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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림현미 고종환 회장 “서구식 개인주의 버려야 중소기업 살아난다”

  • 글: 이지은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miley@donga.com

(주)세림현미 고종환 회장 “서구식 개인주의 버려야 중소기업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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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회의원을 꿈꾸는 정치 지망생에서 사업가로 변신, 국내 플라스틱 제조업의 기반을 닦은 (주)세림현미 고종환 회장은 최근 한민족 고유의 얼을 후학들에게 가르치는 민족교육 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나는 민족주의자”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고종환 회장의 이채로운 삶을 들어보았다.
(주)세림현미 고종환 회장 “서구식 개인주의 버려야 중소기업 살아난다”
(주)세림현미 고종환(69) 회장을 만난 것은 그의 두 번째 저서인 ‘민족정기와 국가발전’이 발간된 날이었다. 인쇄소에서 막 도착한 따끈따끈한 책을 기자에게 건네며 그는 “우리 민족이 잘살려면 서로 협동하고 단결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책”이라고 설명했다. 기업가가 쓴 민족에 대한 책이라…. 참 색다르게 느껴졌다.

아니나다를까. 고종환 회장은 매우 독특한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엔 국회의원을 꿈꾸는 정치 지망생이었다가 4·19 이후 사업가로 돌변, 국내 플라스틱 제조업의 기반을 닦았고 (주)세림현미를 차린 후부터는 현미식용유 등 순수한 우리 농산물을 바탕으로 한 가공산업을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거기에 사단법인 ‘겨레얼 찾아 가꾸기 모임’의 이사장으로 봉직하면서 한민족에 대한 연구와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 사람에게서 이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고종환 회장이 처음 사업가의 길에 들어선 것은 1960년 4·19 혁명 때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그는 ‘잘나가는’ 정치 지망생이었다.

“어릴 적부터 정치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어요. 그냥 힘을 가지고 싶었거든. 그러다 아주 ‘웃기는’ 계기로 정치에 입문하게 됐어요. 6·25 전쟁이 끝난 직후 청주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내무부 장관이 고향 선배였어요. 금의환향해 사람들을 모아놓고 강연을 하는데 잘난 척을 하더라구요. 그거 참 못봐주겠데요. 그래서 손을 들고 막 공격을 했더니 감옥소로 끌고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튿날 아침 경찰계장이 그를 불러내더니 “자유당에 입당하면 풀어주겠다”고 했다. 대중 앞에서 거침없이 말하는 그를 자유당 관계자들이 눈여겨본 것이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입당 원서를 쓰고 집에 온 그는 며칠 후 자유당 정치국으로부터 중앙정치훈련을 받으라는 통보를 받았다.



“통보를 어기면 또 감옥소에 잡혀갈까 봐 얼른 훈련을 받으러 떠났지요(웃음). 훈련 기간 내내 강연이나 토론을 잘한다는 칭찬을 듣고 상도 받았어요. 수료 후 바로 교도과장으로 근무하기 시작했죠. 당시만 해도 참 의기양양했어요. 고향인 충남 연기군에서 서른도 안 된 나이에 국회의원을 하려고 했으니…. 그러던 중 4·19 혁명이 일어났죠.”

세상은 완전히 뒤집어졌고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치인 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자신도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당시 정치 현실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정치인 생활 하면서 700만원 정도 모았어요. 당시로는 꽤 큰돈이었죠. ‘이 돈으로 사업을 하면 되겠구나’ 싶어 이런저런 아이템을 구상하고 있는데, 문득 ‘치산(治山)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큰돈을 벌 수 있었던 게 모두 조상님의 은덕 때문이 아닐까 싶었거든요.”

보증 잘못 섰다가 몰락 위기

그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조상들의 산소를 한군데 모아 거대한 비석을 세웠다. 묘비에 새긴 글은 고 회장이 직접 쓴 다음 박목월 시인에게 교정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모은 돈을 전부 들여 치산을 하고 나자 주변에서 그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져 있었다.

“치산하느라 700만원을 다 쓰고 나니 무척 막막했죠. 사업을 하려고 해도 돈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치산을 한 게 사업에 큰 도움이 됐어요. 효자라는 소문이 나니까 여러 회사나 은행에서 나를 믿어 줬거든. 그래서 사업자금도 쉽게 대출받을 수 있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조상님들이 제가 사업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나 싶어요.”

1967년 돌가루를 만드는 (주)중앙분체에 전무이사로 들어간 고 회장은 공장 일로 여러 번 일본으로 출장을 갔다. 그 시절 일본에서 ‘돈이 될 만한’ 아이템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비닐 봉지였다.

“우리는 그때 물건을 담을 때 종이봉지를 썼는데 일본에 가보니 비닐봉지를 썼어요. 또 당시 일본에는 플라스틱 폐기물이 많았는데 이것을 수입해서 비닐 봉지로 재생해 다시 일본에 수출하면 돈이 되겠구나 싶었죠. 이렇게 해서 플라스틱 제조업에 첫 발을 내딛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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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지은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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