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록 야설록과 공저였지만, 용대운은 네 번째 작품 ‘탈명검(奪命劍)’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내걸 수 있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용대운은 작품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토록 여건이 좋지 않았음에도 당시 쓰여진 무협소설들은 지금 보아도 자못 주목할 만한 참신한 면모를 갖추고 있다.
‘검왕(劍王)’을 마지막으로 1990년 무협소설계를 떠났던 용대운은 4년 뒤인 1994년 화려하게 복귀한다. 서효원의 ‘대자객교’가 재출판되어 독자들의 환영을 받은 직후이다. 필자는 용대운의 복귀 경로에 주목한다. 용대운은 PC통신 무협소설 동호회인 하이텔의 ‘무림동’에 “‘검왕’ 탈고 이후 출간하려고 구상했다가 절반 정도 쓰고 중단했던 작품”인 ‘태극문(太極門)’을 연재했다. 이 작품은 같은 시기 연재된 ‘퇴마록’의 조회 수를 능가할 정도로 인기를 끌면서 소위 창작무협소설의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복수는 武道 완성의 동기
세간의 관습에 따라 ‘태극문’ 이후 한국무협소설은 ‘신무협(新武俠)’이라고 불린다. 신무협은 구무협과 스타일에서 구분될 뿐 아니라, 만화방용 출판 위주였던 구무협과 달리 PC통신(나중에는 인터넷) 연재와 도서대여점용 출판을 두 축으로 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나타난다. ‘태극문’은 가히 스타일과 매체 특성이라는 두 측면에서 신무협의 효시, 혹은 선구자라고 할 만한 것이다. 이 점에 주목하여 ‘태극문’을 시작으로 용대운의 무협소설 세계에 대해 고찰해보자.
‘태극문’의 줄거리는 ‘복수’라는 무협소설의 고전적 주제와 ‘무도(武道)의 완성’이라는 비교적 새로운 주제의 중첩에 의해 구성되었다.
주인공 조자건(趙紫巾)의 형 조립산(趙立山)이 화군악(華君嶽)의 손에 죽고 그리하여 조자건에게는 형을 위해 복수해야 한다는 사명이 주어진다. 그런데 그 복수는 단순한 복수가 아니다. 조립산의 죽음이 정당한 비무(比武)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화군악은 당대 최고수들(조립산은 그 중에서도 으뜸가는 고수였다)과의 비무에서 모두 승리하여 자신이 천하제일의 고수임을 입증했고, 그후에도 더 높은 경지, 궁극의 경지를 향해 홀로 수련한다.
그러니 조자건의 복수는 단순히 화군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화군악과 비무를 벌여 승리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려면 화군악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화군악이 무도의 완성에 접근해가고 있으므로 화군악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른다는 것은 곧 무도를 완성시킨다는 것, 혹은 완성에 좀더 가깝게 접근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도의 완성이지 복수 그 자체가 아니다. 무도의 완성이 복수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복수가 무도 완성의 한 동기이며 과정의 일부인 것이다.
평범 속의 비범 성취한 조자건
이러한 해석은 복수라는 사명이 주어지기 전에 이미 조자건이 천하제일고수를 자기 인생의 목표로 삼아 혹독한 수련을 시작했다는 데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조립산이 세운 교육과정에 따라 조자건은 아홉 살 때부터 10년간 남들의 싸움을 구경했고, 그 다음엔 매일 1000번의 도끼질과 100번의 육합권(기초 무술인)을 연습 했다. 그 다음에는 심등대법(心燈大法)을, 또 그 다음에는 불괴연혼강기(不壞練魂쾝氣)를 배웠다. 조립산의 죽음은 그 다음이다.
그런데 ‘무도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인물은 여럿이다. 섭보옥(葉寶玉), 모용수(慕容修), 위지혼(慰遲魂 : 필자가 알기로 慰遲라는 성은 없다. 있는 것은 尉遲이고 울지라 읽는다), 번우량(飜宇亮)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화군악과의 비무로 인해 목숨을 잃은 고수들의 후예라는 점과, 무도의 완성을 위해 태극문의 무공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