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개한 진홍빛 철쭉이 황매산 정상을 뒤덮었다.
서울에서 경부·88고속도로를 이어 타고 4시간 남짓 내리달려 합천에 닿았다. 남부지방이라 그럴까. 초여름 햇살이 제법 뜨거워 조금만 걸어도 이마에 땀이 송송 배어났다. 읍내에서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다시 서쪽으로 30분쯤 달려 황매산 군립공원에 도착했다. 황매산 정상까지 자동차로 갈 수 있었다.
산 정상의 철쭉 군락지가 눈에 들어오자 ‘핏빛은 참 묘한 매력을 지녔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말간 핏빛의 만개한 철쭉꽃들이 저물녘 노을과 어우러져 그 붉은 기를 더욱 강렬하게 내뿜었다. 마치 철쭉꽃에서 비릿한 피내음이 묻어나는 듯했다.
보는 이의 가슴마저 발갛게 달아올라 허둥지둥 산을 내려오다 알프스 산자락에나 있을 법한 2층짜리 목조건물 앞에 가까스로 멈춰섰다. 1996년 설치미술가 최영호씨가 지어놓은 ‘바람흔적미술관’이다. 건물 안에는 방문객들의 회화작품이 전시돼 있고, 바깥에는 풍차 등 최씨가 만든 20여 개의 설치작품들이 자리를 틀었다. 명함을 꺼내들고 인사를 건네려는데, 최씨가 입을 다물라는 듯 냉큼 쑥개떡 하나를 내민다. 미술관 앞 곱게 깔린 잔디에서 어린이 방문객들과 맨발로 축구를 하던 그는 “이곳에선 자신이 누구인지 소개할 필요가 없다. 누구나 바람처럼 왔다 쉬어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둘러보니 30명 남짓한 관람객들이 신발을 벗어들고 잔디를 밟으며 자연을 만끽하고 있었다.
산을 다 내려오니 어느덧 밤이 깊었고, 종일 돌아다닌 탓에 갑작스레 허기가 몰려왔다. 합천의 대표적인 먹을거리는 토종 돼지. 묘산면에서 대규모로 방목하는 토종 돼지는 숙성시키지 않은 생고기가 별미다. 합천댐 근처의 토종 돼지고기 전문점 황강호식당을 찾았다. 합천 토박이라는 주인 장태경(57)씨는 토종 돼지고기 맛의 비밀은 새끼를 낳지 않은 암퇘지에 있다고 했다.
“수퇘지나 새끼를 낳은 암퇘지는 노린내가 나고 육질이 질기지. 하지만 출산 경험이 없는 암퇘지는 고기가 연하고 냄새도 없어. 게다가 오늘 잡은 돼지를 오늘 바로 구워먹으니 입에서 살살 녹는 거지.”
그의 말마따나 비계가 잔뜩 붙은 부위도 역한 냄새가 없고 느끼하지 않아 쫄깃쫄깃 잘도 씹혀 넘어갔다. 장씨와 동동주를 기울이며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다 보니 합천에서의 첫날밤이 후딱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