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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색깔있는 문화이야기 (15)

‘죄와 벌’의 본질을 묻다

이탈리아 계몽주의의 상징 베카리아

  • 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죄와 벌’의 본질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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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 형법학의 선구자 베카리아.
  • ‘이기적 인간’을 긍정하는 것으로부터 죄와 형벌의 본질을 탐구했다.
  • 고문, 잔혹한 벌, 사형 폐지를 주장한 근대의 르네상스인.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창한 한 인간적 사회사상가의 뜨거운 외침.
‘죄와 벌’의 본질을 묻다
우리가 아는 서양은 사실 그 일부에 불과하다. 기껏 독일, 프랑스와 영국, 미국 정도다. 영미를 제외한 유럽 대륙은 동서남북의 여러 나라를 포함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 즉 서구뿐이다.

흔히 유럽에는 북구형과 남구형 사고방식이 있다고들 한다. 전자는 독일과 프랑스 중부, 북부 유럽의 그것으로서 근현대적인 것이고, 후자는 남부 유럽, 특히 이탈리아에 특징적인 것이라고들 한다. 일본을 비롯한 대다수 비서양 후진국은 전자를 선택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비서양권의 유럽 이해는 북구형에 치중되어 남구형에 대한 오해나 편견을 갖게 됐다.

북구형 근대는 종교개혁, 근대과학 및 자본주의라는 3대 지주를 그 뿌리로 한다. 또한 보편주의, 논리주의, 객관주의라는 3대 원리가 그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반해 남구형 근대는 코스몰로지, 심볼리즘, 퍼포먼스를 3대 원리로 한다. 외국어 남발의 악취미는 없으나, 번역하기에는 문제가 있어 그대로 쓴다. 코스몰로지란 우주 철학, 심볼리즘은 상징주의, 퍼포먼스란 실행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다 조금씩 이상하다. 여하튼 ‘고대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의 미묘한 조화 속에서 표상, 레토릭, 외관 등을 중시한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이런 남구형 문화는 우리의 문화와도 어느 정도 공통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한편 남구형 문화는 권위·권력에 대한 저항과 함께 지적 체계에 있어 의문과 회의를 품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측면에서는 분명 우리와 다르다. 이는 이탈리아 지식인의 자세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우리와 달리 그들은 절대적 이념을 결코 절대적으로 숭상하지 않으며, 오히려 유연하고 변경 가능한 ‘지(知)’를 즐긴다. 이는 경우에 따라 일관성을 결여하고 편의주의에 빠질 수 있는 단점도 있지만, 현실적응을 가능케 하는 탄력성이라는 면에서는 분명 장점이다.

이러한 남구형 사고의 유연성은 북구형 지식이 선과 악의 시시비비를 확실하게 구별하는 것과 대비된다. 남구형에는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제에는 논의의 여지가 있고, 모든 가치는 그 맥락에서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이탈리아인은 토론을 즐기며 개별적인 행동을 중시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일상생활에서 가치판단을 하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한반도는 너무도 강력하고 순수한 사상에 지배되고 있다 생각된다. 남쪽은 그런 자본주의, 북쪽은 그런 공산주의다. 이는 단재 신채호가 이미 오래 전에 지적한 대로 옛날부터 순수한 불교, 순수한 유교만을 고집한 전통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외고집으로는 불확실하고 혼돈스러운 현실세계에 충분히 대처할 수 없다.

강한 사상, 약한 사상

그런 측면에서 나는 이탈리아적 사상의 발현인 ‘약한 사상’이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1983년 움베르토 에코를 비롯해 이탈리아 지식인들이 엮은 동명의 책은 명백하게 형성된 어떤 구체적 사상이 아닌, 처음부터 그를 거부하며 새로운 지적 자세를 도전적으로 제기하고자 한다. 즉 하나의 기준 아래 통일된 전통적 사고방식을 극복하려는 점에 그 새로움이 있는 것이다. 에코의 여러 소설도 바로 그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사고방식인 ‘강한 사상’은 사고의 자유를 놀라울 정도로 제한한다. 이에 반해 ‘약한 사상’은 사고, 묘사, 자기표현, 자기변혁, 자신의 삶을 좁은 틀 속에 강제하는 ‘강한’ 이성을 부정한다. 절대적 진리를 전제하는 강한 이성은 제국주의, 전체주의, 폭력적 국가주의, 정치적 학살이라는 근대의 많은 비극을 낳은 근본원인이었다. 자신과 다른 것은 무조건 배제하며 다른 사상을 이해하는 여유를 갖지 못한 탓이다.

그런 만큼 지금 우리에게야말로, ‘강한 이성’이나 이를 무조건 부정하는 비합리주의가 아닌, 유연하고 연약한 이성을 근거 삼아 존재를 명확히 하는 서술·상징·기호를 중시하고, 차이·복잡성·다양성을 존중하는 사상이 절실히 필요한 것 아닐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러한 남구 유럽형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다. 최근 에코 등의 저서가 번역되고 있으나, 그 사상의 긴 역사를 훑어 보기에는 관련 문헌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나마 최근 이탈리아 계몽사상가인 비코, 베카리아의 저서가 소개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이들의 사상은 그야말로 기본에 불과하다. 인문사회과학의 고전, 아니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이 책들을 우리는 이제야 겨우 읽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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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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