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용 : 장준하씨에 대해서는 뭐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최근 한 방송사에서 두 차례에 걸쳐 장준하씨에 대해 다뤘는데, 제 생각에는 좀 객관성이 떨어지는 듯했어요. 한 방향으로만 간 것 같았습니다. 인물에 대한 프로그램을 만들 때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조명해야 하는데 말이죠.
박 :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저도 장준하씨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만, 인물을 한쪽 면으로만 다루면 그 사람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거든요.
강 : 장준하씨의 부친이 목사인 데다 저와 기독청년운동을 같이했기 때문에 사정을 좀 압니다. 제가 보기에 장준하씨는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지만, 정치적인 목적이 강했던 것 같아요. 부산에 피난 가서 처음 ‘사상’(‘사상계’의 전신)을 만들 때부터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는 대개 민족청년단이나 이범석 장군 계통의 인물들 그리고 평안도 지방에서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과 가까웠습니다. 물론 당시 ‘사상계’가 정치적인 색채를 많이 띠지는 않았지만. 장준하씨는 4·19 이후 국토개발단 단장을 맡기도 했죠.
박 : 국토개발단장을 하면서 젊은 사람들, 특히 대학 졸업자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한 데도 어느 정도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말씀이죠?
강 : 그렇게 봅니다. 그러다가 5·16 쿠데타가 터지면서 깨진 거죠. 그때부터는 박정희에 반대하는 것으로 정치적 목표를 바꿨습니다. 함석헌옹을 모시고 순회강연을 해서 엄청난 사람들을 끌어모았죠. 그래서 그 무렵부터 투사(鬪士)로서 ‘사상계’를 가지고 나온 게 아닌가 해요.
언젠가는 장준하씨가 저를 찾아왔어요. 그간 고생을 많이 했지만 도저히 ‘사상계’를 계속 꾸려갈 수가 없으니 저더러 인수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돈도 없고 잡지를 만들 생각도 없어서 거절했죠. 그러다 부완혁씨에게 넘겼는데, 그후에도 부완혁씨와 갈등이 있었어요.
그런데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어느 날 장준하씨의 동료가 저를 만나러 왔습니다. 아마 1960년대 후반이었을 거예요. “우리 장 사장이 중병이 들어 입원했는데 한번 찾아뵙지 않겠습니까?” 하더군요. 그래서 파고다공원 옆에 있는 내과엘 갔더니 장준하씨가 링거 주사를 꽂고 누워 있었습니다. 간이 안 좋다고 하는데, 제 아들이 어릴 때 간에 탈이 나서 죽었기 때문에 제가 그 병을 잘 알아요. 우리의 화제는 어떻게 박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정권을 세우는가 였어요.
윤보선, 유진산과 손잡았다 후회
박 : 목사님께서도 윤 전 대통령과 가까우셨죠?
강 : 윤보선씨의 부인 공덕귀 여사가 제 스승인 손창근 목사의 애제자예요. 그래서 제가 공덕귀씨와 잘 아는 사이였는데, 윤보선씨가 공덕귀와 결혼하면서 윤씨와도 인연이 맺어진 겁니다. 그후에 윤보선씨가 상공부 장관과 서울시장을 했죠. 부산 피난 시절에는 제가 어디에 가서 강연을 하면 참석해서 듣곤 했습니다. 윤보선씨 집에 가보면 정말 양반 중의 양반가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 집안 출신인 윤보선씨가 공부는 영국에서 했으니(에든버러대에서 고고학 전공) 선비정신과 영국의 젠틀맨십을 겸하고 있었어요. 말이나 행동이 아주 신사적이었습니다.
제가 윤보선씨와 가까워진 것은 대통령을 그만두고 나서였어요. 민주당 정권 시절 구파와 신파가 싸울 때 저는 어느 쪽에도 관여하지 않았거든요. 결국 선거에서 구파가 지고 윤보선씨가 실권 없는 대통령이 되고 말았죠. 그때는 청와대에서 오라고 하면 가서 그저 밥이나 먹고 왔지 별 관계는 없었어요. 5·16이 터지고 나서부터 저와 가깝게 된 겁니다. 윤보선씨는 대통령을 그만두고 나와 다시 야당을 했지만, 당시 야권의 거물인 유진산과는 아주 미묘한 사이였죠.
박 : 두 분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윤보선씨는 유진산씨가 진솔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사람이라고 자주 비난했다고 들었는데요.
강 : 처음에는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요. 저는 유진산씨를 좋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신문에 유진산씨에 대해 안 좋은 글을 쓰기도 했죠. 그랬더니 유진산씨가 “중앙정보부에서 돈을 얼마나 받아먹고 그런 글을 썼는지 조사해봐야겠다”고 했대요. 윤보선씨가 유진산씨와 같은 당(신민당)을 한다길래 제가 “그 사람하고 같이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듣지 않고 합했어요. 결국 거기에서 윤보선씨가 유진산과 갈라지면서 제 말이 옳았다는 걸 인정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