간주, 이슬람 카테고리에서 제외하기도 한다. 이스마일파에서 갈라진 드루즈파는 신플라톤주의와 극단적인 시아 사상을 혼합한 복합적인 교리를 갖고 있다. 이 분파의 이름은 11세기 초 파티마 왕조의 6대 칼리프인 하킴의 신성성을 주장하는 이스마일파 지도자 알 다라지(Al-Darazi)에서 유래됐다. 이들은 하킴의 재림을 믿으며 목요일 저녁에 그들만의 비밀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연대를 강화한다. 주류 이슬람 사회 및 이집트에서 극심한 박해를 당한 이들은 레바논과 시리아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특히 레바논의 드루즈파는 1860년 기독교 마론파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1만1000명을 살해하는 등의 기독교 박해로 악명을 떨쳤다. 현재는 레바논을 중심으로 시리아와 이스라엘 등지에 약 60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혈통 계승 둘러싸고 분열된 이슬람 갈등의 영원한 불씨

    후세인에게서 해방! 그동안 방문이 금지됐던 이슬람 시아파 성지 카르발라로 향하고 있는 이라크 시아파들.

    시리아의 하페즈 알 아사드 전 대통령과 현재 집권층이 신봉하는 누사이리파도 시아 분파에 속한다. 시아의 11대 이맘 알 아스카리와 그의 수제자 이븐 누사이리를 추종한 데서 유래했다. 정통 이슬람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이단시되다가 시리아의 집권층으로 떠오르면서 관심을 끌고 있다. 시리아 인구의 10% 정도가 이 분파를 따른다.

    사실 오늘날 수니파와 시아파 모두 교리상의 문제로 전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두 종파를 소수민족으로 안고 살아가는 국가나 공동체 내의 여러 가지 종교 외적인 변수가 이들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국경분쟁, 종족 및 언어문제, 정치적 권력 배분의 문제, 투자의 편중과 경제적 혜택의 불균형, 외세의 개입 등과 같은 복합적인 변수에 의해 두 종파간 갈등이 조장되고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표면적으로 수니파와 시아파가 대립하는 나라는 많다. 이라크뿐 아니라 거의 모든 이슬람 국가가 이 문제를 어느 정도 안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1979년 왕정에 반대한 일부 원리주의 세력들이 시아파와 합세하여 성지 메카에서 반란을 일으키다가 잔혹하게 탄압됐다. 파키스탄에서도 시아파의 종교의례인 ‘아슈라의 날’을 전후해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유혈충돌이 몇 년째 계속되고 있다. 1975년부터 15년간 내전에 시달려온 레바논에서도 다수인 시아파와 소수 수니파, 이단 시아 분파 드루즈파, 그리고 기독교 마론파 간에 잔인한 살육전이 계속돼왔다. 1989년 타이프 협약으로 대통령은 기독교 마론파, 총리는 수니파, 국회의장은 시아파, 국방장관은 드루즈파가 각각 분점하는 형태로 내전이 종식됐다.

    하지만 일반 신앙생활에서 수니파와 시아파는 거의 충돌하지 않는다. 이슬람이라는 하나의 틀 속에서 서로의 방식을 존중하고 있다. 두 종파 모두 서로를 무슬림 형제로 간주한다. 시아파들도 수니파 모스크(예배당)에서 함께 예배를 본다. 관행상 꺼리기는 하지만 법적으로 결혼하는 데도 전혀 문제가 없다.

    이라크 내 시아파는 1600만명 정도로 전체 인구의 65%를 차지한다. 이처럼 이라크에 시아파가 많은 이유는 역사적으로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이라크 남부가 천년 이상 시아파의 정치적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또 19세기 수니 제국인 오스만 터키의 통치를 받으면서 군대에 징집되지 않기 위해 다수의 이라크인들이 시아파로 개종했다.

    후세인 정권에게 핍박 당해

    이라크 시아파들은 1991년 걸프전 직후의 상황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더 많은 자치를 요구하며 일어선 시아파 수만명이 사담 후세인 정권의 무차별 폭격으로 희생됐기 때문. 봉기를 부추긴 미국은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며 대량 학살을 방치했다. 사담 후세인이 통치하는 수니 소수정권 25년 동안 시아파는 극심한 종파적 박해와 지역적 차별, 경제적 박탈을 일삼는 암흑의 시기를 거쳐왔다. 후세인 정권 전까지만 해도 국가의 전 영역에서 인구 규모에 맞는 경제활동과 책임을 보장받았던 시아파들의 입지는 그 후 조직적으로 와해됐다. 사회적 압박보다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신앙의 박해였다. 이맘 후세인의 순교지로 이라크 시아파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성지인 카르발라에 대한 순례와 종교의식은 1977년 이후 금지됐다. 이맘 후세인과 그의 아들 알리와 관련된 일체의 종교적 상징은 철저히 와해됐다. 이는 신앙의 목줄을 끊어버린 것과 다름 없었다. 후세인에 반기를 들었던 시아파 주민들은 혹독한 고문과 처형, 암살, 체포 등으로 죽어갔다. 1999년에는 시아파 성지인 나자프에서 가장 존경받던 이라크 시아파 지도자 아야툴라 무하마드 사데크 알 사드르마저 암살됐다. 최근 10년 동안 후세인 정권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만 20만명을 넘는다고 하니, 그 참혹한 박해의 실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걸프전 이전까지만 해도 시아파들은 이라크 국가와 후세인 정권에 충성을 다해왔다. 8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조국인 이라크를 위해 같은 시아파인 이란을 공격하는 데 앞장선 것도 이라크 군대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시아파 군인들이었다. 그 대가로 1988년 개편된 국가의 최고정책결정기구인 혁명위원회 8인 위원 중 시아파는 수니파와 동수인 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기독교인, 쿠르드족이 각각 차지했다. 사담 후세인의 적절한 권력 배분을 통한 통치전략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상황은 1991년 걸프전쟁과 뒤이은 시아파 봉기 후 급변했다. 후세인 정권과 시아파 사이에 되돌릴 수 없는 갈등관계가 조성된 것이다. 후세인도 시아파 지도자에 대한 표적 암살과 남부 시아파 지역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강화했고 권력 중심부에서 시아파들을 철저히 배제했다.

    이번 전쟁의 표면적 목표는 사담 후세인 정권의 전복이었지만, 실제적인 효과는 이라크 시아파의 해방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시아파는 그동안 억눌렸던 원한에 대해 복수하고 수적인 우세를 밀어붙여 시아파 정권을 창출하겠다는 야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급진적 시아파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후 이란과 연계해 걸프지역에서 반미연대를 강화하는 상황은 이라크 시아파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현재로서는 그런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란과는 종파적 동질성을 강화하고 이웃으로서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생각이다.

    지금 이라크의 시아파들이 요구하는 것은 인구 규모에 걸맞은 권력의 분점과 연방제도하의 독자적 삶의 보장이다. 나자프와 카르발라에 있는 성지를 마음껏 순례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 낙후된 시아파 지역에 대해 정책적 배려를 해달라는 지극히 소박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이들은 시아파를 가혹하게 탄압해온 수니파 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미국의 개입을 지지했지만 앞으로 미국이 이라크에 남아 내정간섭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제 이라크 내 시아파들은 미국이 떠나기를 요구한다.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기 위한 이라크 해방전쟁은 끝났지만 미국을 몰아내기 위한 이라크 해방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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