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은 위험을 감수하며 진검승부를 택한 것 같다. ‘칼이 짧은 자는 한 발 더 들어가서 찔러야 한다’는 말이 있다. 현재 직면한 모든 어려움을 제자리에서 제압하기 어렵다면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한 발짝 더 들어가 문제를 푸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10월10일 가전제품 매장 앞에서 한 시민이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제안 기자회견 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비록 국민이 재신임 쪽에 손을 들어준다 한들 그것이 어찌 기뻐서 들어주는 것이겠는가. 실망했으나, 그래도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재신임하겠다는 것이 민심의 실체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노대통령은 왜 재신임을 결단했을까. 그 이유는 그리 복잡해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1년 가까이 끌어온 부패정국을 일소하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물론 그 친인척과 측근, 그리고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 모두의 부정부패 의혹을 성역 없이 조사하고, 확고히 청산함으로써 국정을 쇄신하겠다는 것이다.
책임질 일이 있으면 대통령부터 책임지고 그 누구도 예외를 두지 않는 책임정치를 펼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부패의 문제가 다시는 정국운용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분명한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대통령은 또한 제대로 일을 해나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 싶어한 듯하다. 정책마다 반기를 들고, 인사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발목을 잡는 정국에서 벗어나 건설적인 국정운영을 해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 하겠다.
그간 대통령이 안개 속을 표류하는 정국에 서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끊임없이 제기되었다가 사라져간 ‘카더라’식의 주변 비리 의혹들, 대선 자금 의혹, 각종 법안의 처리 지연, 장관의 해임건의안 통과, 국정원장과 감사원장에 대한 임명동의안 시비는 대통령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장애가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의원은 노대통령을 가리켜 “나는 저 사람을 대통령으로 보지 않는다”는 망발을 했고, 최근에는 국회 시정연설에서 야당 의원들이 대통령 입장 시에도 일어서지 않는 등 비상식적인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어떤 네티즌의 말대로 노대통령의 결단은 알렉산더 대왕의 매듭 끊기에 비견된다고 할 수 있다.
옛날 프리지아 왕국의 고디어스 왕은 매듭을 하나 묶고서 ‘이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를 지배할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다. 이 전설의 매듭은 어찌나 복잡하게 매어 놓았는지 아시아 정복의 꿈을 꾸는 제왕들이 무수히 도전했으나, 아무도 풀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손에 들어간 뒤 이 매듭은 너무나 어이없이 풀리고 만다. 알렉산더 대왕은 단칼에 그 매듭을 베어 풀어 헤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은 해방 후 한국정치사의 얽히고 설킨 매듭, 낡은 정치관행, 사회 곳곳에 만연한 비리와 부패, 개발과 성장 위주의 경제시대를 살아오면서 누적된 각종 모순을 풀고 우리 사회에 새로운 장을 열자는 어려운 결단이었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노무현식 정공법
재신임 선언만이 그간의 부패를 청산하고 앞으로 나아갈 추동력을 얻는 길이라고 대통령은 생각했을 것이다. 국회를 지배하고 있는 기성 정치세력과 막강 언론이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갇혀 절대 풀리지 않을 매듭과 씨름하는 대신, 재신임이라는 칼로 단번에 승부를 내겠다는 구상이 아니었겠는가. 노무현 대통령은 명확히 밝혔다. “대통령의 재신임을 물어 책임질 일이 있으면 물러나는 것도 민주정치사의 발전이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대통령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선을 치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한 나라의 대통령이 스스로 재신임을 제안한단 말인가. 정말 그 방법밖에 없었나. 현재의 여소야대 상황은 이미 대선 전에 만들어진 구도다. 3당합당으로 여소야대의 정국을 넘었던 노태우 대통령, 야당 의원을 빼내오고 의원을 꾸어주면서 ‘여대’ 정국을 만들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선택이 정치를 얼마나 왜곡시켰는지를 노무현대통령은 잘 알고 있다. 그로 인한 최대 피해자이기도 했던 노대통령으로서는 아마도 그런 식의 덧셈정치(?)를 선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노대통령은 대신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며 진검승부를 택한 것 같다. ‘칼이 짧은 자는 한 발 더 들어가서 찔러야 한다’는 말이 있다. 현재 직면한 모든 어려움을 제자리에서 제압하기 어렵다면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한 발짝 더 들어가 푸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노대통령의 이러한 선택이 치밀한 전략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는 늘 정공법을 택해온 사람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봉착해도 도망치는 일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다.
지금 노대통령의 머리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꽉 차 있을 것이다. 자기가 누릴 수 있는 권력을 포기하면서까지 바보처럼 나아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민이 지혜와 힘을 모아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일에 참여해주기를 대통령은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노대통령의 재신임 선언 이후 정국양상을 보며 감탄했다고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도 3김에 못지않은 승부사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노대통령이 일거에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우습게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분석은 가벼운 안주거리에 불과하다. 지금 국민이 노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것은 정치 승부사의 모습이 아니라 올바른 국가지도자의 모습이다.
노대통령은 탈(脫)권위와 겸손한 권력, 권력의 분산을 추구하고 있지만 국민은 오히려 강력한 리더십을 원하고 있는 것 같다. 국민은 지금 고통스럽다. 실업의 고통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대통령의 지지도는 국민의 고통지수에 반비례한다.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나는 대통령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현장대통령이 되겠다’ ‘경제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하고 현장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국민의 소리를 듣고, 문제가 있다면 그 답을 현장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국민참여 이끌어내야
국민의 참여 여부가 참여정부의 성패를 가른다. 국민의 참여란 바로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에서 나온다. 그러나 아직 참여정부는 국민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에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국민이 참여할 길도 마땅치 않아 보인다.
나는 대통령이 국민들 속에서 국민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국민들이 힘겨워하는 경제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력하며, 비전과 청사진을 제시하고 꿈과 희망을 줄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의 국민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노대통령은 자질과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이런 일의 전문가이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람이기도 하다.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의 노무현 대통령, 삼성자동차와 대우자동차의 문제를 해결하던 그때의 노무현 대통령을 돌이켜보자.
노대통령은 ‘우리 다시 한번 해보자! 제대로 된 나라, 세계 일류국가를 만들어보자!’는 비전을 제시해 온 국민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 동북아중심국가라는 목표 또한 그런 환경에서라야만 달성될 것이다.
노대통령은 평소 ‘청년아 나를 딛고 나아가라’는 루쉰(魯迅)의 말을 인용하곤 했다. 2만달러 시대 이야기도 그렇게 추진되어야만 한다. ‘내 임기 중에 달성하겠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2만달러시대를 이룩하는 디딤돌이 되겠다. 2만달러시대로 우리 모두 함께 가자’고 힘주어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