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90년대 명퇴 열풍과 어떻게 다른가

40대 부장은 옛말 30대 대리도 ‘직장 탈출’

  • 글: 양병무 인간개발연구원장 bmyang@khdi.or.kr

    입력2003-10-28 13: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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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오정’과‘오륙도’도 옛말인가. 저금리에 경기 불황으로 구멍가게 하나 여는 것도 쉽지 않지만 30대조차 명예퇴직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 1990년대를 휩쓸었던 명예퇴직 바람과 2003년 ‘新명예퇴직시대’의 같은 점과 달라진 점.
    90년대 명퇴 열풍과 어떻게 다른가

    90년대 유행했던 명예퇴직 바람이 경기침체 장기화로 다시 불어닥치고 있다.

    명예퇴직 바람이 다시 불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유행처럼 불었던 명퇴 바람이 잠잠하다가 경기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새롭게 꿈틀거리고 있는 것. 1990년대의 명퇴 열풍과 최근 다시 불어닥칠 조짐을 보이고 있는 명퇴 바람은 외양은 비슷하지만 그 특성에서는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사오정’과‘오륙도’,즉 “45세에 정년퇴직하는 게 당연하고, 56세까지 직장 다니겠다고 생각하면 도둑”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상황에서 일부 기업을 중심으로 불거져나온 명퇴 바람은 직장인들의 마음을 더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경기불황이 계속되면서 IMF급 감원바람이 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해지고 있어 근로자들의 시름은 깊어만 간다.

    경직된 노동시장, 명퇴는 불가피한 선택

    명예퇴직제도는 능력주의와 사회보장제도가 구축된 선진국에서는 보기 드문 제도이다. 반면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연공서열제와 정년제가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명예퇴직제도가 생겨났다. 명예퇴직제는 정년에 도달하기 전에 근로자가 자발적인 의사결정으로 일정액의 보상을 받고 미리 퇴직하는 형태를 말한다. 명예퇴직제는 기업에 따라 희망퇴직제, 조기퇴직제, 선택정년제 등의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우리나라 명퇴의 역사는 1974년, 공무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이 효시로 알려져 있다. 명퇴제도는 공기업 부문으로 확산되어 1985년에 대한주택공사가 처음으로 실시한 이래 한국통신, 한전, 한국도로공사, 한국담배인삼공사 등이 도입하였다. 이어서 1992년에는 조흥은행을 선두로 한일은행, 상업은행, 국민은행, 주택은행 등 금융권이 명퇴를 실시하였다.

    이처럼 조용히 진행되던 명퇴가 사회적인 문제로 등장한 것은 1996년에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S그룹의 한 제조업 계열사가 종업원의 25%를 명퇴라는 이름으로 감원시킨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대기업을 중심으로 명퇴 바람이 들불처럼 확산되어, IMF 외환위기 당시에는 중소기업을 포함하여 전방위적으로 실시되었다.



    당시 우리 기업들이 명퇴를 도입한 배경으로는 인력관리와 임금관리의 경직성을 들 수 있다. 세계화, 정보화시대가 태동하면서 저임금 고성장의 이점이 사라지고 고임금 저성장시대로 진입함에 따라 한국 기업이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뒷받침돼야 했다. 그러나 노조의 반대로 정리해고가 불가능할 정도로 노동시장은 대단히 경직되어 있었다. 기업의 임금체계 역시 연공급이 주류였기 때문에 연령과 근속 연수에 따라 인건비가 증가함으로써 임금의 동기유발기능이 상실되었으며 승진적체 현상으로 사기 또한 저하되어 있었다. 이렇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인건비와 비효율적인 인력구조를 타파하기 위하여 기업은 노동시장 유연화 전략의 일환으로 명퇴제도를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올 하반기에 들어서도 경기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경기전망이 불투명한 가운데 기업들이 구조조정에 나섬에 따라 명퇴 바람이 다시 불어닥치고 있다.

    통신업계의 과당경쟁으로 인해 맨 먼저 군살빼기에 나선 KT에서는 5500명을 명퇴시키기로 결정함으로써 엄청난 파문을 던져주었다. 가계대출 부실로 고전하고 있는 은행권에도 명퇴 바람이 불고 있다. 외환, 우리, 국민은행 등에서 대규모 감원계획을 세우고 있으나 기대만큼 신청자가 많지 않아 고민에 빠져 있는 상황이다. 두산중공업, 포스코, 대한항공은 이미 명퇴를 실시하였고, 삼성, SK 그룹 등에서도 연말까지 구조조정을 단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경기에 대한 전망이 호전되지 않을 경우 또 한 차례 외환위기 당시에 준하는 감원태풍이 밀어닥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1990년대의 명퇴와 최근의 명퇴는 유사점이 많지만 그 차이점도 드러나고 있다.

    90년대 명퇴 열풍과 어떻게 다른가

    최근 5500명을 명퇴시킨 KT 본사.

    첫째, 명퇴 대상의 연령이 낮아지고 있다. 과거의 명퇴는 40∼50대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최근에는 30대까지 내려감으로써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KT의 경우 대리급이 명퇴자 전체의 70%에 육박하고 은행권의 명퇴 리스트에도 30대 대리급이 포함돼 있다.

    둘째, 준비된 명퇴가 늘고 있다. IMF 외환위기 이전에 시행된 명퇴는 짧은 시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바람직하다는 풍조였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 간의 갈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나갈 사람은 빨리 나가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명퇴 이후에 대한 훈련이나 준비 없이 무조건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떠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므로 전직(轉職)훈련(outplacement)을 통해 재취업이나 창업에 대한 준비를 하고 떠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최근 공개적으로 전직훈련을 실시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으며 아웃플레이스먼트 관련 컨설턴트가 새롭게 뜨는 직업으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셋째, 대상자들이 명퇴 신청에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1990년대 명퇴자들은 그래도 소망이 있었다. 명퇴금과 퇴직금으로 구멍가게라도 차려서 샐러리맨의 서러움을 벗어나겠다는 열정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퇴직 보상금을 은행에 맡기면 높은 이자 덕택에 상당부분 생활이 가능해 큰 두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장사를 하는 것도 쉽지 않은 데다가 금리가 낮아 그 돈으로 생활비를 감당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직장인들이 명퇴 신청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최근 명퇴 신청을 실시한 시중의 한 은행은 예상인원의 10%에 불과한 20명만이 신청해 담당자를 애태우고 있을 정도이다.

    넷째, 명퇴가 상시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다. KT의 경우 예상 밖으로 많은 직원들이 명퇴를 신청하는 바람에 담당자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파격적인 명퇴 조건이 직원들의 마음을 바쁘게 만든 까닭이다. 명퇴 신청자들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앞으로 명퇴 위로금은 자취를 감추고 상시구조조정이 자리를 잡으면 선진국처럼 감원에 따른 보상금은 더이상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한다. 이는 우리 근로자들 사이에서도 명퇴금을 지급하는 관행이 점점 사라지고 정리해고가 보편화되리라는 의식 변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몸값’ 높이면 명퇴 두렵지 않다

    이제 실업문제는 우리 사회 최대의 화두가 되고 있다. 한국경제가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시절에는 실업률이 2%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우리 경제는 이미 저성장시대에 들어섰다. 잠재성장률이 7%대에서 4∼5%대로 떨어졌다. 1인당 국민소득은 1995년에 1만달러를 기록한 이후 8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고도성장 덕택에 실업문제를 강 건너 불처럼 여겼으나 이제는 정책 우선순위의 맨 앞을 차지하고 있다. 2003년 8월 현재 실업률은 3.3%이지만 기업들이 대량감원을 실시하게 되면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실업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근로자와 노사정의 공동노력이 요구된다. 근로자는 노동시장의 흐름을 주시해야 한다. 한국 기업에서는 해고가 어렵기 때문에 경기변동이 실업률과 직접 연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경기변화가 실업률에 즉시 반영되고 있어서 근로자들이 노동시장의 흐름에 민감하게 움직이게 된다. 앞으로 우리나라 근로자들도 노동시장 변동과 경기변동이 함께 간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노동시장의 흐름을 주시하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몸값’의 개념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몸값은 자신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노동시장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값은 현재 받고 있는 급여가 아니라 현재의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곳에 가면 받을 수 있는 급여가 된다. 이를 기회임금(opportunity wage)이라고 한다. 기회임금이 높은 사람은 명퇴가 두렵지 않다.

    노조는 노동운동의 목표를 고용보장에서 능력개발로 바꾸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노동운동은 임금 극대화와 고용보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투쟁으로 임금과 고용을 보장받는다는 것은 일시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전직훈련제도에도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경쟁력 있는 근로자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야말로 근로자들에게 생선 한 마리를 주는 미봉책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어 스스로 평생의 식사를 해결할 수 있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평생직장’시대가 아닌 ‘평생직업’시대에는 근로자들이 어디에 가든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고용가능성(employability)’을 높여주어야 한다.

    기업 역시 인적자원 개발과 투자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인재를 확보하고 육성하는 능력이 경쟁력의 첩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적자원 개발에 투입되는 요소를 비용으로 생각하지 않고 투자로 인식하는 적극적 자세를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업극복’을 최우선과제로

    근로자들의 능력개발에 아낌없는 투자를 하면서 경기가 어려울 때는 명퇴나 해고를 마지막 수단으로 간주하고 끝까지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유한킴벌리는 IMF 때 감원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4조 2교대제를 도입하여 근로자들의 능력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근로자들의 능력과 의욕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어 매출액이 늘어 오히려 고용이 확대됐다.

    정부의 역량은 일자리 창출에 모아져야 한다. 앞으로 정부는 실업과의 전쟁을 국정의 최우선과제로 삼고 대처해 나가야 한다. 고용창출은 어떻게 가능한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 때 현실화될 수 있다. 기업하기 힘들면 좋은 곳을 찾아나서는 것이 세계화 시대 기업의 생존전략이다. 우리의 기업들이 중국으로 공장을 옮기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직시하고 고용창출에 지혜를 모아야 한다.

    다시 부는 명퇴 바람. 직장인에게 다가오는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위기는 위험과 동시에 기회를 내포하고 있다. 근로자와 노사정이 함께 위기의식을 느끼고 밀려오는 고용불안의 파고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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