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쿄 외곽 서남부에 위치한 캐논 본사.
하지만 캐논은 이 ‘잃어버린 10년’을 기회로 해마다 최고 수익을 경신하며 승승장구해왔다. 그러다 마침내 지난해 4월9일에는 도쿄증시에서 첨단기업 소니를 제치고 시가총액 1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소니 주가는 4020엔으로 마감, 시가총액이 3조7203억엔으로 떨어진 반면 캐논의 주가는 전날과 같은 4260엔으로 마감해 시가총액 3조7451억엔을 기록하며 결국 순위가 바뀌게 된 것.
이날 일본 언론은 “캐논이 소니를 제치고 일본 하이테크 업체의 간판으로 떠올랐다”고 보도했다. 이후 캐논의 호조와 소니의 부진이 맞물리면서 양사간 시가총액 차이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올 1월29일 발표한 2003년 실적보고서를 보면 캐논은 2003년 2757억엔의 순이익을 냈다. 이는 2000년 이후 4년 연속 신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캐논은 지금 ‘불황을 모르는 기업’으로 통한다. 카메라와 복사기를 앞세워 디지털기기 시장을 평정한 캐논의 성공신화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캐논 본사는 도쿄 외곽 서남부, 전철역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다. 본사에 들어서자 잘 가꿔진 정원과 인공호수가 눈에 띄었다. 1층 로비에서는 각국에서 몰려든 바이어들과 이들을 맞이하는 캐논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캐논의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인 ‘글로벌화’의 현장이었다.
로비에서 만난 캐논의 홍보담당자는 “캐논의 역사를 보면 성공신화의 비결을 알 수 있다”며 먼저 본사 별관에 위치한 캐논 갤러리로 안내했다. 어릴 적부터 카메라를 좋아했던 요시다 고로가 1933년 도쿄 록본기에 정밀광학연구소를 차린 것이 오늘날 캐논의 시초다. 이듬해 일본에서 처음으로 35mm 카메라를 시작(試作)했고 1942년에는 창립 때부터 자금 지원을 해왔던 산부인과 의사 미타라이 다케시가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후 1947년 회사명을 정기광학공업에서 캐논 카메라로 바꾸었다.

캐논 성공신화를 이끈 미타라이 후지오 사장.
하지만 카메라에만 의존하는 사업 형태로는 장래가 불안하다고 생각한 미타라이 다케시는 1967년 사원들 앞에서 선언을 한다.
“오른손에 카메라, 왼손에 사무기기. 이 양쪽을 살려서 연간 매출 300억엔을 돌파하겠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캐논의 성공신화를 일군 기업모토다.
캐논은 사무기기 중에서도 복사기 분야를 특히 중요시했다. 소모품으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분야였기 때문이다. 당시 카메라 이상으로 필름의 수익성이 높았다. 카메라 보급률이 높아지면 카메라의 수요가 줄어들더라도 필름은 꾸준히 팔릴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미타라이 다케시는 ‘우리가 결국 필름 메이커에게만 돈을 벌어주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왔다고 한다. 복사기는 토너, 복사용지 등 소모품이 큰 수익을 낳는 비즈니스. 다케시는 이것을 캐논이 직접 다룬다면 충분히 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1968년 독자 방식의 복사기 개발에 성공한 캐논은 1969년 회사 명칭에서 카메라를 없애고 현재와 같은 ‘캐논’으로 변경했다.
다각화의 쓴 잔
그후 캐논은 계속적으로 획기적인 신상품을 개발하며 사업을 확대했다. 이렇듯 승승장구하던 캐논도 1990년대에 들어 그 여세가 꺾였다. 지나친 다각화 전략으로 채산이 맞지 않는 사업에까지 진출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여기저기 적자가 누적됐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1995년 캐논의 초대 회장 미타라이 다케시의 조카 미타라이 후지오(69)가 사장으로 취임한다. 그 후 캐논은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1961년 입사해 23년간 캐논USA에서 근무한 미타라이 후지오 사장은 취임하자마자 수익성이 없는 사업을 모두 정리해버렸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과감한 연구개발과 수익 위주의 경영뿐”이라는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과감하게 구조조정을 단행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