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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색깔있는 문화이야기(20)

거리의 철학자 칸트의 웃음

21세기에도 계몽은 진행중

  • 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거리의 철학자 칸트의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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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철학자들은 삶과 역사의 현장인 길거리로 나와야 한다. 그래서 어둡고 답답하며 어지러운 세상을 밝혀야 한다. 무엇보다 거리의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쉽게 말해야 한다.
  • 칸트를 아이들이 알아듣도록 말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엉터리 철학자다.
거리의 철학자 칸트의 웃음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꽃과 더러운 부정의 더미에 대해 아무런 비판 없이 침묵하는 시대에, 공공성의 확보나 자유로운 이성의 판단은 불가능하다. 나 자신 최근 그런 경험을 하며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겨우 마음을 추슬러 새삼스레 손에 쥔 것이 칸트였다. 물론 칸트라고 해서 고통 속에 있는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철학은 진통제도 마취제도 아니니까. 진정한 철학은 되레 우리에게 이성의 용기를 가지라고 권할 뿐이다. 그래서 칸트를 다시 읽는다. 다시금 이성의 용기를 갖고자.

칸트(1724~1804)라고 하면 당장 난해하고도 엄격한 이성철학이 떠오르고, 고리타분한 철학자의 전형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그의 주저(主著)라고 하는 3대 비판서(책 이름은 몰라도 좋다)를 즐겨 읽는 사람은 아마 철학 전공자가 아닌 이상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칸트는 팔십 평생 쾨니스버그(지금은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에서 단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독신으로 살면서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을 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자의 독특한 기행(奇行)이 아니다. 칸트는 언제나 산책을 하며 세상살이의 지혜를 찾는 것이 철학이라 했지 대학에서 연구하는 철학을 참된 철학이라고 보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대학에 시체처럼 안치된 그를 길거리로 불러내 일상의 언어로 대화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칸트 하면 당장 튀어나오게 마련인 ‘물자체(物自體)’니 뭐니 하는 철학자끼리만 통하는 암호 같은 말들은 일절 사용하지 않도록 하자. 칸트 자신 ‘모든 철학서는 통속화돼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또한 철학이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음미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오직 이성을 공공적으로 사용하는 용기를 가지라고 소리 높여 외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철학의 할아버지 소크라테스와 함께 칸트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자. 이들은 모두 비판적 사고를 통해 편견이나 음미되지 않은 의견 또는 신념을 수정하고, 이를 통해 공공적인 공간을 열려고 했다.

자유롭고 공개된 음미



학파를 형성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대화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반(反)권위주의적이었다는 점도 이들의 공통점이 다. 두 사람은 또한 비판적 사고에 의해 자신을 ‘자유롭고 공개된 음미라고 하는 시험’에 들게 하는 시도를 한 사상가로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가장 중요한 인권으로, 다원주의야말로 가장 중요한 원리라고 보았다. 지금 우리에게 그들의 이야기만큼 절실한 것이 또 있는가. 소크라테스와 칸트로 돌아가라. 철학은 그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칸트의 고향 쾨니스버그는 그가 살았을 때부터 ‘학문의 시베리아’로 불릴 만큼 후미진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평생을 보낸 칸트의 삶은 너무나 단순하다. 1724년 가난한 수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춥디추운 고향에서 어렵게 공부하고 가정교사로 겨우 연명하다 고향 시골대학의 철학교수로 부임해 41년 간 재직하고 그곳에 묻혔다.

칸트는 다른 나라는커녕 독일의 다른 대도시에 유학한 적도 없다. 심지어 논문 발표를 위해 출장 한 번 간 적 없다. 아마 평생 초라한 집과 학교 외에는 다닌 곳이 없으리라. 그래서 도대체 전기를 쓰려 해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하나도 없다. 기껏 점심식사에 항상 손님들을 초청해 자신이 직접 만든 겨자 소스를 먹였으나 자신은 한 번도 먹지 않았다는 이상한 에피소드가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독신이었으니 그 흔한 사랑 이야기도 없다.

쾨니스버그는 당시 러시아와 마주보는 독일 북쪽 끝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런던, 파리, 베를린 등 당대 국제도시와 비교하면 세계화나 근대화로부터 뒤떨어진 변방이었다. 그런 만큼 칸트는 자신이 산 전근대적인 봉건과 싸우기 위해 계몽과 이성을 추구했다. 그렇다고 오늘날 흔히 오해되듯이 역사를 넘어 인류에게 공통되는 추상적인 보편 이성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풍부한 감정의 이성’에 입각한 다원주의를 주장했다.

흔히 칸트를 독일 관념론의 아버지라 하여 피히테(1762~1814)나 헤겔(1770~1831)과 같이 분류하지만 칸트는 그들의 국가주의 철학과 분명 다르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라고 해야 한다. 쾨니스버그는 칸트가 34세였던 1758년부터 4년간 러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다시 독일에 의해 탈환되었다.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그는 당연히 평화를 갈구했고, 세계시민주의와 반식민지주의 및 국제연합의 이념을 제기했다. 오랜 식민지와 분단을 경험한 우리에게 칸트가 의미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어디 우리뿐인가. 20세기를 ‘야만의 시대’로 규정하는 모든 인류가 필요로 하는 이념이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도대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역사 뒤에 숨어 어려운 말만 늘어놓는다. 이제 철학자들은 삶과 역사의 현장인 길거리로 나와야 한다. 그래서 어둡고 답답하며 어지러운 세상을 밝혀야 한다. 무엇보다 길거리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말해야 한다. 칸트를 아이들이 알도록 말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엉터리 철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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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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