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호

30대 유명역술가 박청화

“정해진 것은 없다. 단지 정해진 것처럼 보일 뿐”

  • 글: 조용헌 江湖東洋學연구소 소장, 원광대 초빙교수 cyh062@wonkwang.ac.kr

    입력2004-06-01 11: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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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청화씨는 5~6개월 전에 예약해도 만나기 어려울 정도로 부산에서 알아주는 역술가다.
    • 전국에서 하나밖에 없는 법인 점집 ‘청화학술원’을 운영하는 역술가 박청화씨.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주명리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계속해온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에 20세부터 프로 역술가의 길에 들어섰다. 최근 자살한 안상영 전 부산시장이 유서에 박씨에 대한 감사의 뜻을 남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주목받은 그는 선인(仙人)에게서 사주 해석 방식을 배웠다는데….
    30대 유명역술가 박청화
    불가능에 도전하는 직업이 있다. 바로 역술가(易術家)라는 직업이다. 필자가 보기에 사람의 운명과 미래를 사전에 미리 알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에게 이처럼 궁금한 것도 없지만, 이처럼 난이도가 높은 것도 없다. 운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신(神)이 관장하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역술가라는 존재는 미련스럽게도 신의 섭리를 훔쳐보려고 덤벼드는 사람이다. 염라대왕 장부책에 적힌 대외비(對外秘)를 미리 훔쳐보는 일을 직업으로 택한 셈이니 이 어찌 고독한 직업이라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20년 가까이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고수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동안 갖다 바친 시간과 정력을 돈으로 환산하면 적은 액수가 아니다. 어림잡아 고급 외제차 한 대 값이 들어갔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어떤 분야든 살아 있는 고수를 만나야 안목이 열리는 법이니까.

    근래에 부산에 사는 박청화(朴靑花·38)라는 인물을 만났다. 나이는 필자보다 훨씬 아래지만 역술의 내공으로 따지자면 한참 선배다. 이 바닥에서 나이는 고려사항이 아니다. 오직 실력만이 중요하다.

    박씨는 부산에서 알아주는 역술가다. 5~6개월 전에 예약해도 그를 한번 면회하기가 쉽지 않다. 얼마 전 자살한 안상영 부산시장의 유품에서 그가 보아준 사주간명지(四柱看命紙)가 나왔고 안 시장의 유서에 ‘박청화 원장에게 감사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 언론의 취재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부산에서는 유명인사다. 만나보니 178cm 키에 체중도 80kg가 넘는 장부체격에 태음인같이 느긋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눈을 보니 안광이 남다르다. 화기(火氣)가 감돈다. 영기(靈氣)를 머금은 눈은 대개 화기가 있다.



    맹호가 함정에 빠졌으니…

    -작고한 안상영 시장의 사주가 어땠는가.

    “2004년 8월까지는 옥중을 벗어나기 어렵고 8월이 지나야만 돌파구가 생기는 운이었다. ‘맹호함지 팔월출문(猛虎陷地 八月出門)’, 즉 ‘맹호가 함정에 빠졌으니 팔월이 되어야 문을 나선다’는 의미다. 그때까지 참고 인내해야 한다고 조언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못해 참 유감스럽다.

    보통사람의 사주는 식신(食神)이 입고(入庫)하면 함정에 빠지지만 대인의 사주는 편재(偏財)가 입고(入庫)하면 함정에 빠진다. 식신은 먹을 것을 의미하고, 편재는 큰 재물 또는 활동공간을 의미한다. 보통사람은 밥 먹는 것만 보장되면 살지만, 큰 인물은 큰 재물이 있어야 사회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범인에겐 밥이 중요하고, 대인에겐 사회적 활동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것이 막히면 끝나는 것이다. 입고란 창고에 들어가서 갇힌다는 뜻이다.

    박정히 대통령이 서거한 해가 1979년으로 기미(己未)년이다. 박 대통령 사주는 경(庚) 일주인데, 경은 금(金)에 속한다. 금은 목을 극한다. 따라서 목이 재물이 된다. 목이 입고하는 해가 바로 미(未)년이다. 안 시장도 경 일주였다. 편재가 입고하는 해가 2003년 계미(癸未)년이었다. 결과를 놓고 보니까 2003년을 못 넘긴 것이다.

    운이 좋지 않을 때는 그저 묵묵히 견뎌야 한다. 그러려면 희망을 가져야 한다. 이 고비만 지나면 반드시 희망이 있다는 확신을 가질 때 인간은 참혹한 현실을 견뎌내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운명의 이치는 밤이 가면 낮이 오고, 낮이 가면 반드시 밤이 온다는 것이다.”

    칼잡이, 해머, 번갯불

    -나도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에 관심을 두고 공부를 시작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데, 시원치 않다. 나름대로 공부한다고 했는데 왜 실력이 늘지 않는가.

    “명리학 공부를 하는 데 세 단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단계는 ‘칼잡이’ 단계다. 여러 종류의 칼을 수집하는 사람이 칼잡이다. 부엌칼부터 회칼, 쌍둥이칼, 고기칼, 과도 등을 수집해서 주렁주렁 달고 다닌다. 양복 윗도리옷을 열면 안주머니 좌우로 칼이 즐비하게 꽂혀 있다. 마치 조폭영화에서 싸움을 전문으로 하는 조직원이 윗도리옷 단추를 열어 젖힐 때 장면과 같다. 명리학 이야기가 나오면 자기가 수집한 칼들의 효능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회칼을 내밀었다가 여차하면 독일제 쌍둥이칼을 내밀며 ‘칼의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어느 칼 하나 시원하게 고기를 자르지 못한다. 칼이란 일도양단(一刀兩斷)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절단할 수 없는 칼은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는 것 아닌가.

    여기서 말하는 칼은 각 문파 나름대로의 독특한 사주해석법을, 칼잡이는 각 문파를 순회한 사람을 일컫는다. 이쪽 선생에게 배우다가, 저쪽 선생이 나타나서 색다른 이론을 주장하면 순식간에 이쪽 선생을 버리고, 저쪽 선생 밑으로 붙는다. 몇 년간 그 선생과 문파에서 배우다가 또 다른 고수가 나타나면 다시 당적을 옮긴다. 그런 과정에서 여러 종류의 칼을 수집하게 되는데 문제는 칼만 많지 시원하게 자르지를 못한다는 점이다. 이게 칼잡이다. 칼잡이는 이론만 현란하다. 이론을 들어보면 ‘이 사람이 고수다’ 하는 느낌이 들지만, 실전에 들어가면 요리를 못한다.

    칼잡이 다음은 ‘해머’의 단계다. 그 동안 수집한 칼을 다 버리고 무게가 20kg이나 나가는 해머 하나만 달랑 어깨에 걸치고 다닌다. 해머의 특징은 한 방에 날린다는 점이다. 한 사람의 사주의 특징을 단숨에 읽어 내린다. 적중률이 70~80%에 달한다. 만약 칼잡이가 해머급과 만나 한판 붙는다면, 해머 한 방에 칼잡이의 칼은 모두 작살나고 말 것이다. 해머에 이르러야 진정한 프로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해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칼잡이 단계를 거쳐야 하지만 열심히 칼을 수집하다가도 어느 시기에 이르면 과감하게 칼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해머 다음 단계는 번갯불이다. 번갯불급은 언제 출수(出手)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전광석화 같이 빠르다. 순식간에 상대의 운명을 읽어버린다. 박도사(朴宰顯·1935~2000)의 전성기 시절이 바로 번갯불급에 해당한다.”

    -해머급만 되어도 어지간한 승부에서 밀리지 않는단 말인가. 현재 우리나라에 해머급이 몇 명이나 되는가.

    “밀리지 않는다. 어떤 고수하고 붙더라도 일방적으로 패하지는 않는다. 짐작하건대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해머급은 15~20명일 것이다. 해머급 역술인은 되어야 다른 사람의 사주팔자를 상담해줄 자격이 있다. 어설픈 칼잡이는 자기도 망치고 다른 사람도 망칠 수 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문자 이전에 대자연이 있었다’

    -당신도 칼잡이 단계를 거쳤을 터인데, 칼잡이에서 해머로 넘어간 과정에 대해서 설명해달라.

    “두번의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첫째 계기는 군대생활 중에 찾아왔다. 그 시절 나는 강원도 삼척의 맹방(孟房)이라는 곳에서 복무했다. 어느 날 밤 절벽 끝에 있는 초소에서 초병근무를 하다 동해안의 망망대해 위로 빛나는 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유난히 북두칠성이 눈에 들어왔다. 북두칠성은 시간대별로 그 위치가 변한다. 저녁 8~9시 무렵과 밤 12시 무렵의 위치가 전혀 다르다. 그날 이후로 초병 근무를 하면서 자주 북두칠성을 바라보았다. 물론 머릿속에서는 항상 사주 이론의 근간인 음양오행이란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2시에 북두칠성이 회전하면서 떠오르는 모습을 관찰하다가 ‘문자 이전에 대자연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자(文字)는 대자연의 운동을 옮겨놓은 것뿐인데 후학들이 문자로만 사주를 이해하려고 해 대자연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때가 1987년 7월이었다.

    사주를 제대로 보려면 이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를 들면 목을 나무로 이해하면 안 된다. 목은 위로 샘솟는 것이다. 목을 나무로 이해하면 문자에 붙잡혀 있는 단계이다. 목을 위로 샘솟는 성질로 인식하면 대자연의 이해방식에 해당한다. 금도 마찬가지이다. 금을 쇠붙이로 이해하면 문자 차원의 이해다. 금의 성질은 그 자리에서 내려가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목과 금은 위아래 방향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오행(五行)을 오원소(五元素)로 이해하면 안 된다. 행(行)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행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인다는 의미다. 즉 오행이란 대자연이 다니는 방식, 즉 펼쳐지고 솟아오르고 거두어지고 응축하는 방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22행을 생각하였다. 십간(十干)의 10개와 십이지(十二支)의 12개를 합치면 22개의 행이 나온다. 22행의 입장에서 보면 천간(天干)에 속하는 갑(甲)과 을(乙)은 지지(地支)에 속하는 인(寅)이나 묘(卯)와 그 성질이 완전히 다르다. 오행으로 따지면 갑과 을, 인과 묘는 모두 목에 속하지만, 22행의 차원에서 보면 완전히 다르다. 이걸 무시하고 모두 목으로만 이해하면 사주 해석에서 오류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때부터 나는 사주를 해석하는 데 있어 오행을 버리고 22행을 택했다.

    1991년에 또 한 번의 계기가 있었다. 명리학을 좀더 깊이 공부하려 경북 황간의 반야사(般若寺)라고 하는 조그만 암자에 머물러 있었다. 반야사 토굴에서 단식을 하면서 참선을 실행하고 있을 때였다. 비몽사몽간에 스님 복장을 한 선인(仙人)이 나타나서, 사주를 보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해 문답을 주고받았다. 그 문답에서 11가지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12번째 논법에서 중단되었다. 꿈속의 선인이 제시한 12번째 방법부터는 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파격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명리를 보는 안목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지금 생각해 보니 확실하게 해머급으로 진입한 계기였던 것 같다. 조금 건방지게 말하면 불패(不敗)의 자유를 얻은 셈이다.”

    無字는 명리 해석의 가장 큰 틀

    필자가 보기에 강호동양학의 3대 과목이 사주, 풍수, 한의학이다. 이 세 분야는 각기 다르면서도 서로 공유하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음양오행이다. 예를 들어 사주팔자에 금 기운이 많으면 의학적으로는 폐장이나 대장이 약할 수 있다. 이는 선천적인 약점이므로 이 부분을 후천적으로 보강해야 한다. 이런 대목에서 사주와 한의학이 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금이 많은 사람은 화(火) 기운이 필요하다. 풍수적으로 산세를 보면 금체의 산이 있고 목체의 산이 있는가 하면 토체의 산도 있다. 산세의 모양과 인간의 사주, 그리고 신체의 질병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세계가 음양오행이다.

    한국사람은 대부분 40대 중반을 넘어서면 왠지 모르게 이 분야에 관심을 갖는다. 먹고사는 데 정신 없다가 그 나이가 되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알고 싶어지기 때문일까. 그때부터 음양오행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음양오행은 이론을 공부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반드시 어떤 고비를 넘어야 한다. 그 고비를 넘으려면 일정기간 입산(入山)이나 면벽(面壁)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을 겪지 않으면 깊이가 없다.

    이 과정에서 대개 비몽사몽간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결정적인 내용을 알려주기 마련이다. 한 고개를 넘긴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꿈에 교시를 받는다는 것, 이는 어떤 의미인가.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 즉 무의식의 세계와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이를 ‘가피(加被)를 입는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정신세계로부터 받는 도움을 뜻한다. 의술을 공부하는 사람은 의술과 관련 있는 정신세계로부터 가피를 받고,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은 풍수와 연결된 정신세계로부터 가피를 받는다.

    사주도 마찬가지이다. 가피를 촉진시키기 위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주문(呪文)이다. 주문은 신들을 설득하는 소리이다. 반복해서 암송하면 반드시 감응이 있다. 문제는 가피를 입는 단계까지 도달하는 일이다. 여기까지는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다. 어떤 분야든 지극한 정성을 바치면 반드시 정신계로부터 감응이 있다. 박청화씨가 반야사에서 스님 옷을 입은 선인과 대화를 나눈 것은 이런 과정을 통과했음을 말한다.

    -11가지 논법을 주고받았다고 했는데,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소개해 줄 수 있는가.

    “첫째, 오행은 없고 음양만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명리학이 간지학(干支學)이라는 점, 셋째는 있을 것이 있어야 진짜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재물이 그 사람이 태어난 해에 있느냐, 시(時)에 있느냐에 따라 비중과 의미가 다르다. 태어난 해에 있으면 조상으로부터 재물을 물려받는다는 의미가 강하고, 시에 있으면 자기가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쟁취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넷째, 명리 해석에서 무자(無字)는 해석의 가장 큰 틀이다. 여자의 팔자에 불(火)이 없으면 모든 것이 늦어진다. 남편도 늦고, 재물도 늦고, 자식도 늦다. 불이 없다는 것 하나가 이처럼 그 사람 인생에서 중요한 작용을 한다. 역술가는 이 점을 정확하게 짚어내야 한다. 다섯째, 팔자를 볼 때 2초 이상 걸리면 아마추어이다. 프로는 2초 이내에 그 사람 팔자의 강약을 파악한다. 말하자면 한 큐에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래 들여다보고 있다고 해서 잘 보는 것이 아니다.”

    박도사·강태호·백포선생·무공선생

    -특히 부산에 역술의 고수가 많이 포진해 있는 것 같다. 부산의 역술 고수들에 대해 설명해달라.

    “부산에는 기문둔갑, 육임, 육효점, 상수점 등 각종 문파가 활동하고 있다. 자기 실력을 검증해보고 싶다면 일단 부산에 와서 제방의 고수들과 한판 승부를 겨뤄보라. 그러면 자기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다.

    앞서 말한 박도사도 지리산에서 공부를 마치고 부산에 와서 고수들과 진검승부를 벌였다. 그리고 나서 부산 서대신동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당시 박도사와 이론 논쟁을 한 사람들이 김홍기(金弘基)와 허남원(許南源)이다. 이 두 사람은 부산 최고의 명리 이론가다. 반면에 박도사는 이론이 상대적으로 약했지만 실전에선 전혀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주 모여 논쟁도 하고 승부도 벌이며 친해졌다. 부산의 명리 이론가인 이들이 박도사에게 뼈 있는 한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우리는 속아도 책에 속는다’. 비록 명리서에 나온 이론이 맞지 않더라도 책을 버릴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이론에 나오지 않은 방법으로 사주를 맞히는 박도사의 노선을 추종할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명리학자로서의 자존심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지금은 타계했지만 마산에 있던 강태호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는 ‘천기도수’라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부산 온천장 부근에서 영업했던 ‘동래 외팔이’도 유명했다. 그는 6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걸쳐 활동했다. 80년대 초에 숨진 박갑동은 풍수, 관상, 명리 3박자를 갖춘 인물이었다. ‘지리박사’라고까지 불렸다.

    그런가 하면 관상의 대가는 70대 초반으로 생존해 있는 백포(白浦) 선생이다. 부산의 연산로터리에서 영업하면서 70년대를 주름잡았다. 관상을 보는 구체적인 방법과 실전 노하우는 물론 역대 관상의 대가를 많이 알고 있다. 관상을 배우기 위해 전국의 내로라하는 대가들을 직접 섭렵했기 때문이다. 나도 초기에 백포선생에게 지도받았다. 현재 50대 초반으로 부산에서 서울을 왕래하면서 활동하는 무공(無空)선생도 있다. 무공의 특징은 간판을 걸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골 고객들을 중심으로 운영한다.”

    한국 역술계의 메카, 부산

    필자가 보기에도 부산은 한국 역술계의 메카다. 왜 부산이 역술계의 메카가 되었을까.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6·25 때 이북에 살던 사주의 고수들이 부산에 피난와서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대로 주저앉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이북 사람들은 지역차별을 받아서 벼슬길에 오르기 어려웠다. 실력이 있어도 등용이 안 되니 자연 실용적인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사주, 풍수, 한의학이 그런 분야였다. ‘사상의학’을 창시한 이제마도 이북출신이고, 한의사를 하면서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명저를 남긴 한동석도 이북출신이다. ‘우주변화의 원리’는 한글로 된 책이면서도 한문 원전이 가진 깊이를 지니고 있다. 한의학도들에게 이 책은 필독서로 통한다. 인문학을 깊게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회자되는 책이다.

    30대 유명역술가 박청화

    ①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역술업이지만 해마다 1000만원 이상 납세하는 큰 사업체로 성장했다.<br>② 부산의 케이블 TV방송국에서 사주명리학에 대해 강의하고 있는 박청화씨.<br>③ 청화학술원은 동양학 관련 전문 출판업도 겸한다.

    그런가 하면 사주학계에서 해방이후 최고의 명저라고 일컬어지는 ‘사주첩경’(총6권)의 저자 이석영도 이북출신이다. 일제시대에도 역술계의 고수는 이북에 많았는데, 이들이 부산에 피난을 내려오면서 역술문화를 이식한 것으로 보인다. 사주명리학의 상업화 계기도 부산의 영도다리 밑에서 비롯됐다. 생활이 어려웠던 이북의 사주 고수들이 영도다리 밑에서 돈을 받고 사주를 봐주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는 부산이 해방 이후 한국 최대의 항구도시였다는 점이다. 항구도시는 물동량이 많고 그만큼 자금이 활발하게 유통된다. 한 큐에 벼락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파도처럼 넘실대는 지역이다.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망할 수도 있지만, 풍어를 만나면 벼락부자가 될 수 있는 변수가 엉켜있는 곳이 항구도시다. 이렇게 변수가 많은 곳일수록 사람들은 운명과 운세를 의식하게 된다. 그래서 역술이 번창할 수밖에 없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에 걸쳐 중국 상해에 내로라하는 대륙의 역술가들이 모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유명한 역술가 웨이첸리(韋千里)가 상해 푸단(復旦)대학을 나와 상해에서 이름을 날린 것도 상해가 항구적인 역동성을 지닌 도시였기 때문이다.

    셋째는 불교와 관련이 있다. 비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전국 작설차 소비량의 50%를 부산이 차지한다고 한다. 작설차 소비량은 불교 신도 수와 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신도는 커피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지만, 불교 신도는 작설차를 좋아한다. 기독교는 사주팔자를 신앙에 위배된다고 해서 배척하지만 불교는 공존한다. 상대적으로 기독교보다는 불교 신도들이 사주를 많이 본다. 부산에 불교 신도가 많다는 것은 사주 인구도 많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사주 수요가 많은 부산에 공급(역술가)도 자연스럽게 뒤따른 것이다.

    화장터 연기의 가르침

    박청화씨는 어릴 때 부산 당감동에 살았는데, 하필 근처에 시신을 태우는 화장터가 있었다고 한다. 화장터 굴뚝에서 나는 연기를 바라보면서 그는 ‘사람은 왜 죽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인간의 운명은 무엇인가’란 의문을 품게 됐다. 중학교 때는 지리교과서에 나오는 태양과 지구, 태양계 행성 그림을 보면서 음양과 오행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집 근처 선암사(仙岩寺)에서 여름방학을 보냈다. 당시 선암사에는 93세의 노스님이 계셨는데, 이 스님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던 중 ‘인생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는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을 열심히 읽었다. 화장터 굴뚝의 연기를 보면서 자라난 그에게 ‘인생론’은 코드가 맞을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4년 아버지가 암에 걸리면서 그는 제대로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서울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중 우연히 만난 한의사를 통해 사주명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 후 이 분야의 책들을 밤새워가며 탐독했다. 그는 명리학 이론서에 쑥쑥 빨려 들었다.

    이런 과정이 결국 삶의 밑천이 되었다. 아버지의 암투병으로 졸지에 소년가장이 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역술업이었던 것. 1985년 말 학교 앞에 조그마한 간판을 달고 역술업에 나섰다. 약관 20세부터 자의반 타의반으로 프로의 길에 접어든 것. 그리고 군대에 갔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바닷가에서 밤하늘 별을 보면서 한 경지를 넘어섰다. 그는 역술을 통해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갔고, 동생들을 대학까지 가르쳤으며, 자신도 대학(부산대 사학과)을 마칠 수 있었다.

    생활비와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번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는 통에 입학한 지 10년 만에 졸업했는데 졸업할 무렵 결혼한 그는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직업인 역술업에서 손을 떼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그러나 여러 회사에 입사원서를 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낙방하였다. 조직에 소속되어 월급을 받을 팔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낙방을 거듭하다 보니 수입은 없고 지출만 있었다. 결국 부인 이름의 통장에 단돈 30만원만 남게 되었다. 부인이 “이제 이 돈밖에 없으니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사느냐”고 물었을 때 비장한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역술업에 컴백하는 일이었다. 처가에서는 사위가 전직 프로 역술가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코너에 몰리니 대안이 없었다.

    -통장에 단돈 30만원이 남았을 때 심정은 어땠는가.

    “작가 오 헨리의 ‘금고털이’가 생각났다. 그 소설에는 전문 금고털이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은 예전에 대단히 유명한 금고털이였지만 개과천선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 사람이 은행에 갔는데, 네댓 살바기 어린아이가 열쇠를 들고 은행 금고에 들어간 다음 안에서 문을 잠거버린 사고가 발생하였다. 오랜 시간 금고에 갇혀 있으면 아이가 질식사할 수도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이 금고문은 최고 수준의 안전장치가 설치되어 있어서 어지간한 전문가는 열 수 없었다. 미국 전역에서 이 금고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3명 밖에 없었는데, 공교롭게도 주인공이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대로 놔두면 아이는 죽는다. 그렇다고 내가 금고문을 열면 전직 금고털이였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된다.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망설이던 금고털이는 결단을 내린다. 금고문을 열기로 한 것이다. 아이의 생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30만원 남았을 때 내 심정이 그 금고털이 심정과 같았다. 처가 사람들이 깜짝 놀랐음은 물론이다. 궁지에 몰리니까 오히려 비장한 자신감이 생겼다. 그때가 1995년 4월이었는데 마침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있었다. 당시 내가 예언한 사람들이 대다수 선거에서 당선됐다. 그러자 선거가 끝난 후 사무실에 손님이 줄을 섰다. 영업 시간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였지만, 새벽부터 사람들이 문 앞에 와서 기다렸다. 그러자 문제가 발생했다. 새벽부터 사람들이 몰려드니까 동네가 시끄럽다는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반상회를 통해서 ‘제발 나가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1997년 동래구 온천 1동 대경빌딩 3층에 있는 지금의 사무실로 이사했다.”

    세금 1400만원 내는 법인 점집

    젊은 나이에 역술계에서 입신양명한 박청화씨. 이 세상에는 고시에 패스해 도달하는 입신양명도 있고 국회의원선거에 당선되거나 떼돈을 벌어 이루는 입신양명도 있다. 필자는 박씨를 보면서 역술을 통해서도 입신양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는 필자와의 대담을 통해 “역술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해 보았다”고 소회를 털어놓았다. “그것이 어떤 것이냐”고 물어보니 5가지를 꼽았다. 첫째, 손님 줄 세우기를 해보았다. 역술가들은 누구나 고객들이 점을 치기 위해 자기 가게 앞에 길게 늘어서는 장면을 보고 싶어한다. 둘째, 법인 점집이다. 온라인에는 법인화된 점집이 여럿 있지만 오프라인에서 법인 등록한 점집은 그가 운영하는 ‘청화학술원’이 전국에서 유일하다. 자본금 1억원으로 출판업을 겸한다. 2003년 봄 그의 회사가 납부한 세금만 해도 1400만원 가량. 점집이 세금을 1000만원 넘게 납부했다는 것도 기록이다. 셋째, 전문출판업이다. 그가 세운 청화학술원에서는 동양학 관련 책을 출판한다. 넷째, 방송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는 2년 가까이 부산의 케이블 TV방송국에서 사주명리학 강의를 하고 있다. 다섯째, 경제적 자유를 얻었다. 역술을 통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을 뿐 아니라 여윳돈도 어느 정도 벌었다. 지금 당장 문을 닫아도 먹고 살만큼은 된다. 이만하면 역학으로 성공한 인생 아닌가.

    無財는 大財의 씨앗

    이번에는 아주 고전적이면서도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평소 사람들이 사주를 연구하는 필자에게 많이 던지는 질문이다.

    -운명은 결정되어 있는가.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다. 단지 정해진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사주팔자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제약이지만, 그 제약 내에 무수한 선택이 있다. 내게 승용차를 선물한 기업인이 있다. 1995년 이 사람을 처음 보았는데, 사주를 보니 돈이 없는 팔자였다. 그래서 ‘사장님, 팔자에 돈이 있다고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내 팔자에 돈이 많다고 하는 소리는 못 들었다’고 대답했다. 사장의 명조는 기해(己亥)년 경오(庚午)월 신유(辛酉)일 무술(戊戌)시였다. 일주가 신(辛)이니 금이다. 금에 대해서는 목이 재물이다. 팔자 가운데 목이 하나도 없으니 재물이 없는 팔자인 것이다. 나는 ‘사장님은 무재(無財) 사주지만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역리로 따져볼 때 무재는 대재(大財)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롯데 신격호 회장이 무재 사주인데, 실제로는 재벌회장이다.

    이 사업가는 SK 기획실에서 근무하다가 1985년에 그만두고 10년 가량 제조업을 했다. 그러나 번 돈은 없었다. 그래서 돈 버는 이치에 대해 몇 가지를 코치했다. ‘첫째, 가장 가난한 모양을 만든다. 둘째, 다시 채우기 시작한다. 셋째, IMF 때 대박이 터진다.’ 우선 자기 명의로 사업을 못할 정도로 만들었다. 미리 가난을 당긴 것이다. 바닥을 친 다음엔 채워지기 시작하는 것이 이치이다. 이후 그 사람은 수십억원을 벌었다.

    그후 1998년 겨울 그가 나를 다시 찾아와 정말 가지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잘 되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한 사람이 수백명이다. 그렇지만 차 한 대 사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만약 그들이 모두 차를 사줬다면 이 공터가 주차장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사장은 정말로 내게 차를 한 대 선물하였다.

    이 사람이 무재 사주를 바꿀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는 의지가 있었다. 의지가 강한 사람은 눈빛이 강하다. 눈빛이 강한 사람에게는 방법을 알려준다. 실천을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무재이기 때문에 대재(大財)를 쥘 수 있었다. 마음을 비울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셋째는 팔자에 겁재(劫財)가 있었다. 일주와 같은 오행이면서 음양이 다른 것이 겁재에 해당한다. 겁재란 나의 재물을 뺏앗아가는 흉신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재벌의 팔자엔 대개 겁재가 있다. 넷째는 본질에 근접한 질문이 나올 때만 해답을 준다. 간절하지 않으면 대답을 줘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사장은 이런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대안을 제시해준 것이다.”

    -이번에는 바꿀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설명해달라. 그런 예가 있는가.

    “분론(分論)이라는 것이 있다.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한 제조업자가 부산의 사상공단에 전세를 들어 조그마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비좁고 먼지 나는 곳에서 제조업을 할 때는 돈을 좀 벌었다. 돈을 버니 통째로 전세를 냈고 사업도 잘 됐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건물 자체를 구입했다. 그러자 부도가 났다. 그후 그는 경기도 화성의 한 시골에서 ‘유황오리알’ 사업을 했다. 볼품없는 허름한 장소에서 유황오리를 키우면서 오리알을 내다 팔았다. 구질구질하고 똥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의 팔자는 더럽고 구질구질한 곳에서 사업을 해야만 돈이 벌리는 운명이었다. 폼이 나는 곳에서 사업을 하면 부도가 난다.

    그가 태어난 날이 무인(戊寅)일이다. 신(申·食神)이 공망(空亡)에 해당한다. 식신은 베푸는 기질을 뜻한다. 공망은 속된 말로 ‘꽝’이라는 뜻이다. 즉 식신이 공망되었다는 것은 폼 나게 베푸는 기질이 꽝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식신이 공망에 해당되는 팔자는 먼지 날리는 곳, 구질구질한 곳, 자기 건물보다는 전세 등 폼이 안 나는 곳에서 사업을 해야 하는 운명이다.

    그는 유황오리를 키워서 그 알을 서울의 유명 백화점에 납품했고 돈을 꽤 많이 벌어 재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호주머니에 돈이 10억 정도 들어오니 오리 똥이 역겹게 느껴졌다. 이제는 깨끗한 곳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를 찾아와 상담을 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무조건 깨끗한 곳에서 하면 망한다. 왜냐하면 분수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마다 자기 분수라는 것이 있다.”



    나는 박청화씨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화엄경’의 하이라이트인 ‘입법계품(入法界品)’을 생각했다. 이 세상 모든 분야에는 인생의 가르침이 있다. 남들이 천시하는 직업인 역술가의 길에 들어서 자기를 세우고 가족을 건사한 인간, 뿐만 아니라 물에 빠진 사람에게 때로는 지푸라기를, 때로는 밧줄을 던져주는 한 인간을 보면서 ‘세상사의 귀(貴)와 천(賤)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물음을 되던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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