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명퇴 후 창업 나선 ‘선배’ 5인의 경험담

“과거 잊고 앞치마부터 둘러라”

  • 글: 김성환 ‘월간 창업&프랜차이즈’ 기자 spam001@hanmail.net

    입력2003-10-28 13: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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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직금을 들고 창업전선에 선 家長은 불안하기만 하다. 멋모르고 장사에 뛰어들었다가 돈만 날린 동료들의 이야기도 남의 일 같지 않다. 5~6년 전 ‘명퇴 창업’에 나섰던 선배들의 충고에는 ‘金科玉條’로 여겨도 좋을 교훈이 담겨 있다.
    “식당 종업원으로 일할 각오라도” 사업실패 끝에 분식집 주인 된 조경호씨

    명퇴 후 창업 나선 ‘선배’ 5인의 경험담
    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근처, 대로변 고층빌딩 뒤편으로 아담하게 자리잡은 ‘맛샘식당’. 분주한 점심시간이면 살짝살짝 미소를 지으며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 분식집 주인 조경호(44)씨다. 음식을 내는 것이나 행주로 테이블을 닦는 모습이 약간 투박해 보이지만 그의 식당운영 경력은 벌써 4년째. 일에 정(情)도 붙고 재료 준비나 메뉴 개발에 대한 긴장도 어느 정도 누그러진 것 같아 보이는 게 영낙없는 ‘분식집 아저씨’다.

    “좀 피곤하긴 해도 직장생활할 때보다 재미있어요. 열정과 보람은 오히려 그때보다 더 큽니다. 내 일이니까요.”

    1998년 여름, 신용보증기금 계열사인 신보창투사에 다니던 조경호씨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IMF 여파로 명예퇴직 신청을 받는다는 공고가 사내에 나붙은 것. 한 달 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그는 10년 동안 일해온 회사를 떠날 결심을 했다. 똑같은 업무, 반복되는 일상이 싫다는 게 그 이유였다.

    “정년퇴직하는 내 모습을 떠올려보니 지금과 별 차이가 없었어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다른 일을 하고 싶었죠.”



    그렇게 사표를 내던지고 회사를 나왔지만, 일은 결코 쉽게 풀리지 않았다. 퇴직 후 곧바로 옛 직장 동료들과 십시일반 뜻을 모아 차린 경영컨설팅회사는 실적이 저조해 결국 6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1년을 준비해 음식쓰레기를 퇴비로 바꾸는 기계제조 사업을 계획하고 경영참여도 했었지만 이것 또한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사람들의 인식이 낮았던 터라 공장을 가동해볼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다. 어렵게 뛰어들었다가 맛본 실패의 경험은 직장생활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조씨는 이 모든 것이 명예퇴직에 앞서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구체적인 준비가 하나도 없었어요. 막연한 생각만을 믿고 아무것도 모른 채 일을 벌였던 거죠. 지금 명퇴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장기적이고 확실한 준비가 선행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보수집 과정이 정말 중요해요. 직장 다닐 때 생각했던 것과 밖에서 부딪치는 현실은 완전히 다르거든요. 만약 식당을 개업할 생각이 있다면 회사를 그만두고 식당 종업원으로 취직해 일을 배우겠다는 각오가 돼 있어야죠.”

    식당을 개업한 후 조씨는 그동안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재도약을 위한 ‘업무혁신’에 들어갔다. 가게 문 닫고서도 자정을 훌쩍 넘겨서까지 그날 매출을 분석하고, 판매된 메뉴를 정리해 데이터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주말이나 흐린 날, 비 오는 날엔 면종류가, 맑은 날엔 찬 음식이 잘 팔린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씨는 이렇게 해서 날씨에 맞춰 재료를 구입해 비용을 줄여나갈 수 있었다.

    “규모가 작으면 어떤가요. 남의 눈이 중요한 건 아니죠. 생각을 바꾸니까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야겠다, 여기서 승부를 봐야겠다는 각오가 생기더군요. 현재 제 모습이 퇴직 당시 기대했던 것에 못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회사 나오고 나서 오히려 시야가 많이 넓어졌죠. 작지만 태산만한 자부심을 느끼는 일터를 갖게 된 것에 정말 만족합니다. 이것이 바로 명예퇴직 5년 만에 얻은 내 재산목록 1호입니다.”

    “생각은 짧게, 행동은 빠르게”1000만원으로 침대세탁업 시작한 이정태씨

    명퇴 후 창업 나선 ‘선배’ 5인의 경험담
    “무엇보다 당장의 생계가 가장 큰 걱정이었죠. 이 일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으니까요. 퇴직금이니 위로금이니 다 합쳐도 집 살 때 빌린 은행 대출금 갚기엔 턱없이 모자라고….”

    영국계 보험회사인 씨엠아이(CMI)의 영업국장으로 일하던 이정태(47)씨에게 명예퇴직이라는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지난 1998년 가을. IMF 이후 휘청거리던 회사가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다른 회사에 합병되고 만 것이다. 고용승계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그는 회사를 떠나야 했다.

    시름에 잠겨 찾았던 경기도 가평의 한 산에서 노점을 준비하던 어느 명예퇴직 부부를 만난 뒤로 그는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 그들 역시 이씨와 비슷한 처지였다. 어느 모로 보나 노점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던 그 부부의 결심이 이씨에게 자극이 된 것이다.

    “명예퇴직이라는 것에 연연할 필요가 없더라고요. 어차피 직장은 한계가 있잖아요. CEO가 아닌 이상 적당한 시기에 그만둬야 하는데, 그 시기가 조금 일찍 왔을 뿐이었죠. 그렇게 생각하니 직장 다니는 동안 퇴직 이후의 계획을 전혀 세워놓지 않은 것이 부끄러워지더군요.”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은 있게 마련이었다. 오랜만에 참석한 동창회에서 그는 미국에서 살다 온 친구에게 그곳의 침대, 카펫 청소대행업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들 피부병도 예방하고 쾌적한 생활도 보장하는 클리닝 전문업체가 우리나라에도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언뜻 듣기에도 괜찮은 사업 같아 보였다.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일단 시작하고 볼 일이었다. 그는 세탁소를 찾아다니며 클리닝에 대해 알아보는 한편, 소형 승합차에서 각종 약품에 이르기까지 창업에 필요한 장비와 물품들을 준비했다. 그리고 1999년 1월, 명예퇴직 후 4개월 만에 종잣돈 1000만원을 갖고 전문 침대세탁업으로 창업의 첫발을 내디뎠다.

    “생각을 오래하니까 오히려 무기력해지더군요. 자신감도 점점 줄어들고. 인터넷 사이트만 뒤적거리고 이것저것 머리만 굴리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생각은 깊고 짧아야 합니다. 대처할 시간도 없이 퇴직한 사람이라면 빨리 행동에 나서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아요. 명퇴를 결정했다고 해서 기죽어 지내지 마세요. 사람들도 자주 만나고 여기저기 돌아다녀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이정태씨도 처음 6개월 동안은 고생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가정용 침대에 수많은 집먼지, 진드기, 박테리아가 서식하고 이것이 아이들의 천식과 아토피성 피부염을 일으킨다는 어느 대학교수의 연구결과가 언론에 발표됐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침대 세탁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창업시장에서도 이러한 업종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주문도 늘고 가맹점을 내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현재 이씨는 30여 개의 점포를 출점시킨 프랜차이즈 본부의 대표이다.

    “침대 세탁이 물론 거창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여기서 끝난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아요. 이 일을 계기로 활동영역을 넓히고 또 다른 일을 만들어갈 겁니다. 지금 명퇴를 꿈꾸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라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양복 입고 넥타이 매던 시절은 옛말”13년 몸바친 직장 떠나 반찬가게 연 정호기씨

    명퇴 후 창업 나선 ‘선배’ 5인의 경험담
    서울 봉천동 재래시장에서 반찬전문점을 운영하는 정호기(41)씨. 무려 120여 가지에 달하는 맛깔스런 반찬들도 구경거리지만 남자인 그가 보란 듯이 두르고 있는 빨간 앞치마가 더욱 눈길을 끈다.

    “제 삶을 바꿔놓은 앞치마입니다. 이거 안 둘렀으면 지금 어떻게 됐을지 몰라요.”

    지금껏 살아오며 단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앞치마를 정씨가 두르게 된 것은 3년 전 작은 치킨전문점을 개업하면서부터다. 지난 1996년, 13년 동안 애정을 쏟았던 회사인 (주)제우정보는 당시 경기침체에 따른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부도로 쓰러졌다. 이 과정에서 그도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컴퓨터 제조 및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서 잘나가던 회사였던 터라 동종 업체에서 ‘러브콜’을 보내오기도 했다. 하지만 연봉협상 때마다 그는 ‘부도회사 출신이 목소리가 너무 크다’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결국 ‘더러워서 내 일 하겠다’는 결심으로 1999년 시작한 것이 바로 치킨전문점이다.

    드디어 개업식날 아침. 가게에 도착한 정씨는 일을 하기 위해 빨간 앞치마를 무심코 손에 들었다. 그런데 그것을 차마 두르지 못하고 30분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래도 한때 잘나갔었는데, 앞치마가 뭔지도 모르고 살던 사나이가 어쩌다가…. 참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었어요. 왕년은 잊어버리자, 처음부터 시작하자는 생각에 눈 딱 감았죠.”

    그때부터 쓸데없는 자존심은 사라졌다. 새벽에는 업소 소개 전단을 들고 거리를 누비고, 낮엔 동네 아줌마들을 찾아다니며 넉살 좋게 홍보용 병따개를 나눠줬다. 종업원, 재료상, 고객을 구분하지 않고 인간적으로 대했다. 그렇게 1년이 흐르자 하루 10마리 팔리던 닭이 150마리까지 팔려나갔다. 결국 그의 점포는 당시 1300여 개에 이르던 해당 브랜드의 전국 가맹점 중에서 매출액 ‘톱3’에 진입하기에 이르렀다.

    “양복 입고 넥타이 매고 부하 직원들 호령하던 것은 과거의 내 모습일 뿐이었습니다. 의정부의 20만원짜리 옥탑방에 살면서 보증금 1000만원짜리 가게 하나 덜렁 갖고 있는 것이 현재 내 모습이었죠. 과거에 사로잡혀 있으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특히 화이트칼라 출신 퇴직자들은 하루라도 빨리 그런 생각을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대신 그 순간부터는 과감하고 확실하게 도전해야죠.”

    올해 초, 그는 2억5000만원을 들고 다시 ‘금의환향’했다. 치킨 가게를 처분하고 서울로 돌아와 반찬전문점을 개업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는 여전히 빨간 앞치마를 두르고 있다.

    “명예퇴직자, 구조조정 대상자, 부도로 회사를 떠나야만 하는 사람들 모두 힘들겠죠. 하지만 저는 ‘퇴직을 결심했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떠나라’고 하고 싶어요. 양복과 넥타이, 부장이니 이사니 하는 직함들, 삶의 가치가 거기에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납품업체 영업사원 심정으로” 젊은층 상대 삼겹살집 연 김흥동씨

    명퇴 후 창업 나선 ‘선배’ 5인의 경험담
    지난 1997년 IMF 사태 직전 미도파백화점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이곳에도 구조조정과 명예퇴직의 한파가 휘몰아쳤다. 김흥동(42)씨는 이때다 싶었다. 주저할 것 없이 회사에 사표를 내고 평소 관심을 가졌던 무역업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인도네시아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해보지 않겠느냐는 지인의 제의에, 당장 현지로 날아가 3년을 일하면서 안목을 넓혔다. 그리고 2000년 귀국해서는 카페풍의 와인숙성 삼겹살 프랜차이즈 본부를 경영하는 옛 직장 선배를 만나 망설임 없이 창업전선에 뛰어들게 됐다.

    “내 일에 대해 막연한 기대를 해왔었는데 명예퇴직이란 것이 자극이 됐습니다. 그러고 보면 명예퇴직을 꼭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오히려 새로운 도약을 위한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젊은층을 타깃으로 한 새로운 삼겹살집을 만들겠다고 생각한 김씨는 대리석과 나무 바닥은 물론 심플한 디자인의 가구를 이용해 퓨전 스타일의 독특한 점포를 꾸며, 지난 2001년 3월 ‘젠젠’ 부평점을 오픈했다. 인테리어는 개업 당시부터 손님들에게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화이트와인에 24시간 숙성시킨 후 서양식 양념과 조화를 이룬 삼겹살의 맛도 결코 인테리어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자 ‘고깃집 같지 않은 고깃집’에 대한 소문은 하루하루 퍼져나갔다.

    장사가 잘 되니 만족스러울 법도 한데, 2년여가 지난 요즘 김씨는 웬일인지 퇴직자들이 섣불리 음식점 창업에 뛰어드는 것을 말리고 싶다고 했다.

    “10년만 젊었더라도 음식점으로 크게 성공하고 싶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50~60대가 돼서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지더라고요. 지배인이 있고 종업원도 수십 명씩 되는 으리으리한 식당이 아니고선 나이 든 후에도 일을 계속하기가 힘들 것 같아요. 특히 젊은층을 상대로 하는 음식점의 경우 홀에서 나이 든 사람이 왔다갔다하는 것은 마이너스 요소거든요. 손님들이 불편해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가게에 안 나올 수도 없고.”

    그래서인지, 김씨는 이제야 조금씩 자신의 분야에 대한 아쉬움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유통분야에서 지금처럼만 했더라면…. 닥치는 대로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무언가 허전한 것 같아요. 회사에 다니다 그만두고서 창업에 나설 땐 급하게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이 했던 일과 관련있는 분야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엉뚱한 일 시도하면 성공하기 힘들고, 나중에 미련도 남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김씨는 퇴직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잊어버리기 쉬운 점 하나를 지적했다.

    “제2의 인생이 한 순간에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과거의 습관, 인간관계, 경험, 노하우 등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완전히 분리될 순 없으니까요. 일단은 회사에서도 그 분야에선 최고로 평가받아야죠. 직장생활은 대충 하다가 내 일 할 때만 열심히 하겠다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백화점의 10년차 영업사원과 납품업체의 1년차 영업사원 중 누가 더 영업을 잘하는지 아세요? 납품업체 1년차 직원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선택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니까 최선을 다하는 것이죠. 그런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일을 하든지 잘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대출받는 법도 몰랐던 순진한 은행원이었다” 계약직 포기하고 독립한 조순자씨

    명퇴 후 창업 나선 ‘선배’ 5인의 경험담
    명목상 ‘희망퇴직’이었지만 어떤 선택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남편과 사별한 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세 자녀의 뒷바라지를 위해 17년 동안 오직 일에만 매달렸던 조순자(54)씨에게 퇴직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현실이 아니었다.

    그녀가 다니던 제일은행은 1998년 1월,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1700여 명의 인원감축을 단행했다. 정든 은행을 완전히 떠나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조씨는 하루아침에 계약직 사원으로 전락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는 해도 월급이 기존의 3분의 1로 줄어들자 도저히 생계를 꾸려나갈 수가 없었다. 장사라고는 ABC도 모르던 조씨가 장사에 나서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퇴직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당연히 어떠한 대비도 없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명예퇴직은 언제든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것 같아요. 평소에 조금씩이라도 퇴직 후에 할 일에 대한 계획을 세워둔다면 당황하지 않고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일반 사무직 직원들이 퇴직 후에 가장 쉽게 선택하는 것이 음식점 창업이라고 그러더군요. 특별한 기술 없이도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시 저처럼 퇴직한 뒤 막연한 생각만으로 창업했던 사람들 중에는 실패한 사람들이 꽤 많아요. 사업이나 창업은 결코 말이나 생각만으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씨는 “은행에서 일했으면서도 대출받는 방법조차 제대로 몰랐”을 정도로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1999년, 조씨는 자신이 다니던 제일은행 본점 소비조합 내의 생필품 코너를 인수했다. 그러나 손님을 맞이하는 일은 낯설었고 물건 매입 과정 역시 혼란스럽기만 했다. 음료수 상자를 들고 22층까지 하루에도 서너 번씩 배달하는 일도 여자인 그녀에게는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조씨는 일단 명퇴를 결심한 사람이라면 “밀어붙여야 할 때는 용기를 가지고 밀어붙여야 한다”고 충고한다.

    “저도 그저 닥치는 대로 부딪쳤고, 그러는 동안 일을 배웠어요. 별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피곤했지만 매일매일 나아지는 것 같아 만족스러웠죠.”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사업수완이 생겨났다. 손님에게 자연스럽게 인사도 건네게 되었고 물건 배달도 익숙해졌다. 수입도 조금씩 늘어 계약직 직원 시절 월급의 두세 배에 이르는 액수를 챙길 수도 있었다. 점차 많은 것이 달라졌고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생필품 코너를 운영한 지 어느덧 5년째가 됐다. 퇴직 당시 대학생이던 조씨의 큰딸은 얼마 전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렸고, 고등학생이던 두 아들은 의젓한 대학생이 돼 있다. 조씨는 “잘 자라준 자녀들을 볼 때면 그동안 겪은 고생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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