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문화와 함께 성장한 제임스 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전기 가운데 최근 들어 외국 유명 연예인의 삶을 다룬 전기가 국내에도 많이 소개됐다. 연예인의 전기라고 해서 정치인, 사상가, 유명 역사인물들의 전기에 비해 수준이 떨어질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연예인의 삶을 통해 대중문화, 나아가 한 시대 전체를 조망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완성도 높은 전기물도 많다.
우선 매력적인 반항아 이미지로 전세계 팬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있는 제임스 딘의 전기를 보자. 영화와 록 음악 분야에서 유명인물들의 전기를 발표한 바 있는 전기작가 데이빗 달튼은, ‘제임스 딘 불멸의 자이언트’(미다스북스)를 통해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제임스 딘을 충실하게 전해준다.
흔히 제임스 딘이 반항아 이미지 하나로 어느 날 갑자기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달튼에 따르면 제임스 딘은 고등학교 및 대학(UCLA) 아마추어 연극무대에서 출발해 TV와 브로드웨이 무대를 거친 착실한 연기파 배우였다. 배우의 본질인 다채로운 인생을 경험하기 위해 책과 그림을 비롯한 여러 예술장르에 집착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저자는 제임스 딘의 삶과 대중적 인기를 미국의 역사와 문화라는 보다 큰 맥락에서 파악한다.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잃은 소년은 독실한 퀘이커 교도인 고모부 집으로 옮겨가고 다시 작은 농촌에서 도시로 나간다. 제임스 딘의 그러한 삶의 역정은 신세계를 향해 가는 미국의 고된 여정을 보여준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낭만주의와 청교도주의, 영적 유토피아를 향한 꿈과 물질적인 엘도라도. 이렇게 상반된 가치와 이상을 향한 아메리카 드림의 분열적 요소를 제임스 딘의 삶이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임스 딘 신드롬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가 스타덤에 오른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뒤 물질적 풍요 속에서 청소년들이 독립적 문화 소비군으로 등장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제임스 딘은 당시 10대들의 복장에 권위를 부여했고, 이로 인해 얼굴 없는 존재였던 청소년들에게 얼굴을 갖게 했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시작부터 난 불량소녀였다”
제임스 딘이 추억 속의 스타라면 마돈나는 현재진행형 스타다. 비틀스와 엘비스 프레슬리보다 더 많은 팝차트 1위곡과 16편의 영화출연, 앨범 14장, 5번의 콘서트 투어, 1억장이 넘는 앨범 판매, 다채로운 남성편력 등과 같은 기록들만으로 마돈나를 재단하는 건 금물이다. 앤드루 모튼의 ‘Madonna, Sexual Life: 울지마, 울지마, 울지마’(나무와 숲)는 1958년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마돈나 루지 베로니카 치코네가 하나의 문화적 상징이자 마돈나산업으로까지 떠오른 과정을 담고 있다.
미시건대학을 중퇴한 뒤 싱글 앨범을 냈지만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던 마돈나는 1983년 대타로 잡지 인터뷰를 한다. 인기 팝그룹이 인터뷰 약속을 펑크내는 바람에 기회를 잡은 마돈나는 “시작부터 난 불량소녀였다”며 거침없이 혹은 과장되게 자신의 어린 시절과 성생활을 털어놓으며 주목을 받는다.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고 자신을 부각시키는 기질을 엿볼 수 있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마돈나의 성공비결이 애정결핍과 질문 덕분이었다고 설명한 대목이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마돈나는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아버지가 퇴근해 돌아오면 제일 먼저 달려가 무릎에 앉아 종알거리거나 노래하고 춤을 췄다. 또 서른 살에 죽은 어머니처럼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았다.
천부적인 사업가로서의 재능도 빼놓을 수 없다. 마돈나는 주도면밀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고 관리하는 데 능숙하다. 더구나 마돈나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철저히 가리는 전략을 택했다. 자신의 생활을 담은 다큐멘터리 ‘진실 혹은 대담’을 촬영할 때도 사업상 회의하는 장면은 절대 못 찍게 했고,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들어온 강의 요청도 거절했다. 엔터테이너로서의 모습은 최대한 부각시켰지만 사업가로서의 모습은 철저히 감추는 전략이었다. 이런 전략을 통해 방송계, 광고계, 영화계, 출판계를 석권했다.
하지만 그런 마돈나에게도 실패의 쓴맛을 본 분야가 있으니 바로 애정 문제였다. 도발적이고 당당한 겉모습과 달리 마돈나는 남자에게 무척 약했다. 결혼했거나 동거했던 남자들도 대부분 결점투성이 사람들이었다. 마돈나는 그런 남성들에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전화를 걸며 매달리곤 했다고 한다.
비판적 지식인과 염문의 왕자
가을이 깊어지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고엽’이라는 노래로 기억되는 프랑스의 가수이자 배우 이브 몽탕. ‘세기의 연인 이브 몽땅의 고백’(꿈엔들)은 1988년부터 일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한해 전인 1990년까지 인터뷰를 재구성한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이브 몽탕을 연예인이라기보다 비판적 지식인으로 기억하지만 실제 이브 몽탕은 정규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작가 아서 밀러, 화가 피카소, 철학자 사르트르와 교유한 것은 물론, 반전운동과 핵실험 반대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또 좌파임을 주장하면서도 구소련의 침략 전쟁을 맹렬히 비판하는 등 ‘행동하는 지성’으로서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이브 몽탕은 스캔들의 왕자이기도 했다. 에디트 피아프, 마릴린 먼로, 셜리 맥클레인, 카트린 드뇌브, 시몽 시뇨레 등 유명 연예인과 열렬한 연애와 사랑을 나눴다. 하지만 자신이 진정 위안을 얻은 여인은 아내이자 유명 여배우인 시몽 시뇨레 한 사람뿐이었다고 고백한다. 시몽 시뇨레는 이브 몽탕과 마릴린 먼로의 염문설이 돌자 “마릴린 먼로가 품에 안겨 있는데 무감각할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라며 남편을 감싸기도 했다.
그런 아내를 몽탕은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늙어가는 시몽의 모습을 보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노쇠는 나를 감동시켰다. 그녀가 죽고 없는 지금 내 머리에 떠오르는 그녀는 매혹적인 젊음이 아니다. 내가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텔레비전을 볼 수 없었던 그 여인이다.”
진짜 배우 꿈꿨던 마릴린 먼로
이번에는 이브 몽탕은 물론 존 F. 케네디, 조 디마지오, 아서 밀러 등 수많은 유명인들과 염문을 뿌리며 전세계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 마릴린 먼로가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28세 때인 1954년까지의 이야기를 적어 사진 작가 밀턴 그린에게 넘겨준 원고를 토대로 만들어진 책이 바로 ‘마릴린 먼로, My Story’(해냄)다.
책에서 마릴린 먼로는 자신의 섹시한 외모에만 관심을 두는 주위의 시선이 싫었다고 고백한다. 성적인 이미지만 써먹으려 하는 영화제작자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늘 외로웠다. 먼로는 배우의 경험과 주관을 담아 연기할 것을 강조한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기법을 철저히 연구했다. 단순히 관능미나 육체파가 아니라 삶을 담아 연기하는 배우로 인정받기를 원했고 노력했지만, 세상이 그녀에게 원한 것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고뇌를 엿볼 수 있는 육성을 들어보자.
“스타가 되는 것은 회전목마 위에 사는 것과 같다. 여행을 할 때도 회전목마를 가지고 간다. 그 지역 사람이나 낯선 풍경은 볼 수 없다. 주로 보는 것은 똑같은 신문기자들, 인터뷰하러 온 똑같은 종류의 사람들, 그리고 내가 찍힌 똑같은 구도의 사진들이다. 내 속에는 연기에 대한 꿈이 있었다. 그건 감옥 안에서 ‘나가는 곳’이라고 적힌 문을 바라보는 것과 같았다.”
오늘날 먼로는 페미니즘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먼로는 남성중심적 가부장제의 희생양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자 했던 커리어 우먼의 전형이라는 것. 물론 그런 해석이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깊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먼로 자신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상한 성적인 느낌의 진동이나 일으키면서 섹스 밀매꾼 영화사에 떼돈을 안겨주는 배우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되고 싶었다.”
회고록이든 전문 작가에 의한 전기든 한국 대중 연예인들의 삶을 담은 본격적인 인물 도서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시대의 애환을 함께하며 대중과 울고 웃던 그들의 삶은 한 시대의 꿈과 희망을 담은 축소판인데 말이다. 해외 연예인들의 전기를 살펴보면서 느끼는 가장 큰 아쉬움이라면 바로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갖지 못한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