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호

(주)세림현미 고종환 회장 “서구식 개인주의 버려야 중소기업 살아난다”

  • 글: 이지은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miley@donga.com

    입력2004-02-27 19: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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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회의원을 꿈꾸는 정치 지망생에서 사업가로 변신, 국내 플라스틱 제조업의 기반을 닦은 (주)세림현미 고종환 회장은 최근 한민족 고유의 얼을 후학들에게 가르치는 민족교육 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나는 민족주의자”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고종환 회장의 이채로운 삶을 들어보았다.
    (주)세림현미 고종환 회장 “서구식 개인주의 버려야 중소기업 살아난다”
    (주)세림현미 고종환(69) 회장을 만난 것은 그의 두 번째 저서인 ‘민족정기와 국가발전’이 발간된 날이었다. 인쇄소에서 막 도착한 따끈따끈한 책을 기자에게 건네며 그는 “우리 민족이 잘살려면 서로 협동하고 단결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책”이라고 설명했다. 기업가가 쓴 민족에 대한 책이라…. 참 색다르게 느껴졌다.

    아니나다를까. 고종환 회장은 매우 독특한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엔 국회의원을 꿈꾸는 정치 지망생이었다가 4·19 이후 사업가로 돌변, 국내 플라스틱 제조업의 기반을 닦았고 (주)세림현미를 차린 후부터는 현미식용유 등 순수한 우리 농산물을 바탕으로 한 가공산업을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거기에 사단법인 ‘겨레얼 찾아 가꾸기 모임’의 이사장으로 봉직하면서 한민족에 대한 연구와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 사람에게서 이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고종환 회장이 처음 사업가의 길에 들어선 것은 1960년 4·19 혁명 때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그는 ‘잘나가는’ 정치 지망생이었다.

    “어릴 적부터 정치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어요. 그냥 힘을 가지고 싶었거든. 그러다 아주 ‘웃기는’ 계기로 정치에 입문하게 됐어요. 6·25 전쟁이 끝난 직후 청주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내무부 장관이 고향 선배였어요. 금의환향해 사람들을 모아놓고 강연을 하는데 잘난 척을 하더라구요. 그거 참 못봐주겠데요. 그래서 손을 들고 막 공격을 했더니 감옥소로 끌고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튿날 아침 경찰계장이 그를 불러내더니 “자유당에 입당하면 풀어주겠다”고 했다. 대중 앞에서 거침없이 말하는 그를 자유당 관계자들이 눈여겨본 것이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입당 원서를 쓰고 집에 온 그는 며칠 후 자유당 정치국으로부터 중앙정치훈련을 받으라는 통보를 받았다.



    “통보를 어기면 또 감옥소에 잡혀갈까 봐 얼른 훈련을 받으러 떠났지요(웃음). 훈련 기간 내내 강연이나 토론을 잘한다는 칭찬을 듣고 상도 받았어요. 수료 후 바로 교도과장으로 근무하기 시작했죠. 당시만 해도 참 의기양양했어요. 고향인 충남 연기군에서 서른도 안 된 나이에 국회의원을 하려고 했으니…. 그러던 중 4·19 혁명이 일어났죠.”

    세상은 완전히 뒤집어졌고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치인 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자신도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당시 정치 현실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정치인 생활 하면서 700만원 정도 모았어요. 당시로는 꽤 큰돈이었죠. ‘이 돈으로 사업을 하면 되겠구나’ 싶어 이런저런 아이템을 구상하고 있는데, 문득 ‘치산(治山)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큰돈을 벌 수 있었던 게 모두 조상님의 은덕 때문이 아닐까 싶었거든요.”

    보증 잘못 섰다가 몰락 위기

    그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조상들의 산소를 한군데 모아 거대한 비석을 세웠다. 묘비에 새긴 글은 고 회장이 직접 쓴 다음 박목월 시인에게 교정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모은 돈을 전부 들여 치산을 하고 나자 주변에서 그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져 있었다.

    “치산하느라 700만원을 다 쓰고 나니 무척 막막했죠. 사업을 하려고 해도 돈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치산을 한 게 사업에 큰 도움이 됐어요. 효자라는 소문이 나니까 여러 회사나 은행에서 나를 믿어 줬거든. 그래서 사업자금도 쉽게 대출받을 수 있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조상님들이 제가 사업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나 싶어요.”

    1967년 돌가루를 만드는 (주)중앙분체에 전무이사로 들어간 고 회장은 공장 일로 여러 번 일본으로 출장을 갔다. 그 시절 일본에서 ‘돈이 될 만한’ 아이템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비닐 봉지였다.

    “우리는 그때 물건을 담을 때 종이봉지를 썼는데 일본에 가보니 비닐봉지를 썼어요. 또 당시 일본에는 플라스틱 폐기물이 많았는데 이것을 수입해서 비닐 봉지로 재생해 다시 일본에 수출하면 돈이 되겠구나 싶었죠. 이렇게 해서 플라스틱 제조업에 첫 발을 내딛게 됐어요.”

    (주)세림현미 고종환 회장 “서구식 개인주의 버려야 중소기업 살아난다”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고종환 회장(왼쪽에서 세 번째).

    그후 (주)삼일화학공업을 세우고 비닐봉지를 비롯해 다양한 플라스틱 제품들을 만들었다. 주로 원자재를 외국에서 수입해 제품으로 만든 후 국내에 판매하거나 외국으로 수출하는 형태였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우리나라 최초로 플라스틱 버섯재배 용기를 개발, 판매해 큰돈을 벌기도 했다.

    “한번은 병원 화장실에 갔는데 딸그락 소리가 나는 거예요. 한 간호사가 피 묻은 링거병을 씻고 있더군요. ‘왜 버리지 않고 씻느냐’고 하니 거기에 버섯 종균을 배양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왜 위험하게 유리병을 쓰냐’고 다시 물었더니 100℃ 이상에서 멸균해야 하는데 이 온도를 견디는 플라스틱이 없다고 하더군요. 곧 바로 100℃ 이상의 온도를 견딜 수 있는 플라스틱 버섯재배 용기 개발에 들어갔죠. 때마침 국가에서 농촌 소득신장을 위해 200개 농가에 매년 200만원씩 지원을 했어요. 당시엔 특산물로 버섯을 재배하는 농가가 많았거든요. 돈도 생겼겠다, 그들이 우리 회사가 만든 용기를 사들이기 시작했죠.”

    그렇게 승승장구한 것만은 아니다. 작은 실수로 재산을 모두 날릴 뻔한 위기도 있었다. 1980년대 고향 사람이 자신을 찾아와 보증을 서달라고 부탁했다. 보증서를 보니 꽤 많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어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는데, 나중에 보니 나머지 이름들은 모두 가짜였던 것. 그 사람은 20억원을 사기 치고 미국으로 도망쳤고 고 회장의 회사와 집안의 모든 물건엔 ‘빨간딱지’가 붙었다.

    하지만 쉽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재기할 수 있는 방법은 수출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그동안 사업차 만났던 외국인들의 명함을 모두 꺼내들고 명함에 적힌 주소로 모조리 한글로 쓴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나는 플라스틱 제조업을 하는 고종환이다. 플라스틱 제품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으니 주문해달라’는 것이었다.

    “영어를 모르니 한국말로 쓸 수밖에요(웃음). 그런데 상대방에서 어떻게든 번역을 해서 읽어보고는 연락을 해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연결된 게 소련이었어요. 당시 소련은 고사리를 염장해 일본으로 수출했는데, 그것을 담을 용기를 만들어달라는 거였죠. 처음으로 물건을 배에 싣는 날 컨테이너 차량을 10대나 불렀어요. 1대만 불러도 되는 용량이었지만 고종환이는 이렇게 재기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던 거죠. 이런 일을 겪으면서 경영을 할 때 정이나 인간관계 등 기업 외적인 것에 치우치면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게 됐죠.”

    한국 고대사에 관심 많아

    이런저런 시련을 겪으며 키워온 사업체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됐다. 회사명도 (주)가나다화학으로 바꿨고 1994년에는 (주)세림을 세워 플라스틱 원재료 판매를 전담하게 했다. 그 무렵 고 회장은 ‘이젠 나라와 민족을 위한 사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1996년 세운 사업체가 바로 (주)세림현미다.

    “사실 현미가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알지만 재질이 꺼끌꺼끌해 많이 먹질 않잖아요. 하지만 영양분은 미강(쌀눈과 현미껍질)에 다 들어 있어요. 그 버려지는 부분을 살릴 수 없을까 고민하고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미강에서 고품질의 현미식용유를 생산하고 남은 찌꺼기로 유기질 비료와 각종 유해물질을 정화시키는 미생물 제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어요. 그동안 했던 사업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분야로의 진출이었죠.”

    현미식용유와 유기질 비료 등을 생산, 판매하는 (주)세림현미가 고 회장에게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무엇보다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하고 싶어서 한 첫 번째 사업이기 때문. 현재 전국에 6개 공장을 가지고 있는 (주)세림현미의 1년 매출액은 170억원 정도. 앞으로 5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게 목표다.

    “물론 사업가로서 매출을 많이 올리는 것도 중요하죠. 그러나 그보다도 저는 건강을 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쌀로 만든 현미식용유를 먹었으면 좋겠어요. 신토불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 몸은 우리 땅에서 난 음식을 먹어야 해요. 지기(地氣)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죠.”

    고 회장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우리 몸’ ‘우리 땅’ ‘우리 민족’ 등 ‘우리’라는 말을 많이 했다. 기자와 만나 처음 나눈 이야기도 ‘우리’ 고구려사를 자기네 변방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움직임에 관한 것이었다. 항상 ‘우리’를 위한 사업을 하고 싶었다는 그는 (주)세림현미를 세운 1996년, 사단법인 ‘겨레얼 찾아 가꾸기 모임’을 만들었다.

    “주로 회원들과 사연이 있는 고적지를 답사해 조상의 얼을 되새기고, 전문가를 초빙해 역사에 대한 강연을 들으며 자유롭게 토론하기도 합니다. 방학 때는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유적지를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요. 세림 직원들도 참여하는데, 무척이나 좋아해요. 사실 정신 없이 일하다 보면 역사나 겨레에 대해 생각할 짬이 없잖아요. 그런데 회사 차원에서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하니까 직원 스스로도 무언가 얻는 게 있다며 뿌듯해하는 거죠.”

    사실 고 회장은 ‘겨레얼 찾아 가꾸기 모임’을 만들기 훨씬 전부터 우리 민족사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져왔다. 특히 고대사에 대해서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해왔다. 지난해에는 수년 동안 자신이 연구한 역사 자료들을 중심으로 ‘아 그리운 강토여 겨레의 노래여!’라는 저서를 펴내기도 했다. 첫 저서인 이 책에서 그는 민족의 노래인 아리랑과 도라지타령의 참뜻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다.

    “수많은 노래 중 유난히 아리랑과 도라지타령이 오랜 세월 민족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했어요. 그래서 아리랑에 대한 연구를 하다보니 아리랑의 노랫말이 주로 유적지, 유배지를 중심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그에 따르면 아리랑은 씨알을 의미하는 ‘알’이 변화된 말이다. 알은 중원의 대국으로 대접받던 고구려 시절을 의미한다. 그 시절을 잊고 가는 사람은 10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는 것이다.

    “고려 때만 해도 실지(失地)회복이 국가의 목표였어요. 그런데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고 우리를 소국으로 자처하게 됐죠. 당시 뜻 있는 지사들이 이태조를 등지고 유배지에 은둔하면서 아리랑의 노랫말을 만들어낸 겁니다.”

    그는 도라지타령의 경우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고통을 받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우리 민족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 두 뿌리만 뽑아도 대바구니가 넘친다’는 노랫말에서 알 수 있듯 민족의 기개와 능력은 뛰어나니 반도에 묶여 있음에 실망하지 말고 요동벌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라는 뜻이라는 것.

    아리랑, 도라지타령 의미 되새겨야

    “저는 지금도 중국 조선족을 만나면 ‘이곳은 우리 땅이니 긍지를 가지고 살라’ ‘우리가 실지를 회복할 날이 언젠가 온다’고 말합니다. 실지 회복이 불가능하더라도 우리 민족 스스로 대국민이란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반도에 갇히고 난 후 많은 상처를 입으면서 우리 민족성 자체가 변한 게 아닌가 걱정됩니다.”

    그는 앞으로 한민족 고유의 얼과 긍지, 자부심을 후학들에게 가르치는 민족교육가로서 여생을 마치겠다고 한다. 특히 우리 민족의 본성이 서로 보듬고 아우르는 것인 만큼 서구식 개인주의가 더이상 우리나라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강조했다.

    “요즘 중소기업이 어렵다고들 하잖아요. 이 역시 서구식 개인주의가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예전에는 한 사람이 모자란 부분이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그 부분을 보충할 때까지 도와줬잖아요. 기업도 마찬가지예요. 한 중소기업이 경쟁력을 가지게 될 때까지 국가나 대기업에서 어버이가 자식 키우는 심정으로 도와줘야 하는데, 요즘은 그렇지가 않아요. 완전히 약육강식이예요. 거대한 자본으로 중소기업이 죽을 때까지 숨통을 조이거든. 그렇다고 그 자본이 순수한 우리 것이냐 하면 그렇지가 않아요. 만약 한반도에 위기가 생기면 모조리 빠져나갈 외국 자본이지요.”

    그는 또 중소기업이 원자재 구입부터 제품 수출에 이르기까지 대기업을 통할 수밖에 없어 세계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대기업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필요한 원료는 중소기업 스스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판매 역시 국내시장이든 해외시장이든 대기업을 통하지 않고 중소기업이 직접 해야 합니다. 물론 중소기업은 규모가 작기 때문에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중소기업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힘을 키울 수 있는, 사회적인 여건이 갖춰져야 합니다.”

    그는 2월27일에 있을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회장선거에 출마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중소기업 경영의 원칙을 다시 세우고 한국 경제의 틀을 고치기 위해서다.

    인터뷰 내내 고 회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민족성에 기반을 둔 자신만의 경영 원칙을 역설했다. 다소 감상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그의 힘찬 목소리는 옛 고구려인의 기상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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