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전11기로 성공한 국내 최초의 과학기술위성. 설계에서 조립, 시험에 이르기까지 순수 우리 기술로 만든 이 위성은 ‘우리별’시리즈의 완결판이다. 5년 동안 30여 명의 연구원이 겪은 애환과 숨가빴던 최종 발사과정 뒷얘기.
과학기술위성 1호가 실린 코스모스로켓이 발사대에서 대기하고 있다.
9월29일 밤 11시24분. 거듭되는 교신 실패로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11번째 교신시도가 시작된 지 5분 만에 한국 주도의 첫 우주관측용 위성인 과학기술위성 1호가 자신의 건재함을 알려오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위성과 교신에 성공했습니다!”
자정 무렵 기자의 휴대전화로 전해지는 연구원의 목소리는 작지만 또렷했다. 그간의 마음고생을 훌훌 털어버린 듯 기쁨에 찬 목소리였다.
한때 과학기술위성 1호가 하도 연락이 되지 않자 일각에서는 끝내 ‘우주 미아’가 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116억9000만원이라는 거액도 거액이지만, 5년 동안 30여 연구원이 쏟아낸 피땀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러시아측의 잘못된 정보
과학기술위성 1호는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과학기술위성 1호는 9월27일 오후 3시11분(한국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북동쪽으로 800km 떨어진 플레체스크 우주센터에서 발사됐다. 러시아 발사체인 코스모스로켓에 실려 발사됐는데, 로켓 발사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로켓에 연료를 주입하는 밸브에 이상이 생겨서 예정보다 꼭 하루 늦게 우주로 떠났던 것. 한때 현지 기상 악화로 발사가 연기됐다고 전해지기도 했으나, 당시 발사를 참관했던 한국측 관계자에 따르면 “러시아 우주센터에 내리던 비는 로켓 발사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로켓 발사는 하루 연기되긴 했지만 다행히 성공적이었다. 물론 로켓의 발사 성공이 위성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후에도 필요한 절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로켓이 발사된 후 위성이 로켓에서 제대로 분리돼야 한다. 과학기술위성 1호는 발사 35분 만에 고도 690km에서 분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예정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발사 후 2시간이 넘어서야 러시아 플레체스크 우주센터측은 우리 위성이 계획대로 잘 분리됐다는 소식을 한국측에 전해주었다. 늦게 통보한 이유는 로켓과의 통신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다음으로는 발사 후 7시간여 만에 KAIST 인공위성센터 지상국이 위성과 교신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27일 밤 10시5분경 10여 분 동안 첫 교신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한국과학기술원 인공위성연구센터의 이현우 박사는 “우리별 2호 때는 5번째 시도 끝에 교신에 성공했고, 선진국에서도 자주 초기 교신에 실패한다”고 밝혔다. 그 뒤로도 3번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러시아에서 보내준 위성의 궤도 정보가 의심스러웠다. 정말 우리 위성이 예정대로 로켓에서 분리되긴 한 것일까. 나중에 러시아의 정보는 정확히 맞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초기 교신 실패의 주원인에 대해 인공위성연구센터의 임종태 소장은 “위성의 UHF 송신기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만일 UHF 송신기에 이상이 없었다면 위성의 궤도 정보가 다소 부정확해도 교신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4차 교신 이후에는 위성의 또 다른 교신채널인 S밴드 송신기가 동원됐다. 2㎓ 대역인 S밴드는 UHF보다 주파수가 높아 송수신에 유리하다. 하지만 S밴드는 좁은 영역으로 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위성의 정확한 궤도 정보가 필요했다. 러시아측에서는 자신들이 보낸 정보가 맞다는 주장만 되풀이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우주미아’라 단정 짓기엔 이르다”
사실 우리의 과학기술위성 1호는 러시아, 영국, 나이지리아 등의 위성 5기와 함께 코스모스로켓에 실려 우주로 향했다. 우주 공간에서 6기의 위성이 몰려다니는 셈이다.
북미우주방위사령부(NORAD)는 우주공간에 떠 있는 10cm 이상의 인공비행물체를 감시하는 대표적인 곳으로 새롭게 발사된 위성들을 추적해 그 궤도정보를 인터넷에 공개한다. 코스모스로켓에 실려 우주로 간 위성 6기도 NORAD의 추적대상이었다. 하지만 발사 직후에는 위성 1기에 대한 자료만 공개됐다. 발사 다음날이 휴일인 탓이었을까.
한국의 또 다른 위성인 아리랑 1호는 발사 초기에 정확한 궤도 정보를 얻지 못해 교신에 실패하다가 6시간 만에야 첫 교신에 성공했다. 한 관계자에 따르면 “아리랑 1호 때는 어느 정도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NORAD의 자료를 곧바로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루가 더 지난 월요일에야 NORAD는 6기 위성의 정보를 모두 공개했다. 인공위성연구센터 유광선 박사는 “NORAD는 로켓에서 분리된 순서대로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에 어느 것이 우리 위성인지를 가려낼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러시아 발사업체는 6기의 위성이 세 그룹으로 나뉘어 로켓에서 분리됐는데 과학기술위성 1호는 두 번째 그룹에 속한다는 정보를 주었다. 하지만 이것도 잘못된 정보였다. 결국 S밴드를 이용한 교신 시도도 6차례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일부 언론은 월요일 저녁에 나오는 가판용 신문(화요일자)에서 ‘과학기술위성 1호 사실상 우주 미아’라는 제목을 크게 달고 있었다. 하지만 유박사는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며 “우주 미아라고 단정짓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말했다. 나중에 전해들은 바로는 최후의 방법으로 6기 위성 하나하나에 대해 우리 위성인지를 확인할 계획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미 인공위성연구센터를 비롯해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한국항공대학교 등의 전문가들로 대책반이 구성됐다. 회의를 통해 의견교환과 기술지원이 펼쳐졌다. 발사 참관단 중 한 전문가가 우리 위성이 첫 번째 그룹에 속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여러 개의 위성이 함께 실릴 때 돈을 가장 많이 지불한 나라(이번 경우에는 영국으로 추측된다)가 로켓에서 위성의 분리 순서를 맘대로 결정하는데, 마지막 순간에 분리 순서가 바뀐 것 같다는 말이었다.
결정적으로 11차 교신 시도가 있기 1시간 반쯤 전인 밤 10시에 영국 서리대학에서 자기네 위성 3기에 대한 궤도 정보를 보내왔다. 또 3기 모두 두 번째 그룹에 속한다는 정보도 있었다. 러시아의 잘못된 정보 때문에 계속 엉뚱한 위성에게 헛손질을 해댔던 셈이다. 드디어 11차 교신 시도에서 첫 번째 그룹에 속하는 한 위성에게 지상국의 수신기를 향한 결과 우리 위성과의 교신에 성공할 수 있었다.
29일 밤 11시24분. 56시간 동안의 침묵을 깨고 인공위성연구센터 지상국의 수신모니터에 위성의 신호가 잡혔다. 한국 주도로 제작된 첫 우주관측 위성이 성공을 향한 첫 신호탄을 쏘아올리는 순간이었다. 최근 원격으로 위성의 온도와 자세, 그리고 제어 컴퓨터의 상태를 진단한 결과 다행히 위성의 건강이 양호한 것으로 전해진다.
설계, 조립, 시험을 순 우리 기술로
과학기술위성 1호는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에서 만든 우리별 1·2·3호에 이은 우리별 4호에 해당하는 소형 위성이다. 우리별 1호를 개발하던 당시 우리나라에는 인공위성을 제작할 만한 자체 기술이 없었다. 우리 젊은이들이 영국 서리대학에서 고생하며 배우고 연구한 끝에 빚어낸 작품이 바로 우리별 시리즈다.
과학기술위성 1호는 어찌 보면 우리별 시리즈의 완결판인 셈이다. 설계부터 조립, 시험에 이르기까지 순수 우리 기술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 과학기술위성에는 지구관측용인 기존의 우리별 지도제작용 아리랑 위성, 방송통신용 무궁화 위성과 달리 우주를 관측할 수 있는 장비가 실려 있다. 과학기술위성 1호는 한국 주도의 첫 우주관측용 위성이기도 한 셈이다.
14년째 위성센터를 지켜온 맏형 격인 이현우 박사는 영국 서리대학에서 위성공학을 전체적으로 배우면서 우리별 1호의 개발에 동참했다. 그는 “위성은 일단 우주공간에 올라가면 지상에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위성을 설계할 때 신뢰성이 높아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며 “특히 전자회로를 설계할 때 간단하지만 신뢰성 높게 만드는 방법은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KAIST에서 위성제어 분야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위성제어 기술은 영국에서 위성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스스로 터득해나갔다. 현재는 과학기술위성 1호의 제어를 담당하고 있는데, 위성제어의 노하우는 우리별 1·2호를 제어하면서 얻은 것이다.
과학기술위성 1호의 개발은 ‘우주개발 중장기 계획’의 일환으로 1998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박사는 “우리별 3호의 후속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과학적 임무를 띤 위성을 개발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밝혔다. 주임무를 담당할 장비인 ‘원자외선 분광기(FIMS)’와 ‘우주물리 시험장치(SPP)’는 1998년 12월 과학기술위성 1호의 탑재체로 최종 결정됐다. 1999년 5월 탑재체 개발에 한국천문연구원이 참여했다. 같은 해 7월 인공위성연구센터는 미국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학과 공동 연구 협약을 맺었다.
한국이 주도적으로 개발한 우주망원경인 ‘원자외선 분광기’는 NASA로부터도 주목을 받았다. 원자외선 분광기의 개발책임을 맡은 KAIST 물리학과 민경욱 교수는 “NASA로부터 12억원의 연구자금을 지원 받았다”고 밝혔다. 물론 원자외선 분광기 개발에 필요한 나머지 예산은 과학기술부와 천문연구원으로부터 각각 17억원씩 받았다.
교신 성공 후 기뻐하는 인공위성연구센터 임종태 소장(가운데)을 비롯한 직원들.
민경욱 교수와 에델슈타인 박사의 인연은 1992년 인공위성연구센터 초대 소장이었던 최순달 박사의 소개로 처음 시작됐다. 공교롭게도 동갑내기인 민교수와 에델슈타인 박사는 이때부터 우주관측 프로젝트를 함께 하자고 약속했다고 한다.
민경욱 교수는 1989년부터 인공위성연구센터의 소형 우주탑재체 개발에 참여했다. 민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우리별 3호까지 소형 플라스마 센서를 개발하면서 경험을 쌓아나갔다. 민교수의 제자였던 유광선 박사는 “우리별 1·2호를 개발한 주역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며 “과학기술위성 1호의 우주탑재체 개발에는 우리별에서 쌓은 기술과 경험이 뒷받침됐던 것”이라고 밝혔다.
NASA와의 협력이 걸림돌 되기도
우리 연구팀은 과학기술위성 1호를 개발하면서 여러 가지 난관을 만났지만 슬기롭게 헤쳐나갔다. 탑재체 개발에 참여했던 유박사는 “탑재체를 설계하고 공동 제작하며 최종 점검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미국 캘리포니아대를 방문해 작업했는데, 현지 사정을 잘 몰라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산 정상 부근에 있는 현지 연구소에는 셔틀버스가 저녁 8시까지 운행했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버스를 놓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깜깜한 밤중에 1시간이나 걸어서 산을 내려왔다고 한다. 어떤 날은 자정이 넘어서까지 일에 몰두했는데, 자정이 지나면 연구소의 모든 문을 잠그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안에 갇혀서 밤새 실험장비에 매달린 적도 있었다.
또 위성을 조립해 환경 시험을 할 때에는 위성의 상태를 24시간 계속 지켜봐야 했다. 모든 연구원이 2주 동안 2교대로 근무했는데, 새벽에 잠이 몰려올 때도 있었고 위성에 문제가 발생하면 새벽 4시에라도 담당자를 전화로 불러내기도 했다.
이현우 박사는 위성을 지상 시험할 때 겪었던 실수를 털어놓았다. 한번은 위성이 정상적으로 동작하지 않아 당황했는데, 원인을 알고 보니 연구원 중의 한 사람이 사소한 실수를 한 탓이었다. 전선의 전극을 잘못 연결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 것이다.
한편 원자외선 분광기의 경우 관련 기술에 대한 국내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완성품을 미국으로 직접 옮겨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또 원자외선을 검출하기 위해 사용되는 부품은 군사용이어서 전용(轉用)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미국 밖으로 수출이 금지돼 있었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하지만 다행히 NASA와의 협력과제라는 사실 덕분에 수출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밖에 위성의 발사체를 선택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다. 이때는 NASA와의 협력이 오히려 걸림돌이 됐다. NASA에서는 위성 기술의 유출을 염려해 인도나 중국의 발사체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우리별 3호는 인도의 PSLV라는 발사체로 저렴하게 발사할 수 있었는데, NASA 규정 때문에 과학기술위성 1호는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성공률이 높은 발사체를 찾던 연구팀은 러시아의 발사체를 채택했다. 물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우리 과학기술위성 1호는 성공적으로 궤도에 진입했고 지상국과의 교신에 성공함으로써 우주의 신비를 파헤칠 수 있는 ‘우리 눈’의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우주개발 주역에 걸맞지 않은 대우
과학기술위성 1호의 쾌거 뒤에는 연구원들의 피와 땀이 있었다. 특히 인공위성연구센터의 연구원들은 우리별과 과학기술위성을 통해 우리의 힘을 우주에까지 뻗어나가게 한 주역들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들은 ‘한국 우주개발의 주역’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모두가 계약직 연구원이다. 할 일이 없으면 나가야 하는 초라한 계약직인 것이다.
30여 명의 석·박사 연구원들은 별정직, 연구교수 등으로 하는 일에 따라서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1∼3년마다 재계약을 통해 위성 개발에 참여해왔다. 이들은 정부나 기업에 프로젝트를 제안해 다른 곳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했고 프로젝트를 딴 후에도 그 연구비로 일정기간 계약을 맺어왔다. 해야 할 프로젝트가 없다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인공위성연구센터의 고참인 연구교수 이현우 박사는 “만약 과학기술위성 1호와 교신에 실패했다면, 우리는 모두 짐 싸서 나가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올해 초 연구교수가 된 유광선 박사는 “연구원들이 짧게는 한 달에 한번씩 고용계약서를 써가면서 언제까지 꿈을 가지고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우리 사회에서 이공계 분야의 연구원들이 받는 대우를 실감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언제나 재계약을 걱정해야 하는 어려움 외에 비슷한 업무를 하는 다른 연구소에 비해 전체적으로 연봉이 낮다는 점도 연구원들을 괴롭힌다. 또 연속적인 연구를 하기 힘들다는 점도 문제다. 실제로 과학기술위성 1호의 실무책임자는 지금까지 5번이나 바뀌었다. 이들 중에는 미국 코넬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연구원으로 있다가 다시 국내 위성관련 벤처 업체로 자리를 옮긴 사람도 있다. 지난 5년 동안 20여 명이 떠났다고 한다.
유박사는 “많은 사람이 꿈을 접고 이곳을 떠났거나 떠나려는 생각을 한다는 점이 가장 견디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이 계속된다면 우주개발에 공헌할 수 있는 후진들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고, 결국 10여 년간 우주개발의 선구자 역할을 해오던 기관의 개척정신이 희미해지거나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하지만 이들은 과학기술위성 1호의 성공을 통해 다시 한번 도약하려 한다.
앞으로 과학기술위성 1호는 고도 690km 상공에서 하루에 14번 지구 주위를 돌면서 최소 2년 동안 우주 관측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우주 관측 임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KAIST가 한국천문연구원, 미국 캘리포니아대와 공동으로 개발한 우주망원경 ‘원자외선 분광기(FIMS)’의 임무다.
과학위성 2호 발사대는 국산으로
한국천문연구원 남욱원 박사는 “원자외선 분광기는 세계 최초로 원자외선 영역에서 전체 하늘을 보여주는 지도를 작성할 수 있다”며 “우리 은하의 생성과 진화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은하 내에 있는 고온의 성간가스를 관측하게 되는데 고온 성간가스가 은하에 전체적으로 어떻게 분포하는지,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밝혀낼 예정이다.
다른 하나는 KAIST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우주물리 시험장치(SPP)’의 임무다. 지구를 감싸고 있는 우주환경을 감시하는 첨병 역할을 하는 것으로 우주, 특히 태양에서 오는 플라스마 입자가 지구자기장과 어떻게 반응하고 우주환경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KAIST 민경욱 교수는 “앞으로는 많은 위성이 지구 둘레 우주공간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에 우주환경 예보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태양 폭발이 일어날 경우 언제 어떻게 지구 근처 우주환경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안다면 위성이 이에 대처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우리의 과학기술위성 프로젝트는 1호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후 6호까지 2, 3년에 한 대씩 우주공간에 쏘아 올릴 계획이다. 2005년 발사 예정인 과학위성 2호부터는 ‘남의 차를 빌려 타지’ 않아도 된다. ‘KSLV-Ⅰ’이라는 국산 발사체에 실려 전남 고흥군 외나로도에 건설중인 우리 우주센터에서 발사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별 1호에서 과학기술위성 1호까지 개발하면서 누적된 노하우는 한국이 세계 소형 위성 시장에 진출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과학기술위성 1호의 성공으로 한국이 소형 위성의 설계, 제작, 조립 에 독자기술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전세계에 알린 셈이다.
세계 소형 위성 시장은 예상보다 크다. 가볍지만 똑똑한 소형 위성은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위성 카메라를 예로 들어보자. 현재 600kg~1t급 위성에 해상도 3m의 카메라를 장착하지만, 앞으로는 200㎏급 위성에서도 동급의 카메라 성능을 구현할 수 있다.
인공위성연구센터 임종태 소장은 “실제 중국과 베트남이 한국의 소형 위성 기술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베트남은 재무부 사절단을 보내 위성 개발, 지상국, 인력 훈련 등에 관심을 표명했다고 한다. 임소장은 또 “KAIST 내에서는 상업적 목적의 연구를 하기 힘들다”며 “상업용 위성 개발은 (주)한국항공우주산업에 위탁하는 형식으로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