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특별연재|美 비밀문서로 본 격동의 80년대②

글라이스틴의 고뇌와 한 선교사의 현장기록

“광주엔 무자비한 진압만 있었을 뿐 어떠한 폭동도 없었다”

  • 글: 이흥환 美 KISON 연구원 hhlee0317@yahoo.co.kr

글라이스틴의 고뇌와 한 선교사의 현장기록

3/7
글라이스틴의 고뇌와 한 선교사의 현장기록

광주사태 희생자들의 관이 망월동 묘역으로 옮겨져 하관을 기다리고 있다. 아들을 잃은 노파는 슬픔도 잊은 표정이다.

『제목 : 5·17 관련 미국 대응에 대한 언론 조작

최근 전두환 장군은 언론사 발행·편집인 대표자 모임에서 미국이 12·12 사건을 사전에 통보받았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음.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한국 신문은 5·17 사건과 관련해 ‘이해한다’ 또는 ‘승인했다’는 본인의 언급을 곡해 보도했음.

본인은 당 대사관 언론 담당자인 노먼 반스에게 아래에 적은 구두 메시지를 전두환이 연설한 모임에 전달할 것을 지시했음. 전두환과 공개적으로 언쟁하기를 원치 않으며 이는 관련 발언 기록을 수정하는 데 과도하게 관련되지 않으려는 이유에서임. 아래 메시지는 구두로 전달된 것이며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음.

메시지 인용 : 본인은 몇몇 오해가 발생한 두 가지 사안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요구받았음.

첫째는 특정 사건(12·12를 지칭 : 옮긴이)을 미국 정부가 사전에 어느 정도 통보받았느냐 하는 것임. 위컴 장군과 글라이스틴 대사는 일이 벌어진 다음에야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이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실히 알게 되기까지 수 시간 동안 (정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해간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었음.



미 정부는 전두환 장군이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 사실을 공표 약 4시간 전에야 통상적인 소문 차원에서야 알게 되었으며, 글라이스틴 대사는 공식적으로 공표 30분 전에 통보받았음. 글라이스틴 대사는 또 비상계엄령 선포를 추인하는 국무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국무회의 개최 약 30∼60분 전에 통보받았음.

둘째는 5월23일 금요일 오찬모임에 대한 것임. 이 오찬모임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근 한국 상황과 관련, 양당 국회의원들에게 비공식적인 견해를 밝힌 바 있음. 글라이스틴 대사의 이날 발언 내용은 이튿날 ‘코리아 헤럴드’와 ‘코리아 타임스’에 영문으로 정확하게 게재되었으나, 일부 한국어 신문은 글라이스틴 대사가 5·17을 ‘이해한다’거나 ‘승인했다’고 발언한 것으로 보도했음.

비상계엄령의 필요성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며, 학생시위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 글라이스틴의 첫 발언이었음. 그 다음 그는 정치 지도자 체포와 국회 해산, 그에 따른 정치 파탄 등에 반대한다는 강력한 의견을 개진했음.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런 자신의 견해가 5월18일 워싱턴 국무부 대변인의 공식 언급과 일치한다는 것도 국회의원들에게 상기시킨 바 있음.』

“가장 균형잡힌 기록이자 분석”

글라이스틴 발언의 왜곡 전달은 전두환 신군부와 글라이스틴 사이에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불신의 골을 깊게 파놓았다. 언론 조작 건 외에도 글라이스틴은 광주사태에 대한 미 국무부의 공식 입장 전달이 무산되는 등 신군부가 정치적 합의를 일방적으로 뒤집어버리는 바람에 곤혹스러운 사태를 여러 번 겪었다.

글라이스틴 입장에서 신군부는 ‘반칙’만 일삼는, 꼴도 보기 싫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위컴 장군(미8군 사령관)도 마찬가지였다. 위컴과 글라이스틴의 차이가 있다면 군인인 위컴은 끝까지 전두환에 대한 분노와 노여움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으나, 외교관 글라이스틴은 전두환의 정치적 실체를 인정하는 선에서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5월27일 새벽 5시30분, 광주는 마지막 피를 흘리고는 잊혀져버렸다. 이후 전개된 새로운 정치 상황을 보면 광주가 망각된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정치권이 그토록 바라던 ‘법과 질서’가 회복되었고, 정치가 재개되었던 것이다. 광주는 이런 점에서 새로운 정권 탄생 과정에 통상적으로 나타나는 ‘피의 제례’에 바쳐진 희생양이었다. 글라이스틴 대사가 광주사태 배경으로 지역주의를 강조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유추할 수 있다.

광주는 군(軍)과 민(民)이 아무런 매개체 없이 직접 부닥친 사건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이 일방적으로 민을 건드렸다. 당시 신군부는 정권 창출에 방해가 될 만한 세력을 하나씩 제거해가는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였다. 우선 정치권을 동결시켰고, 학생시위를 원천 봉쇄했으며, 무엇보다도 일찌감치 12·12를 통해 군 내부의 정지(整地) 작업을 마무리했다.

미국이라는 요소를 상대하는 데에도 신군부는 성과를 올렸다. 글라이스틴 대사와 위컴 미8군 사령관은 12·12 이후 내내 신군부에 끌려다니기만 했다. 신군부는 비상계엄령을 확대하면서 정권 창출에 바짝 다가섰다. 남은 일은 대세를 굳히고 반발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공포 요법’의 필요성이었을 것이다.

광주사태의 발단을 공수특전단의 가혹 진압이라는 우발적 요인에서만 찾는 것이 과연 옳은가?

글라이스틴 대사가 미 국무부에 타전한 광주 관련 보고문건 가운데 ‘광주 폭동에 대한 내부자(insider)의 견해’라는 이색적인 제목의 전문이 한 건 포함되어 있다. 계엄군이 광주에 재진입한 지 2주 후인 6월10일에 작성된 장문의 문건이다. 이 문건에서 ‘내부자’란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 있었던 한 미국인 선교사를 지칭하는 말이며, 원래 문건에는 선교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1993년 정보공개법(FOIA=Freedom of Information Act)이 발효되면서 이 문건이 비밀에서 해제될 때 이름이 가려진 채 공개되었다.

3/7
글: 이흥환 美 KISON 연구원 hhlee0317@yahoo.co.kr
목록 닫기

글라이스틴의 고뇌와 한 선교사의 현장기록

댓글 창 닫기

2021/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