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교 이래 취업률 100% 신화를 이어가는 대학이 있다. 최신 공학이론과 산업체 현장지식으로 속이 꽉 찬 공학도를 길러내는 천안 한국기술교육대가 바로 그곳이다. 능력개발 분야의 아시아 지존(至尊)을 향해 도약하는 한기대의 독특한 교육비법을 알아보았다.
한기대를 다소 딱딱하게 소개하자면 ‘근로자직원훈련촉진법에 의한 직업능력개발훈련교사 및 직업능력담당자 양성교육을 실시하는’ 대학이다. 쉽게 말해 경찰대학이나 철도대학을 떠올리면 된다. 두 대학이 각각 유능한 경찰공무원과 철도공무원을 양성하는 대학인 것처럼, 한기대 또한 근로자들을 유능한 산업인력으로 양성하는 데 필요한, ‘근로자를 교육할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부가 설립한 대학이다.
한기대 졸업자 중 상당수는 한국산업인력공단, 대한상공회의소,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기능대학, 법무부, 지방자치단체 등 국가기관의 직업능력개발훈련교사, 또는 50개 직업전문학교, 기업 내 직업훈련기관 교사로 활약하고 있다. 한기대는 현장에서 일할, 또는 일하고 있는 근로자들을 교육시켜 그들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실전 교육자’를 양성하는 대학인 것이다.
근로자 교육인력 양성
한기대는 노동부가 한국산업인력공단에 기금을 출연하고,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재출연한 기금으로 설립됐다. 때문에 재정 운용 등 대학관리 전반에 대해 노동부의 통제를 받는다. 대학 재단은 학교법인 한국기술교육대학교이며, 이사장은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이 맡는다. 한기대는 노동부 예산에서 재정 지원을 받기 때문에 매년 국회의 감사도 받는다. 이러니 ‘국립 형태를 본뜬 사립대학’이라고 할까.
등록금도 국립대학 수준이다. 올해 2학기 한기대 공학부의 등록금은 170만원, 산업경영학부는 124만원 정도다. 국립대 공과대학 등록금 수준을 참고해 등록금을 책정한다니, 사립대 등록금으로선 전국 최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전교생 중 75%가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그 비용 또한 매달 20만원 정도로 매우 저렴하다.
“고등학생 때 한기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담임선생님께서 ‘이왕이면 이 학교에 진학하라’며 추천해주셨습니다. 등록금이 싸서 국립대학인 줄 알았어요. 게다가 취업률이 100%라니, 지금은 정말 만족합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 준비중인 위영철씨(메카트로닉스공학부 2년)의 소감이다. 천안에서 출발한 통학버스가 서울에 당도하기까지 1시간 내내 위씨는 학교 자랑을 이어갔다. “우리 대학은 학생들을 좀 ‘쪼는’ 것이 문제”라는 게 그의 불만 아닌 불만. 한기대는 공부를 많이 시키기로 유명하다.
보통 대학에서 학생들이 4년 동안 들어야 하는 수업은 대략 2700시간. 그러나 한기대의 의무 수업량은 4000시간에 육박한다. 주당 3시간짜리 수업을 한 학기 이수하면 보통 3학점을 주는데, 한기대는 3시간짜리 수업이 2학점, 4시간짜리 수업이 3학점이다. 또 거의 모든 수업은 강의와 실습이 동시에 진행된다. 다른 대학은 주당 3시간짜리 수업이라면 1∼2시간 정도는 실습을 한다. 박창순 교무처장은 이러한 체제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 대학 학생들은 졸업 후 현장 근로자들을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요즘 산업 현장에선 장비와 기술이 좀 빠르게 발달하는가. 그래서 우리 대학 교육은 철저하게 현장 중심, 실습 중심이다.”
정보기술공학부의 영상처리실습실. 학생 10여 명이 컴퓨터와 각종 영상장비 앞에 앉아 실습에 열중하고 있다. “언제 들어온 장비냐”고 물으니 “올해 들어온 장비와 프로그램”이란다. 특히 컴퓨터 관련 장비는 매해 교체하거나 업그레이드 해줘야 한다고.
한기대는 매년 정부로부터 10억원 규모의 노후장비 대체 예산을 받아 최신장비로 교체하고 있다. 실습실은 24시간 개방체제. 초기엔 값비싼 장비의 도난이 우려됐지만, 밤늦게까지 실습실에 불이 켜 있는 분위기가 정착되면서 이러한 걱정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교육 커리큘럼도 생산현장과 밀접하게 연계된다.
“공과대학들은 대개 서울대 공대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베낀다. 그렇다 보니 우리나라 공대는 모두 ‘서울대 복사판’이 된 지경이다. 때문에 정작 특성을 가진 공과대학은 얼마 없다. 그러나 우리 대학은 ‘새로운 유형을 창조한다’는 생각으로 타 대학에 없는 현장중심의 커리큘럼을 개발했다.”
한기대 설립 준비단계부터 몸담았던 정보기술공학부 오용택 교수의 회상이다. “이러한 커리큘럼을 만드느라 당시 교수들이 고생을 참 많이 했다”는 오교수는 “요즘엔 우리 대학에 커리큘럼을 문의하거나 배워가는 대학도 있다”고 전했다.
교수들의 노력도 만만치 않다. 어디 뿌리 없는 나무가 있겠는가. 한기대가 운영하는 ‘교수 현장학기 연구제’가 눈에 띈다. 이 제도는 교수들이 6개월 동안 산업현장에 나가 최근 동향을 익히고 경험을 쌓게 하는 제도이다. 이 기간 동안 교수들은 대학에 출근하지 않는다. 현장이 곧 연구실이 되는 것.
오교수 역시 지난해 경기도 용인에 있는 ‘KDT시스템’에서 현장학기 연구과정을 거쳤다. 공장 자동화와 관련한 핵심부품을 생산하는 이 회사에서 오 교수는 생산장비에 배전 고장이 났을 때 고장 지점을 진단하는 시스템을 개발·연구했다.
오교수는 “짧은 기간이지만 현실과 이론을 접목해 연구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며 “현장학기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면 좀더 자신감을 갖고 학생을 가르치게 된다”고 말했다. 현장학기 연구과정을 마친 교수는 연구결과를 교내에 발표한다. 이렇게 매년 12명의 교수가 현장학기 연구를 하고 있다.
“사실 현장학기를 운영하는 것은 재정 부담은 말할 것도 없고, 145명의 전임교수 중에서 10% 정도가 빠져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대학으로서는 부담이 크다. 하지만 ‘현장 위주’ 수업을 하려면 교수도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
이러한 교육의 성과로, 한기대 졸업생들은 간단한 오리엔테이션만 거치면 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준비된’ 인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기대 출신은 현장의 사정에 밝다. 이론으로만 무장한 신입사원은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 하는데, 한기대 졸업생들은 그럴 필요가 거의 없다.”
반도체 장비를 생산하는 ‘한국디엔에스’ 남진모 홍보과장의 말이다. 대우GM자동차의 자회사로 자동차부품을 생산하고 있는 ‘윤영’의 인사담당 양재호 대리는 “다른 대학 출신의 사기문제도 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칭찬하기는 힘들다”면서도 “한기대 출신들은 자신의 역할을 금방 파악하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평가했다. 어느 기업은 한기대 출신의 능력에 반해 “학교로 돌아가 당신 같은 후배 3명만 더 데리고 오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난해 대학을 졸업하고 현대자동차에 근무하고 있는 도상식씨 역시 걸어 다니는 ‘한기대 홍보맨’이다. 수시로 대학 홈페이지에 취업관련 혹은 현장의 기술정보를 올려놓는 도씨는 “이론과 더불어 실기 교육에 집중하는 모교의 교육방식에 감사한다”면서 덕분에 현장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학마다 취업정보실을 확대하고 교수들이 학생들의 취업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등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한 이때에 한기대는 무사태평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개교 이래 8년간 취업률이 100%에 달한다.
지금까지 한기대 졸업생은 총 1318명. 이중 65%인 855명이 기업체에 취업했고, 18%인 231명이 직업능력개발훈련교사로 진출했다. 대학원 진학 176명(13%), 군입대 45명(3%), 창업 11명(1%) 등이 그 뒤를 잇는다.
‘취업률 100%’란 사실을 세인은 잘 믿지 않는다. 그러나 한기대의 취업률은 허수가 없는 그야말로 알짜배기다. 졸업 후 군에 입대하더라도 기술장교로 입대하기 때문에, 취업인구에 포함시키더라도 어느 누가 시비걸 일 없다. 다음은 입학취업본부장을 맡고 있는 박준범 교수의 말.
“우리 대학의 취업률이 높은 이유는 무엇보다 학생들이 현장 코드에 맞게 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기대 졸업자를 채용한 기업은 다음해에 보통 2∼3명을 추가로 추천해달라고 요청한다. 특별한 제도랄 게 있다면 ‘평생지도교수제’ 정도다. 지도교수와의 상담을 통해 진로를 미리 결정하고 재학중에 이를 준비해나간다. 충실한 교육이 취업률을 높이는 비결이지, 다른 비결이 있겠는가.”
실업계 고교의 수재들 지원
1992년 개교한 한기대는 그해 8개 학과 240명의 신입생을 받았다. 당시 실업계 고교 학생에게 가산점을 부여해 경쟁률이 30대1을 넘었다. 지금도 실업계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전체 신입생의 20%를 수시 모집한다.
“실업계 고교 출신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 대학을 이끄는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지난해 실업계 고교생 154명을 모집했는데, 100여 개 고교에서 지원자가 몰렸다. 각 학교에서 전교 1∼2등을 다투는 수재들이 우리 대학에 입학한다.”
최일수 입학취업팀장의 말이다. 한기대 신입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5명씩 조를 짠다. 각 조는 실업계 고교 출신 1명, 인문계 고교 출신 4명으로 구성된다. 각 조의 리더 역할은 대체로 실업계 고교를 마친 학생이 맡는다. 현장 중심 교육이다 보니, 이들이 실습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른 학생들은 각자 수학, 영어, 물리, 화학 등 기초과목의 팀장을 맡는다.
한기대는 각 과목마다 1~2시간의 실험·실습 교육을 포함시킬 정도로 실사구시에 입각한 교육을 강조한다. 건축학과 학생들의 실습시간.
한기대는 토익 600점, 교육실습 4주, 일반 기업체 현장실습 4주와 함께 졸업작품을 제출해야 졸업자격을 준다. 4학년이 되면 1∼5인이 팀을 이뤄 10월까지 졸업작품을 제출해야 하는데, 학생들은 여기에 4년 동안 배운 이론과 기술을 집대성한다.
지난해에는 기계공학부 학생 5명과 디자인공학과 학생 1명이 함께 미니 포뮬러 카를 제작했고, 제어시스템 공학과 학생 2명이 밸러신머신 교육장비를 제작하는 등 총 164종의 졸업작품이 제출됐다. 매년 10월에 체육관에서 열리는 졸업작품 전시회에는 일선 기업직원들이 참신한 아이디어도 얻고 인력도 채용하기 위해 찾아오고 있다.
그러나 현장 위주 교육으로 쌓은 지식도 몇 년이 지나면 ‘과거의 것’이 되고 만다. 이에 대비해 한기대는 끊임없이 재교육을 실시한다. 그 사령탑 역할을 하는 곳이 대학 부설 ‘능력개발교육원’. 역시 노동부 전액 출자로 설립된 이 기관은 직업능력개발훈련교사가 자신의 능력을 유지하도록 보수교육을 제공한다. 교육내용은 자격연수과정, 직무연수과정, 기술연수과정, 외국인연수과정, 위탁연수과정 등. 1998년 개관한 이래 2만여 명이 이곳에서 새로운 기술과 교수법을 익혔다.
교육원 관계자들은 “이러한 정도의 시설 수준을 갖춘 교육원은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매년 30억∼40억원의 예산이 투여되어 어느 교육장보다 최신장비를 많이 갖추고 있다. 이 장비들은 학생들의 실습교육에도 활용된다”고 말한다.
능력개발교육원 김정근 원장의 집무실 벽면은 교육일정표와 행사계획표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능력개발교육원장을 맡은 것이 평생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는 김원장은 “능력개발교육원이 멈춘다면 그것은 한국의 산업이 멈추는 것과 같다”고 자부한다.
“사관학교는 장교 양성이 목표다. 훌륭한 교육으로 훌륭한 장교가 배출될 때 뛰어난 군대를 이룰 수 있듯, 산업현장에서 직업훈련을 담당하는 교사가 유능한 인력일 때 전체 산업이 발전한다. 능력개발교육원은 그런 몫을 해내고 있다.”
능력개발교육원은 늘어나는 교육 수요를 소화하기 위해 현재 ‘e-learning’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수업 내용을 인터넷에 올려 수강생들은 궁금하거나 실습에 필요한 부분만 교육원에 찾아와 배워가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이 일반화되면 수강인원을 현재보다 3배 가량 늘릴 수 있을 것으로 교육원은 기대한다. 한기대 학생은 졸업 후 3∼5년을 주기로 직무능력향상 교육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선 재교육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직원의 업무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으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한기대는 통일 이후 북한의 산업인력을 양성하는 과제를 미래 비전으로 삼고 조심스레 준비하고 있다. 한기대 출신으로 ‘넷나루’라는 해양지리정보시스템 개발업체를 창업한 김민호씨는 현대아산측과 이러한 사업을 협의중이다.
“통일 후 생산현장에서 작업할 기능공을 단시일 내에 양성하는 일이 가장 시급한 문제로 대두될 것입니다. 이에 앞서 이들을 훈련시킬 교육자를 양성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입니다. 율곡 선생이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듯, 통일 국가의 산업인력 양성을 책임질 직업능력개발훈련교사를 지금부터 대폭 확충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