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인색하면 잃고 베풀면 얻는다’ 귓가에 맴도는 개성상인 정신|김우종

  • 글: 김우종 전 덕성여대 교수·문학평론가

    입력2004-01-30 09: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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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는 ‘개성상인’들이 오직 신용으로 장사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신용은 내가 얻기 전에 주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외상 거래는 믿음과 믿음의 관계다. 먼저 믿음을 주면 그 다음에 믿음을 얻게 된다. 그것이 개성상인의 성공의 기본이다.
    ‘인색하면 잃고 베풀면 얻는다’  귓가에 맴도는 개성상인 정신|김우종

    신용을 기반으로 거래하는 개성상인의 정신을 보여준 나의 아버지 김재환.

    개성의 설성(雪城) 김씨 가문은 고려 때부터 그 고장을 떠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만은 달랐다. 아버지는 어느날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홀연히 떠나서 파란만장한 운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때 얘기를 훗날 6·25전쟁중에 내게 들려주셨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때였다. 나는 황해도 연안읍에서 아버지와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 돈암동 집으로 올라왔다. 이날 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결혼 초에 겪었던 아주 긴 얘기를 하시더니 마지막으로 내게 잊지 못할 인생의 교훈을 남겨주셨다.

    “우종아, 네게 꼭 일러두고 싶은 말이 있다. 너는 대학생이니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 거다. 얼마나 힘들게 살아온 나라인지. 그런데 말이다. 만일 억울한 운명의 길을 강요받게 되면 너는 어찌하겠니? 그냥 받아들지는 않겠지? 그렇다. 부당한 운명에 대해서는 절대로 그냥 따르지 말아라. 팔자타령만 하며 남이 주는 대로 독약 같은 운명까지도 받아먹고 사는 것은 바보다. 운명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어리석은 노예나 소나 말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운명은 네가 변화시키고 선택해라. 힘들더라도 용기를 내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동안 고향에서 일어났던 일을 들려주셨다.

    운명을 선택하고 개척하라



    “고향에서는 좌익한테 붙들려서 죽은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함께 붙들려 갔다가도 거기서 도망쳐나와 살아난 사람도 있어. 그 사람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변화시키고 결정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남이 주는 죽음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쉽고 어려움의 문제만은 아니다. 생각의 차이가 운명을 그렇게 만들 수 있다. 꼭 같은 조건에서도 왜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사는 것인지 알겠지? 그리고 이것은 생사의 문제만이 아니다. 살아가는 모든 것이 그렇다. 아주 작은 행복의 문제까지도.”

    물론 아버지가 당시 내게 해주신 말씀을 정확하게 옮긴 것은 아니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기 때문에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그대로 옮길 수는 없다. 비록 표현의 차이는 있더라도 하지만 나는 그날 밤 아버지가 해 주신 말씀을 너무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 말씀이 그동안 내가 막연히 갖고 있거나 몰래 숨겨두고 있던 생각에 확신을 주고 큰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별로 말씀이 없으셨지만 나를 타이르실 때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논리적이었다. 그래서 회초리를 들지 않으셔도 나는 아버지께 반항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달랐다. 일제는 연백평야의 커다란 ‘남다지’(南大池를 그렇게 불렀다)를 매립해서 논을 만들었는데 그곳에는 물고기가 많은 수로가 여기저기 있었다. 나는 자주 여기서 고기를 잡았고, 그러다 보면 해가 저물어야 집에 돌아올 때가 많았는데 그러면 어머니는 꼭 회초리를 드셨다.

    “요놈아, 내가 몇 번이나 일렀냐? 죽고 싶어서 내 말 안 듣는 거냐? 물귀신이 되고 싶냐?”

    내가 너무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어머니는 늘 이렇게 회초리로 다스리려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조용한 말투만으로도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으셨다. 소년 시절에는 아버지가 쓴 소설을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며 읽었다고도 하는데, 아무래도 아버지는 소설보다는 이론적으로 따지고 굴복시키는 재능을 갖고 계셨던 모양이다. 나 역시 아버지로부터 이러한 재능을 물려받아 문학평론가가 된 것같다.

    중공군 포로에서 탈출하다

    그날 밤 돈암동 집에서 아버지가 내게 남겨주신 말씀은 그 이듬해 내 인생 최대의 위기에서 나의 운명을 바꿔주고 목숨까지 구해주었다.

    그해 겨울 입대했던 나는 다음해 5월 강원도 인제 양구지구 중공군 춘계(春季)공세 때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약 5000명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다수가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포로가 된 나는 다음해 여름 전방 고지에서 비가 내리는 캄캄한 밤을 틈타 깎아지른 벼랑을 타고 뛰어내려 소양강 지류로 몸을 던져 남으로 탈출했다.

    받아들여서는 안 될 부당한 운명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내 운명을 바꾼 것이다. 만약 아버지의 말씀이 내게 확신과 용기를 주지 않았다면 나는 남들이 거의 모두 그랬듯이 북한에 그대로 남아서 김일성이 강요한 운명대로 잠시 머물다가 비참하게 죽었을 것이다.

    돈암교 냇가에 있던 그 조그만 집에서 9·28 수복 때 아버지로부터 그런 말씀을 듣기 전날 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가서 복학할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다. 물론 어서 고향을 떠나고 싶었던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숨어 있다가 나와보니 이제는 우리 편(우익)에서 또 설쳐대는 통에 세상은 전보다 더 미쳐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공산 진영에 의한 학살 피해자가 수도 없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이쪽에서 똑같은 잔인한 보복과 학살을 시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망간 부역자의 집에 살아남은 가족들은 어디론가 끌려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빨갱이들에게 잡혀가서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것 같은 세상이었다. 그동안 남하했다가 돌아온 국교(초등학교) 동창생 한 녀석은 옷 속에서 긴 회칼을 뽑아들고 무용담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 무용담이란 자기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의 경험이었다. 그러더니 주사기를 꺼내서 제 손으로 엉덩이에 찔렀다. 페니실린 주사였다. 그는 주사를 찌르면서 여자와 달콤한 키스를 하고 엉덩이를 흔들며 성관계를 갖는 흉내까지 냈다. 그가 그렇게 성병에 걸린 것은 매춘부와의 관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도망친 부역자의 집 여인을 학살하기 직전에 반드시 그런 ‘행사’를 치렀다는 것이다.

    세상이 완전히 미쳐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서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서울로 출발하기 전날 저녁에 아버지는 밖에서 돌아오시면서 내게 편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우종아, 혹시 모르는 일이니 이걸 가지고 가거라.”

    아버지가 내주신 것은 황해도 연안경찰서장이 발행한 신원증명서였다. ‘사상이 온건하고’로 시작되는 그 증명서는 적(敵) 치하에서 절대로 아무런 부역행위도 저지르지 않았음을 확실하게 증명한다는 문서였다.

    아버지는 상점 일에만 바쁘신 것처럼 보였지만 우리들에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시는 편이었다. 특히 좌우대립의 와중에서 그렇게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을 때에는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보호 본능이 발휘되었던 것 같다. 그때 만들어주신 신원증명서도 그런 마음에 준비하신 것이었을 것이다. 그 신원증명서는 서울로 올라가 복학 수속에 써먹기 전에 이미 서울역에서부터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신원증명서의 위력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개찰구에서는 경찰로 보이는 사람들이 젊은이들을 닥치는 대로 심문하고 더러는 다른 데로 끌고도 갔다. 이때 나도 그들에게 걸려서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주신 신원증명서를 내밀자 군말없이 놓아주었다. 그 증명서가 없었더라면 어디로 끌려가 무슨 험한 일을 당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동숭동의 학교에 가보니 교문에는 미8군 마크가 붙어 있고 미군 헌병이 서 있었다. 그리고 교문에서부터 지금의 샘터사와 예총 건물이 있는 냇가를 따라서 학교 전체를 빙 둘러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복학 수속을 위한 심사를 받기 위해 학교 뒤 관사에 마련된 심사장을 찾아 갔더니 ‘공산 치하에서 뭘 했느냐’는 것부터 물었다. 고향에 내려가서 숨어 지냈다고 했더니 이내 그걸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고향에서 뭘 했는지 알고 싶다면 그들이 내 고향에 가서 조사할 일이지 내가 어떻게 그걸 증명한단 말인가?

    할 수 없이 나는 아버지가 주신 연안경찰서장의 신원증명서를 내밀었다. 그러자 더이상 아무것도 물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종이 한 장이 두 번째로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며칠 후 심사 결과를 보러 갔는데, 그곳에는 훗날 유명한 소설가가 된 박완서씨가 있었다. 입학 직후에 잠시 연구실이나 강의실에서 본 적이 있는 우리 국문과 신입생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심사에 통과했지만 그녀는 불합격 판정을 받아 고개를 떨구고 저쪽으로 힘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끔찍한 세상에서 어렵게 살아남아서 만나게 된 유일한 동창생인 데도 나는 부끄러워 말을 걸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후 꼭 20년이 지난 1970년에 나는 박완서씨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裸木)’을 응모해서 화려하게 등단했는데 그때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나는 박씨의 작품을 최고작으로 뽑겠다고 주장했고 다른 두 분의 심사위원은 다른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겠다고 주장한 끝에 ‘나목’이 2대1의 표차로 탈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심사 결과 재검토를 주장했고 결국 당선작을 뒤집어놓고 말았다. 2대1로 낙방한 심사결과를 뒤집어놓은 일은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여자가 그때의 박완서인 줄은 전혀 몰랐었다. 20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 여자는 그냥 살림집 아줌마의 모습이었으니까.

    아버지가 마련해주신 시골 경찰서장의 신원증명서는 이렇게 서울역에서도 잘 써먹었고 복학 심사에서도 효력을 발휘했지만 실제 복학은 불가능했다. 학교 안으로는 들어가볼 수도 없었다. 그후 고향에 가 있던 나는 중공군의 남하 소식이 알려진 날 밤 허둥지둥 짐을 꾸려 형수님과 조카들을 데리고 고향을 탈출했다. 아버지의 지시였다.

    그런데 곧 뒤따라 오시겠다던 아버지는 미 공군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온통 불구덩이가 된 속에서 빠져나온 뒤 다음날 어머니와 함께 바닷가로 나가셨지만 배를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다가 우연히 아버지를 알아본 해군 장교가 태워준 군함을 타고 겨우 남하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목숨만 겨우 건진 것이다. 당당하게 운명 결정론을 말씀해주시던 아버지는 너무도 지쳐 있었다. 거대한 운명 앞에서 기진맥진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버지가 다시 일어나 시리라고 믿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믿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아버지의 상인 기질 때문이었다. 운명 결정론을 말씀해주시던 날 밤, 아버지는 내게 귀중한 말씀 한두 가지를 더 들려주셨다. 바로 개성상인과 관련한 이야기였다. 그 말씀을 해 주시려면 아버지가 왜 개성을 떠나서 상인이 되었는지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부분만큼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거기에는 자식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훗날 형님이 들려준 바에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향인 개성에서 만나 깊이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집안 어른들 사이에 결혼이 허락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여러 해 연상이었던 것이 이유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우리한테 나이를 알려주지 않으셨다.

    어쨌든 결혼 승낙이 떨어지지 않자 두 분은 빈손으로 고향인 개성을 떠났다. 형님 말에 의하면 그때 아버지는 ‘영원히 변치 않고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며 혈서를 쓰셨다고 한다. 그후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가는 곳이면 어디라도 따라가기로 하고 집을 뛰쳐나왔다는 것이다.

    사랑의 맹세를 위해 혈서를 쓰신 것이 너무 구식인지 신식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결혼은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고 믿고 부모의 반대를 단호하게 거부하며 고향을 떠나신 것은 내게는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전쟁중에 아버지가 말씀해주신 주체적 운명 결정론은 이미 이 무렵부터 아버지가 지녀왔던 신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라도 군산항으로 가서 형님을 낳았는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처음부터 빈손으로 탈출했으니 그러실 만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곧 함경북도 성진으로 옮겨 거기서 작은형과 나를 낳으셨다. 아버지가 내게 해주신 긴 얘기는 이 부분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개성상인 한 분을 찾아가서 인사를 올리고 부탁을 드렸다. 개성의 누구네 집 몇째아들이라고 밝히고 무슨 장사를 어떻게 해서 은혜를 갚을 것이니 도와달라고.”

    재봉틀 돌리고 또 돌리고

    난생 처음 본 빈털터리 젊은이의 부탁인 데도 당시에는 그것이 통했다고 한다. 재봉틀이 생겼고 옷감도 외상으로 얼마든지 쓸 수 있게 되어 아버지는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개는 부두 노동자들의 옷이었다.

    부두 노동자들은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그대로 맞고 일을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우선 우비를 만들었다. 지(紙)우산을 보고 착안한 것인데 무슨 기름을 몇 겹씩 발라가며 빗물이 스며들지 않는 비옷을 창안한 것이었다고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낮이나 밤이나 쉬지 않고 일에 매달렸다. 두 분이 다 재봉사가 되었는데 어머니는 졸음이 쏟아질 때마다 눈을 하도 비벼서 눈이 게진게진 짓물렀다고 하신다.

    그렇게 만든 옷은 모두 외상으로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내주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외상 거래를 하는 것은 개성상인식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외상으로 재봉틀을 사주고 옷감도 외상으로 마음대로 쓰도록 한 그 사람도 전형적인 개성상인 방식으로 아버지를 대한 것이다. 담보는 오직 마음과 마음의 신뢰뿐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옷 장사는 일일이 주문에 댈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개성상인식 외상거래

    나를 낳고 찍은 기념사진을 보면 그때 부모님이 얼마나 빠르게 성공했는지 알 수가 있다. ‘김재환 상점’이라는 간판이 붙은 제법 큰 상점 안에서 아버지가 한 살짜리 나를 안고 큰형을 옆에 세우고 찍은 사진이다. 그것은 함북 성진에 빈손으로 도착한 지 3년 만에 이룬 성공의 증명사진인 셈인데 아쉽게도 휴전 직후 분실했다.

    사랑 때문에 시작된 타향살이건만 그렇게 떠돌기에 바빴으니 거기에 무슨 달콤한 로맨스가 있었으랴. 두 분 모두 부모님 말씀에 따라 시키는 결혼을 했으면 그런 고생 않고 편하게 사셨으리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에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데 한 살짜리 나를 안고 사진을 찍은 그 해가 바로 세계적인 공황이 일던 1929년이었다. 여러 상점에 외상으로 나간 상품이 모두 헛것이 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피나는 노력은 하룻밤 사이에 여지없이 무너져버렸다. 다시 빈손이 되신 것이다. 반드시 성공해서 어엿하게 잘사는 모습을 부모님을 비롯한 고향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터인데 개성을 떠날 때와 별로 달라진 것 없이 혹들만 매달고 고향으로 되돌아오신 것이다. 그리고 3~4년 뒤에 다시 고향을 떠나 황해도 연안읍으로 내려가서 장사를 시작했다.

    내 기억으로도 이때 우리는 너무도 가난했다. 그런데 3년쯤 뒤에는 상점을 차리고 예쁜 양철집도 새로 지었다. 성진에서 못지않게 빠른 성공이었다. 이 무렵 어머니는 늘 하얀 모시옷에 멋진 양산을 쓰고 내가 다니던 작은 학교에 찾아와서 기부금을 가장 많이 내는 부잣집 아주머니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고 전쟁이 일어나더니 아버지는 네이팜탄이 퍼부어진 불구덩이 속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것이다. 아버지는 그 날로 상점과 집 몇 채와 토지 등 그동안 모은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실향민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인천에서 온 가족을 위해 재봉틀을 돌리고 상점을 운영하며 밤늦도록 쉬지도 못하시던 아버지는 마침내 병들어 과로로 쓰러져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때가 1956년, 향년 61세였다.

    결국은 그렇게 생을 마감했지만 나는 아버지가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분이라고 믿고 있다. 아버지는 결혼 문제에서도 부당한 인습이나 가치관과 정면으로 맞섰다. 역경 속에서도 누구보다 빠르게 우뚝 섰고, 쓰러지면 또다시 자랑스럽게 일어섰다.

    이유야 어쨌든 돈 버는 상인이 모든 재산을 잃어버렸으니 실패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전부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일찍이 나를 개성으로 유학 보내고 대학에 보내주셨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시기에 나에게 너무도 소중한 교훈을 남겨주셨다. 앞에서 언급한 것말고도 개성상인을 통해 또 다른 충고의 말씀을 해주시기도 했다.

    인색해서 성공한 장사꾼은 없다

    “남들은 개성사람을 개성 깍쟁이라고 한다. 특히 사농공상이란 말로써 개성상인을 경멸하려 든다. 그러나 상인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고려정권을 빼앗은 이성계 정권의 야비한 중상이다. 조선조에 굴복하기를 거부해 벼슬을 못 얻게 된 개성 사람들은 그 대신 전국의 상권을 쥐었다. 그래서 이성계 정권은 특히 개성상인들을 비하하려고 했다. 하지만 개성상인은 검소할 뿐 인색한 사람은 아니다. 잘 들어라. 이 세상에 인색해서 제대로 성공한 장사꾼은 없는 법이다. 개성상인은 오직 신용으로 장사한다. 신용은 내가 얻기 전에 먼저 주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돈을 받기 전에 먼저 외상으로 주는 것은 믿음과 믿음의 관계다. 그냥 다정한 말 한마디 먼저 건네는 것도 그렇다. 정으로 먼저 믿음을 주면 그 다음에 믿음을 얻게 된다. 그것이 개성상인의 성공의 기본이고 그것이 사람다운 삶의 기본이다. 믿음은 사람의 목숨까지도 구해준다.”

    아버지는 우리 집안에 대해서도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자부심의 바탕에는 아버지가 갖고 있는 확고한 ‘상인철학’이 깔려 있다.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들려주시던 아버지의 당부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당시 우리 고향에서는 서로 원한이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일이 많았는데 우리처럼 한창 젊은 나이의 자식이 7남매나 있는 소문난 부잣집이 인공 때나 국군 때나 모두 무사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쪽저쪽 아무도 우리 식구들을 잡으러 다니지 않았다. 왜 그랬겠니? 우리 집안이 돈만 아는 인색한 집안이었다면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돈만 버는 장사꾼이 아니었다. 전쟁을 겪으며 생각하니 그것이 더욱 확실해지는구나. 너도 그렇게 살아라. 남에게 인색하면 안 된다. 인색하면 더 많이 잃고 베풀면 더 많이 얻는 것은 장사의 이치만이 아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면 더욱 좋겠다. 장사꾼은 잘하면 인심은 얻을 수 있어도 이 세상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 너는 좋은 대학에 갔고 문학을 한다니 꼭 그렇게 되면 좋겠구나.”



    아버지는 마지막에 모든 재산을 잃으셨지만 이런 말씀들은 물질적 재산보다 훨씬 귀중한 유산이 되어 내게 남아 있다. 그런 아버지의 귀중한 가르침을 다 따르지 못하는 것이 항상 부끄러울 따름이다. 나는 개성상인으로서 항상 오뚜기처럼 일어나고 큰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우리를 든든하게 보호해주시다가 쓰러진 아버지를 누구보다도 강하고 당당했던 분으로 기억하고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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