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의 성공은 의미가 깊다. 베스트셀러를 만들기 위해 책을 사재기하는 장난을 치지 않았고, 방송사의 추천도서로 선정된 적도 없으며, 출간 직후 출판 지면에 제대로 소개되지도 못했다. 이 책은 제 힘으로 베스트셀러가 됐다. 신생 출판사의 노력이 시류와 멋지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30만부를 넘어설 즈음, 출판사 대표는 책이 너무 많이 팔려 두려울 정도라고 했다.
이쯤 되면 이 책은 이제 욕먹을 일만 남았다.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것은, 곧 먹잇감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베스트셀러라는 목표물이 나타나면 사방에서 달려들어 이리 물어뜯고, 저리 흠집 내려고 난리가 난다. 게다가 이 책은 비판적인 독자들이 한 수 접고 보는 경영 처세서가 아닌가. 공교롭게도 지면과 술자리에서 접한 이 책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긍정보다 부정이 많다. 그러나 ‘생활 철학서’ ‘환상을 심어주는 책’ ‘노동자의 아침 시간마저 쥐어짜려는 자본의 계략’이라는 세 갈래 평가 중에서, 나는 삶의 철학을 제시했다는 쪽에 무게를 싣고 싶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건 좋은 일 아닌가. 야밤형인 나는 이 책을 읽고 아침 일찍 일어나고 싶어졌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높이 평가하는 단순한 이유다.
수사과정이 곧 철학
그러나 추리소설은 다르다. 빈번하게 묘사된 살인장면을 따라하게 해선 안 된다. 하지만 잔혹한 광경을 읽고 남을 해치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는 독자가 있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추리소설 읽고 남을 해칠 자는 추리소설을 읽지 않아도 남을 해칠 것이기 때문이다. 아침형 인간이 되라는 책을 읽고 아침 일찍 일어날 마음이 생겼을 뿐, 나는 아직 야밤형 생활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추리소설은 살인 매뉴얼이 아니다.
문득 처세서와 추리소설에는 닮은 구석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출판계에서 천대받는 장르이며 제대로 평가받은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것이 바로 추리소설을 잘 안 읽는 내가 추리소설을 옹호하고자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추리소설에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내가 그럴 엄두를 낸 것은 ‘철학적 탐구’(필립 커 지음, 임종기 옮김, 책세상)라는 임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철학적 탐구’는 추리소설이란 시간 때우기용에 불과하다는 편견을 불식시키는 만만찮은 작품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추리기법을 활용해 철학을 했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처럼 폼을 잡지도 않는다. ‘철학적 탐구’는 추리소설의 장르적 속성과 문법에 충실하다. 추리소설의 재미를 만끽하게 하면서도 만만찮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철학적 탐구’는 중의적 표현으로 일단 수사과정을 가리킨다. 이 점은 소설에서 이사도라 제이코비치 경감이 자문하는 철학교수이자 저명한 탐정소설가인 제임슨 랭 경의 발언에 잘 나타나 있다. “범죄 수사와 철학은 모두 어떤 것은 밝혀질 수 없다는 생각을 만들어내요. 우리의 활동 무대에는 현실의 참된 그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함께 맞춰야 하는 단서들이 수반됩니다. 경감님이나 저나 모두 각자가 노력하고 있는 것의 핵심은 어떤 이유에서든 숨어 있는 의미와 진리를 찾는 것이죠. 외관의 배후에 존재하는 진리 말입니다.” 랭 교수는 철학자가 명제를 검증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사관은 용의자의 알리바이를 검증하려 한다고 덧붙인다.
다른 하나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저서를 가리킨다. 프랑스 릴 3대학 교육학과 교수인 이브 뢰테르는 ‘추리소설’(문학과지성사)에서 “추리 장르가 독자성을 갖게 되는 현상은 하나의 역사를 가정한다”면서 어떤 작가들은 “그 독자성의 기반을 증명하기 위해 매우 오래된 원천들을 끌어들였다”고 말한다. 필립 커 역시 그런 부류의 작가다. 이 소설에는 키르베로스, 헤라클레스, 오르페우스, 에우리디케 등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동물과 인물,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같은 명작, 그리고 여러 작가의 추리소설이 언급된다. ‘장미의 이름’의 한 구절도 인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