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퓨전시대다. 음식도 마찬가지. 국적은 중요치 않다. 맛있고 보기 좋으면 그만이다. 한국의 식해(食?)가 일본에서 스시(壽司)가 되더니,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롤로 탈바꿈했다.
- 여기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것이 레인보우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고 했던가.
“할아버지도 의사였고, 작은아버지도 의사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저를 특별히 귀여워하셨는데, 왕진 나설 때면 항상 왕진가방을 들고 따라다녔죠. 그래서 어려서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1966년 대학에 들어갈 때 지원한 의예과에 떨어져 한의학과에 입학하면서 제 삶의 길이 바뀐 거죠.”
우여곡절 끝에 졸업을 앞둔 본과 4학년 때, 한방부인과 주임교수의 조교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그의 한의학 외길인생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철저한 실증주의를 추구하는 그의 학문적 성향도 이같은 외길인생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흔히 임상결과나 이론을 밖(언론)에 떠들어대는데, 그런 것은 논문으로 발표하면 되는 일이다. 괜히 말로만 할 게 아니다.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하고 학문적으로 정리해야 한다”는게 그가 밝힌 한의학자로서의 원칙이다.
이원장과 함께 직접 요리를 해보는 레지던트 하지연(왼쪽)씨와 비서 유정민씨.
“항상 강의 첫 시간에 ‘한방 여자가 따로 있고, 양방 여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질병을 고치는 것은 양·한방 똑같다. 병증도 마찬가지다. 해석을 한방으로 하느냐, 양방으로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니 양·한방 모두 배워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칩니다.”
이원장이 요즘 즐겨 먹는 요리도 퓨전이다. 1990년대 초 미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시절, 혼자 지내면서 때마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가 버거웠다. 그래서 이원장이 선택한 것이 김밥. 밥 위에 멸치, 시금치 등 남은 반찬을 올려놓고 김으로 돌돌 말면 간편하면서 맛도 있었다. 한 손에 들고 책을 보며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회에 참석했다 우연히 맛본 퓨전 일식요리 캘리포니아롤이 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김밥처럼 한입에 먹을 수 있는 데다 맛도 그만이었다. 요즘에는 여기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레인보우롤을 즐긴다. 이원장의 단골 퓨전 일식집은 서울 서초동 ‘아리마’.
이경섭 원장이 환자를 진맥하고 있다.
초밥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밥. 잘 씻어 10분 동안 물에 불린 쌀을 30분간 체에 받쳐 물기를 완전히 뺀다. 이 쌀을 솥에 담고 물을 부어 다시 30분간 불린 후 약간의 정종과 다시마 1장을 넣고 잘 익히면 ‘환상적인 밥’이 탄생한다. 여기에 식초와 설탕, 소금으로 만든 초밥소스를 넣고 골고루 비비면 새콤하면서도 향긋한 맛을 낸다. 소스의 비율은 밥 1kg에 초밥소스 200g이 알맞다.
레인보우롤의 기본바탕은 누드김밥. 김 위에 적당량의 밥을 가지런히 편 후, 이를 뒤집어 준비된 장어, 계란구이, 오이채, 게살 등 속재료를 넣고 김발을 이용해 만다. 그 위에 참치 붉은살과 아보카도, 연어, 갑오징어를 얇게 썰어 순서대로 대각선 방향으로 올린다. 같은 순서대로 한 번 더 올리면 김밥 한 줄에 충분하고 색의 조화도 훌륭하다.
다시 김발로 살짝 누른 후 6~7등분해 썬다. 그대로 먹어도 맛있지만 소스를 곁들이면 더 좋다. 마요네즈소스에 달걀과 채소 등을 넣어 만든 타르타르소스와 매운맛을 내는 칠리소스를 접시에 S자로 엇갈려 뿌린 후 레인보우롤을 담는다. 그 위에 연어알과 성게알을 올린 다음 래디시와 챠빌, 3색의 피망 등으로 데코레이션하면 무지갯빛 레인보우롤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이원장의 요리솜씨를 지켜보고 있는 직원들.
위로는 아버지, 아래로는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원장은 주말이면 가끔 요리를 직접 하는데 이제 메뉴 한 가지가 추가됐다. 주특기인 김밥보다는 어렵지만 한번쯤 도전해볼 만하다고.
이원장은 매우 솔직하고 겸손하다. 한의학에 대한 철학만 해도 그렇다.
“한의학을 현대적으로 입증하는 게 우리의 책임이다. 요즘 한의학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보면 수백 년 전 책에 나오는 것들이다. 그걸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써야 한다. 또 한방에서 고치지 못하는 병도 많다. 환자들에게 양방이든 한방이든, 어떤 치료가 효과적인지 솔직히 이야기해야 한다. 제자들에게도 ‘어머니가 아프신데 고치지도 못하면서 붙잡고 있을 거냐’면서 솔직한 한의사가 되라고 가르치고 있다.”
같은 병원 김용석 교수와, 비서, 레지던트들이 이원장이 만든 레인보우롤을 맛보기 전 “건~밥(!?)”
“한방을 기초로 한 식품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요즘 풍조나 사조가 퓨전이잖습니까. 모 기업체의 요청으로 연구개발과 논문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뭔가 실생활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한방을 만들고, 논문을 발표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