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르익은 가을이다. 도시 사람들이 두툼한 스웨터를 하나 둘 꺼내 입는 요즘, 지난 계절의 들뜬 열기를 벗어버린 가을 바다는 좀더 차분해지고 좀더 성숙해진다.
-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제철 대하를 가득 잡아올린 어부의 투박한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사이, 바다를 붉게 물들이던 태양은 수줍은 듯 얼굴을 가린다.
안면도 꽃지 해수욕장 할미·할아비 바위 사이로 해가 지는 모습. 전국 3대 낙조 중 하나로 꼽힌다.
77번 국도를 따라 안면대교를 건넌 후 서쪽 해변가로 접어들면 횟집과 포장마차가 즐비하게 늘어선 백사장 항구가 나온다. 9월 말부터 자연산 대하가 앞바다에서 잡히는데, 이 무렵이면 쫄깃쫄깃하고 고소한 맛의 대하를 찾아 전국의 미식가들이 안면도로 몰려든다. 축제는 10월 초에야 시작되지만, 9월 하순이면 갓 잡은 대하를 그물에서 떼어내는 어부들과 경매장에서 낙찰가를 외치는 상인들, 그리고 소주 한잔 곁들이며 소금 뿌린 번철에 대하를 탁탁 구워내는 손님들이 백사장 항구를 들썩이게 한다.
“소금을 얹어놓고 대하를 구우니까 타지도 않고 간이 잘 배어 맛도 좋지요. 비싸고 품이 많이 들어서 그렇지, 대하 샤브샤브도 일품 요리입니다.”
15년간 고깃배 선장을 했다는 삼호횟집(041-673-5592) 박삼용 사장의 말이다. 소금을 가득 얹은 번철에 10∼15cm 길이의 큼지막한 대하를 가득 올리면서 그는 “대하 머리통을 그냥 버리는 손님들이 많은데, 머리통이 가장 고소한 부분”이라고 귀띔한다. 대하구이와 곁들이는 푸짐한 꽃게찜은 뱃속을 얼큰하게 채워준다.
대하와 꽃게가 미각을 만족시키는 안면도의 맛이라면, 여행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꽃지 해수욕장의 낙조다. 슬픈 전설을 지닌 채 안타까이 마주보고 서 있는 할미·할아비 바위 사이로 해가 떨어지는 장관은, 낙조 방향과 날씨가 맞아떨어져야만 볼 수 있는 귀한 기회다. 낙조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지점에 옹기종기 모여 카메라 셔터를 만지작거리던 여행객들은 해가 떨어지는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다 둥그런 해의 밑동이 해안선에 닿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 하고 감탄사를 내지른다.
천수만 간척지 부남호에서 떼지어 놀고 있는 철새들.
안면도 곳곳, 특히 안면도 자연휴양림(041-674-5018∼9)과 그 주변에서는 ‘안면송’이라는 붉은소나무의 정취를 즐길 수 있다. 습기가 적당한 해양성 기후와 돌이 적은 토질 덕분에 옹이 없이 곧게 뻗은 안면송은 조선시대부터 자라기 시작해 경복궁을 짓는 데도 사용됐다고 한다. 차를 세우고 천천히 숲길을 거닐어보자. 그리 높지 않은 언덕에만 올라도 빽빽한 송림 덕분인지 공기가 훨씬 맑은 듯하다. 나무로 지어진 휴양림 숙박시설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것도 운치있다.
안면도를 둘러본 뒤 여유가 있다면 천수만을 건너 충남 홍성군을 둘러볼 만하다. 안면도에서 홍성으로 건너가려면 천수만을 가로막은 방조제를 따라 난 96번 지방도로를 타야 하는데, 왼쪽으로는 간척지가, 오른쪽으로는 천수만이 드넓게 펼쳐진다. 간척지 안에 있는 호수 부남호와 해변가에선 가을 정취를 한껏 뽐내는 억새풀과 가을 철새떼를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홍성군은 안면도처럼 전국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다. 그러나 구한말 두 애국선열의 고향으로 지역민의 자부심이 남다른 고장이다. 청산리대첩의 김좌진 장군과 만해 한용운 선생이 홍성 땅에서 나고 자란 것. 각각 갈산면과 결성면에 위치한 김좌진 생가와 한용운 생가는 성역화 작업으로 주변 경관과 도로가 말끔히 다듬어졌다. 차로 10여 분 거리에 떨어져 있어 함께 찾아볼 수 있다. 김좌진 생가가 시골 양반 가옥의 품위를 보여준다면 초가집인 한용운 선생의 생가는 그 시절 민초들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① 홍성군 북쪽에 자리한 용봉산의 기암괴석. 해발 374m인데다 가파르지 않아 아이들과 함께 등산하기 좋다.
②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 싸리나무로 울타리를 두른 초가집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③ 5일장으로 열리는 홍성 우시장.
홍성은 예부터 한우고기로 유명했다. 지금도 군내 두 곳에서 닷새마다 우시장이 선다. 읍내에서 조금 비켜선 강변 우시장에는 새벽 4시부터 소를 팔러 온 충남 지역 축산업자들과 전국에서 소를 사러 온 상인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새벽 5시부터 경매가 시작됐다. 육질 좋은 놈을 찾아나선 상인들이 눈을 번득이면 소들은 제 운명을 알아차린 듯 낑낑거린다. 서울 신림동에서 왔다는 한 정육점 주인은 “홍성 한우는 고기맛도 좋고 값도 싸서 자주 이곳을 찾게 된다”며 두 마리를 사서 떠났다. 동이 트며 세상이 잠을 깨기 시작하자 300여 마리의 한우는 모두 새 주인과 길을 떠나고 우시장은 썰물 빠지듯 한산해졌다.
읍내 근처의 ‘한우1번지’(041-634-6744)는 홍성군을 찾은 외지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한우 생고기 전문식당이다. 30여 년 도축업을 해와 소 냄새만 맡아도 육질을 알 수 있다는 길용섭 사장은 살치살, 치마살, 안심추리, 육회, 꽃등심 등 싱싱한 선홍빛 한우고기를 줄줄이 내왔다. 그는 “한우 앞다릿살인 낙엽살이 가장 고소한 맛을 내고, 육회는 생선회보다 더욱 쫄깃하다”고 권하면서 “특수 부위의 생고기는 숯불이 아니라 돌판에 구워 먹어야 제 맛을 잃지 않는다”고 했다.
가을에 찾는 안면도와 홍성은 해안 마을의 차분한 정취를 마음 가득 담아올 수 있게 한다. 주말 여행을 계획했다면 잠자리는 안면도에 마련하는 게 좋다. 유명 관광지와 안면읍 주변에 가족 단위로 이용하기 좋은 깔끔한 펜션형 민박이 많이 들어서 있기 때문인데, 안면도닷컴(www.anmyondo. com) 사이트에 들어가면 알찬 숙박정보를 얻을 수 있다.
① 대하축제가 끝난 홍성 남쪽의 남당항은 안면도 백사장 항구보다 한적한 모습이다. 썰물로 드러난 갯벌에서 조개를 캐는 주민들.
② 육질 좋기로 유명한 홍성의 한우 생고기.
③ 10월은 안면도 앞바다에서 자연산 대하가 가장 많이 잡히는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