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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 1000만원 고료 논픽션 공모 우수작

北으로 간 밀사

  • 글: 최세희

北으로 간 밀사

3/10
그 사이 아라시마는 현인겸에게 매일같이 수색으로 올라오라고 전화를 해댔다. 결국 현인겸은 서울행 열차를 탔고 아라시마는 그 날로 수색변전소 업무를 그에게 넘겼다. 때마침 남쪽에서는 조선전업(朝鮮電業), 경전(京電), 남전(南電) 등 전기3사가 조선인 자치위원회를 구성하고 일본인에게 전력수급 업무 일체를 넘겨받을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조선전업은 윤일중(尹日重)을 자치위원장에 추대했다. 그는 일본 도후쿠(東北)대 전기과를 나와 조선인 최초로 전기주임기술자 자격을 획득한 전기기사였다. 1917년 윤일중은 민족기업가 김정호(金正浩)가 설립한 개성전기(開城電氣) 주식회사의 초대 주임기술자로 추대됐고 그후 경성전기를 거쳐 조선전업에 영입됐다. 윤일중은 미군정으로부터 조선전업을 넘겨받고 바로 수색변전소장에 현인겸을 발령했다. 남천에 있던 가족들도 데려왔다.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갈려 있었지만 경의선 열차는 예전대로 운행됐고, 장사꾼들은 여전히 남북을 넘나들었다. 전력융통 역시 일제 때의 관례에 따라 압록강, 장진강 등지에서 생산된 전력이 평양변전소, 남천개폐소, 수색변전소를 거쳐 차질 없이 송전됐다. 남한 지역은 이렇다 할 발전소가 없었지만 전기수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는 북에 있는 모든 수력발전시설과 송전시설을 관할하던 조선전업주식회사가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다. 38선 이북에 있는 지점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조선전업 직원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큰 영예로 생각했다. 그들은 조선총독부 당시의 ‘전력수급업무지침’을 충실히 따랐다. 즉 생산지점에서 수요지점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것을 당연한 임무로 인식하고 있었다.

38선이 있어도 처음에는 드나들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월급도 서울에서 이북의 지점으로 원활히 지급됐다. 수색변전소가 월급을 계산해 현금을 마련해 놓으면 남천개폐소에서 출장 나온 직원들이 이를 포대에 담아 남천까지 날랐고, 평양변전소 등 그밖의 송전루트 사업소는 남천에 와서 자기들 몫을 찾아가는 식이었다. 하지만 38선을 넘나드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자 조선전업은 ‘송전루트 직원 봉급전달작전’이라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이북의 직원들에게 월급을 지급해야 했다.

그때까지는 단속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미군과 소련군이 38선을 경계로 남북을 갈라서 지켰는데, 그들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심하게 단속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북한에서는 좌익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면서 유산계급과 공산당에 협조하지 않는 사람을 색출한다는 명목하에 약탈행위가 자행됐고 소련군의 비행도 점점 늘어갔다. 반동분자로 낙인찍혔거나 찍힐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사람들은 남하하기 시작했다. 한편 남한에서는 좌우익 싸움이 살육전으로 변해 좌익활동에 위기를 느낀 사람들이 월북을 감행했다. 이런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38선 상황은 나빠져만 갔다.

이 무렵까지도 38선을 넘어 남천개폐소를 오가는 일, 38선 이북에 있는 경전(京電) 철원(鐵原)영업소 직원과 서울 본사 직원이 왕래하는 일, 전기 긴급 보수차량이 넘나드는 일 등은 ‘공무’라는 이유로 자유롭게 행해졌다. 이는 미소 경비장교 사이에 합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1946년 봄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린 이후 통제가 심해졌다. 한 달에 한 번씩 오가기도 버거워졌고 ‘송전루트 직원 급료전달작전’도 난관에 부닥쳤다. 작전 거리를 단축해야 했다. 현인겸은 변전소 직원 두 명을 데리고 직접 개성까지 가 남천에서 온 직원을 만났다. 남천 직원들은 남천에서 금천을 통해 개성으로 왔다. 현인겸은 그들이 난관을 뚫고 38선을 넘어 개성까지 온 노고를 치하하며 술자리를 마련하고 전화상으로 하지 못한 이야기도 나눴다. 이때 이미 북 임시인민위는 남천개폐소를 평양변전소 관하에 편입시켰지만 송전루트 직원들은 여전히 조선전업 직원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고 남천개폐소가 평양변전소가 아닌 수색변전소 산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송전루트 직원 봉급전달작전

1946년 9월 남로당 당수 박헌영(朴憲永)의 체포령이 내려졌고 남북대립은 격화됐다. 그러자 1번 국도인 금천∼남천 길을 오가기가 어려워져 소로(小路)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개성 북쪽의 1번 국도 검문소는 삼엄하고 검문도 철저했다. 개인이 빈손으로 넘는 것도 엄두를 못 낼 일인데, 돈이 든 포대를 둘러메고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개성 동북쪽 약 3km지점의 용흥(龍興)으로 가는 소로를 택했다. 이 길은 용흥을 지나 천마산(天摩山 또는 華藏山, 762m) 고갯길을 넘어야 하는 험로다. 하지만 그만큼 안전은 보장됐다. 이처럼 개성, 용흥, 천마산을 지나 약 30km를 걸어서 금천에 도착하면 녹초가 되곤 했다. 하지만 금천에서 하룻밤 묵으며 남천에서 온 직원들과 나누는 한잔 술 맛은 그만이었다. 다음날 남천까지 20km 넘는 길을 걸어서 갔다. 만일에 대비해 경의선 열차는 이용하지 않았다. 월급을 전달하는 데 5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야 했지만 그들은 이를 사명이라 여겨 기꺼이 임무를 완수해냈다.

현인겸은 그들의 노고를 잘 알고 있었다. 1946년 초겨울 어느날 아침 남천개폐소 직원은 개성에서 월급포대를 인계해주러 온 현인겸 소장이 등산복 차림에 허리에는 물통을 꿰차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천마산 고개의 험로를 직원들과 함께 넘어가겠다는 게 아닌가. 일행이 걷고 걸어 천마산 고개에 다다른 것은 오후 1시경이었다. 멀리 예성강 물줄기와 남천까지 펼쳐진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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