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이 10월13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재신임 국민투표를 12월15일 전후에 실시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노대통령은 “대통령이 앞질러서 얘기하는 것도 좋게 보지 않는 것 같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은 “대통령이 검찰 수사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불과 이틀 뒤인 10월10일 오전 노대통령은 예고에 없던 기자회견을 했다. “최 전 비서관 소환소식을 (발리에서)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틀 전 노무현 대통령은 ‘포커 페이스’를 내보였고 언론은 깜박 속은 것이다. 그는 경천동지할 발언들을 쏟아냈다. “최 전 비서관의 행위에 대해 내가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최도술 전 비서관에 대한 검찰 수사결과가 무엇이든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습니다.” 대통령은 최 전 비서관의 SK 자금 11억 원 수수의혹을 재신임 문제로 결부시킨 것이다.
다음날 대통령은 재신임 배경을 설명하면서 야당과 언론의 국정발목잡기를 비난했다. 이틀 뒤 국회 시정연설에선 정치개혁을 위해 재신임을 추진하는 것으로 또다시 이유가 달라졌다. ‘국민투표가 적절한지 모르겠다’는 입장도 ‘국민투표 하겠다’ ‘12월15일쯤 하겠다’로 바뀌었다. 재신임 성격이 4일 만에 수세에서 초강공으로 변했다. 여론조사에선 재신임 투표시 “대통령을 재신임하겠다”는 응답률이 껑충 뛰었다.
정략적이 아니었다지만 일단 성공한 듯 보였다. 노대통령은 다시 평화를 되찾는 듯했다. 그렇다면 청와대 법무팀에서 국민투표의 위헌 여부를 면밀히 검토했을까. 윤태영 대변인에게 물어봤다. 윤대변인은 “비서실에서 면밀히 검토를 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다”고 말했다. 국민투표 수용 회견은 대통령의 순발력이었다고 한다.
반면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난처해졌다. 대통령의 재신임 회견 직후 최대표는 기자들 앞에서 환하게 웃고 말았다. 이 모습이 TV전파를 탔다. 명백한 ‘표정관리 미스’였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는 “가급적 빨리 국민투표를 하자”고 했다. 홍사덕 총무는 “연내에 하자”고 거들었다. 왜 그랬을까.
홍총무 측근은 솔직하게 말했다. “국민투표 하면 노대통령이 불신임받을 것으로 예상한 것 같습니다.” 한나라당에 있다가 통합신당으로 간 김부겸 의원에게 물어봤다. 김의원은 “한나라당 생리는 내가 잘 안다”고 말했다.
“노무현이 너무 미웠다”
-한나라당이 첫날 국민투표를 요구한 것을 어떻게 보나.
“평소 노무현이 너무 미웠던 거다. 거기에다 정권을 잡겠다는 욕심도 생겼을 것이다. 그래서 성급한 발언이 나온 것 아니겠느냐. 자신감도 과했던 듯하다. 국민이 오히려 나라 혼란 걱정도 하고 훨씬 다각도로 고민한 것 같다.
-재신임 회견 이후 국론분열이 더 심화됐다고 하는데.
“야당이 ‘말 잘했다. 당장 국민투표 해라’ 첫 반응부터 이렇게 나오니까 대통령도 ‘좋다. 그래 해보자’고 나온 것이다.”
여론이 ‘노대통령 재신임’ 쪽으로 기울자 한나라당은 당황했다. 한마디로 초기대응 실패. 한나라당 내에도 이론이 없다.
최근 ‘동지적 관계’가 된 민주당에선 한나라당을 향해 혀를 차는 소리가 나왔다. 10월11일 오전, 민주당 비공개 의원총회. 회의에 참석한 한 의원은 회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A의원, B의원이 ‘노무현 하야시키자’고 했다. 비교적 온건파인 C의원과 D의원도 ‘이참에 물러나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을 했다. 밀어붙이자는 의견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