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눈을 잃은 남편을 찾아 배에 몸을 실은 도미부인. 조선 삼강행실도.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면 춘향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춘향은 소설의 주인공일 뿐 실존 인물은 아니다. 한국인이 소설의 주인공에 불과한 춘향을 추앙하면서도 그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았던 실존 인물 도미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도미설화는 진흙 속에 묻혀 있는 진주와 같다.
도미전(都彌傳)은 고려 김부식이 집필한 ‘삼국사기 열전’에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모 대학 교수가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서 도미전설을 수집하여 서울의 모 유력 일간지에 그 내용을 발표한 바 있다. 이 교수는 여기서 열전의 주인공 도미와 도미의 부인이 살았던 곳이 충남 보령이었다고 주장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 황당한 주장을 철석같이 믿고 보령시는 열녀비각을 짓고 그 안에다 열녀 도미처(都彌妻)의 영정을 모셨다. 물론 열녀 정신을 선양하기 위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송덕비를 세우고 전각을 짓는 것을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도미설화의 발생지가 충남 보령이라는 잘못된 주장에 근거해 보령시가 기념물을 만든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최초의 기록인 ‘삼국사기 열녀전’의 내용으로 보아 도미 부부가 살던 곳은 한홀(漢城, 현 경기도 광주) 지역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뮤지컬 ‘도미전’이 제작중이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동안 잘못 알려진 도미전의 내용이 뮤지컬에선 어느 정도 바로잡아지기를 기대해본다. 무엇보다 ‘도미전’은 허구가 아닌 백제 시대에 실제로 있었던 실화(實話)란 점이 부각되어야 한다. 그리고 원전에 적혀 있는 대로 역사적 사실과 배경이 전달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가 현대에서 거듭 태어나기를 기대해본다.
1500년 전 실존인물의 러브스토리
조선 세종은 ‘삼국사기’의 도미전을 ‘삼강행실도’(1432년)에 수록하여 열녀의 표상으로 삼았다. 이 이야기는 ‘동사열전’을 비롯, ‘동국통감’ ‘오륜행실’ ‘신속동국행실’ 등에도 한결같이 수록되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한국인은 도미전을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열녀전으로 꼽아온 셈이다. 먼저 ‘삼국사기 도미전’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자.
도미는 백제 사람이었다. 비록 벽촌 소민(編戶小民)이지만 자못 의리를 알며 그 아내는 아름답고도 절행(節行)이 있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백제 개루왕(蓋婁王)은 이 소문을 듣고 도미를 불러 “무릇 부인의 덕은 정결(貞潔)이 제일이라 하지만, 만일 어둡고 은밀한 곳에서 좋은 말로 교묘히 꾀면 넘어가지 않을 여인이 거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도미가 대답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신의 아내는 죽더라도 마음을 고쳐먹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개루왕의 복수
그러자 왕은 도미의 부인을 시험해 보기로 한다. 왕은 도미를 궁궐 안에 머물러 있게 하고 신하에게 왕의 옷을 입힌 뒤 말과 몸종을 딸려 밤에 도미의 집에 가게 했다. 그에 앞서 왕은 사람을 보내 도미의 아내에게 왕이 온다고 기별했다.
가짜 왕은 도미의 집에 도착하여 도미 부인에게 “내가 오래 전부터 너의 아름다움을 듣고 네 남편과 내기 장기를 두어 내가 이겼다. 내일은 너를 왕궁으로 데려가 궁인으로 삼을 것이니 이제 너의 몸은 나의 소유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짜 왕은 도미의 부인에게 가까이 다가서려 했다.
그러자 부인이 말하기를 “국왕께오서 망령된 말씀을 하실 리가 없사온데 어찌 제가 감히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청하옵건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소서. 곧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 모시겠나이다”라고 말한 뒤 물러나와 미모의 몸종을 곱게 단장시켜 대신 들어가 수청을 들게 하였다.
후에 왕이 속은 사실을 알고 격노하여 남편 도미에게 속인 죄를 물어 두 눈을 뽑은 뒤 조각배에 실어 강물에 띄워버렸다. 그리고 그 부인을 다시 강제로 범하려 하자 부인은 “지금 저는 남편을 잃은 몸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대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하오나 지금은 월경으로 몸이 더럽사오니 다른 날에 목욕 재계하고 오겠나이다”라고 말해 왕이 믿고 허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