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강남경희한방병원 이경섭 원장의 레인보우롤

한방명의가 조제한 무지갯빛 환상의 맛

  • 글: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사진: 김용해 기자 sun@donga.com

    입력2003-10-29 10: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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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퓨전시대다. 음식도 마찬가지. 국적은 중요치 않다. 맛있고 보기 좋으면 그만이다. 한국의 식해(食?)가 일본에서 스시(壽司)가 되더니,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롤로 탈바꿈했다.
    • 여기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것이 레인보우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고 했던가.
    강남경희한방병원 이경섭 원장의 레인보우롤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없는 삶이었어요.” 한의학, 그 중에서도 한방부인과 한 분야에서만 올해로 만 38년째. 이경섭(李京燮·55) 강남경희한방병원장이 한의학을 접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할아버지도 의사였고, 작은아버지도 의사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저를 특별히 귀여워하셨는데, 왕진 나설 때면 항상 왕진가방을 들고 따라다녔죠. 그래서 어려서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1966년 대학에 들어갈 때 지원한 의예과에 떨어져 한의학과에 입학하면서 제 삶의 길이 바뀐 거죠.”

    우여곡절 끝에 졸업을 앞둔 본과 4학년 때, 한방부인과 주임교수의 조교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그의 한의학 외길인생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철저한 실증주의를 추구하는 그의 학문적 성향도 이같은 외길인생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흔히 임상결과나 이론을 밖(언론)에 떠들어대는데, 그런 것은 논문으로 발표하면 되는 일이다. 괜히 말로만 할 게 아니다.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하고 학문적으로 정리해야 한다”는게 그가 밝힌 한의학자로서의 원칙이다.

    강남경희한방병원 이경섭 원장의 레인보우롤

    이원장과 함께 직접 요리를 해보는 레지던트 하지연(왼쪽)씨와 비서 유정민씨.

    의사 집안에 한의사의 접목. 어떻게 보면 이것도 ‘퓨전(fusion)’이다. 때문일까. 그의 학문적 연구도 양·한방을 넘나들었다. 이원장은 질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찾기 위해 양방을 과감히 도입했다. 그가 저술한 ‘도해임상부인과학’이 그 산물이다. 양방의 책에 나온 여성신체의 해부도를 기초로 한의학과 학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편저한 것으로, 그는 “학생들이 여성의 해부학적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이론으로만 배워 한계를 느꼈는데 그걸 해결해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항상 강의 첫 시간에 ‘한방 여자가 따로 있고, 양방 여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질병을 고치는 것은 양·한방 똑같다. 병증도 마찬가지다. 해석을 한방으로 하느냐, 양방으로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니 양·한방 모두 배워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칩니다.”

    이원장이 요즘 즐겨 먹는 요리도 퓨전이다. 1990년대 초 미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시절, 혼자 지내면서 때마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가 버거웠다. 그래서 이원장이 선택한 것이 김밥. 밥 위에 멸치, 시금치 등 남은 반찬을 올려놓고 김으로 돌돌 말면 간편하면서 맛도 있었다. 한 손에 들고 책을 보며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회에 참석했다 우연히 맛본 퓨전 일식요리 캘리포니아롤이 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김밥처럼 한입에 먹을 수 있는 데다 맛도 그만이었다. 요즘에는 여기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레인보우롤을 즐긴다. 이원장의 단골 퓨전 일식집은 서울 서초동 ‘아리마’.

    강남경희한방병원 이경섭 원장의 레인보우롤

    이경섭 원장이 환자를 진맥하고 있다.

    끝까지 잘하는 건 없지만 평소 새로운 것에 호기심 많은 이원장. 그가 이번에는 아리마 조리부장 우호식씨를 ‘사부’로 모시고 직접 레인보우롤 만들기에 나섰다.

    초밥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밥. 잘 씻어 10분 동안 물에 불린 쌀을 30분간 체에 받쳐 물기를 완전히 뺀다. 이 쌀을 솥에 담고 물을 부어 다시 30분간 불린 후 약간의 정종과 다시마 1장을 넣고 잘 익히면 ‘환상적인 밥’이 탄생한다. 여기에 식초와 설탕, 소금으로 만든 초밥소스를 넣고 골고루 비비면 새콤하면서도 향긋한 맛을 낸다. 소스의 비율은 밥 1kg에 초밥소스 200g이 알맞다.

    레인보우롤의 기본바탕은 누드김밥. 김 위에 적당량의 밥을 가지런히 편 후, 이를 뒤집어 준비된 장어, 계란구이, 오이채, 게살 등 속재료를 넣고 김발을 이용해 만다. 그 위에 참치 붉은살과 아보카도, 연어, 갑오징어를 얇게 썰어 순서대로 대각선 방향으로 올린다. 같은 순서대로 한 번 더 올리면 김밥 한 줄에 충분하고 색의 조화도 훌륭하다.

    다시 김발로 살짝 누른 후 6~7등분해 썬다. 그대로 먹어도 맛있지만 소스를 곁들이면 더 좋다. 마요네즈소스에 달걀과 채소 등을 넣어 만든 타르타르소스와 매운맛을 내는 칠리소스를 접시에 S자로 엇갈려 뿌린 후 레인보우롤을 담는다. 그 위에 연어알과 성게알을 올린 다음 래디시와 챠빌, 3색의 피망 등으로 데코레이션하면 무지갯빛 레인보우롤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강남경희한방병원 이경섭 원장의 레인보우롤

    이원장의 요리솜씨를 지켜보고 있는 직원들.

    시원한 회와 상큼한 밥, 갖은 속재료들의 맛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입안 여기저기에서 톡 터지며 사르르 녹는 연어알. 여기에 타르타르소스는 담백함을, 칠리소스는 매콤한 맛을 더해준다.

    위로는 아버지, 아래로는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원장은 주말이면 가끔 요리를 직접 하는데 이제 메뉴 한 가지가 추가됐다. 주특기인 김밥보다는 어렵지만 한번쯤 도전해볼 만하다고.

    이원장은 매우 솔직하고 겸손하다. 한의학에 대한 철학만 해도 그렇다.

    “한의학을 현대적으로 입증하는 게 우리의 책임이다. 요즘 한의학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보면 수백 년 전 책에 나오는 것들이다. 그걸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써야 한다. 또 한방에서 고치지 못하는 병도 많다. 환자들에게 양방이든 한방이든, 어떤 치료가 효과적인지 솔직히 이야기해야 한다. 제자들에게도 ‘어머니가 아프신데 고치지도 못하면서 붙잡고 있을 거냐’면서 솔직한 한의사가 되라고 가르치고 있다.”

    강남경희한방병원 이경섭 원장의 레인보우롤

    같은 병원 김용석 교수와, 비서, 레지던트들이 이원장이 만든 레인보우롤을 맛보기 전 “건~밥(!?)”

    이원장이 매일 밤 늦게까지 원고에 파묻혀 책을 내고 언론에 고정칼럼을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알고 있던 학문적 지식을 다시 한번 정리해볼 수 있는 계기도 되지만 무엇보다 잘못 알려진 한의학 상식을 일반인에게 제대로 전해주고 싶어서다. 그런 그인지라 책 보고, 연구하고, 원고 쓰는 것말고는 다른 취미도 없다. 그래서 별로 재미없는 삶이었으리라. 그렇다면 앞으로의 계획은 어떨까.

    “한방을 기초로 한 식품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요즘 풍조나 사조가 퓨전이잖습니까. 모 기업체의 요청으로 연구개발과 논문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뭔가 실생활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한방을 만들고, 논문을 발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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