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호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구부야 구부 구부가 눈물이 난다”

  •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입력2004-06-02 10: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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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이란 참 묘하다. 어제 본 산이 오늘 또 다르다. 가는 곳마다 펼쳐지는 역사와 사연도 참 구구하다.
    • 백두대간을 타는 이들의 사연과 이유도 저마다 다를 터. 헌데 산을 좋아하는 이들은 왜 이리도 맘이 여유로운지. 산에서 오가다 만난 이들과 산벚꽃 향내 짙은 야외에서 동동주에 취하다 보니 어느덧 하루가 저문다.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구부야 구부 구부가 눈물이 난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미술사학자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 유명해진 이 문구는 본래 조선 정조시대의 문인 유한준이 지인 김광국의 수장품에 부친 글이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이 무언가에 열정을 쏟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일정한 반열에 오르고, 그 중 일부는 남들이 범접하기 힘든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쉽게 말해 ‘도사’가 되는 것이다.

    산에도 도사가 있다. 백두대간을 걸으면서 가끔씩 그렇게 느껴지는 사람을 만나곤 한다. 그 중에는 보통사람이 사흘 걸려 지나갈 코스를 반나절에 내치는 속보형이 있는가 하면, 수년간에 걸쳐 대간을 유람하며 풍류를 즐기는 스타일도 있다. 육상에 비유하자면 전자가 스프린터고 후자는 마라토너에 가깝다. 이 밖에도 같은 코스를 무수히 오르내리며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조망의 즐거움(청림문화사)’이라는 책을 펴낸 김홍주 선생이 이런 경우일 듯하다.

    사람들은 대개 산 정상에서 주변의 산을 바라보는 데 그친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면 가까운 산들의 이름을 새겨보고 큰 산을 중심으로 지맥을 살펴보는 재미에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의욕에 그칠 뿐, 실제로 이 과정을 제대로 밟기는 매우 어렵다. 산에 오를 때마다 날씨가 맑은 것도 아니고, 어렵게 정상에 서더라도 산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지도의 그림과 다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꾼들은 ‘아마도 저 산이 그 산일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만 갖고 산을 내려오곤 한다.

    일반적으로 산 정상에 올라 맑은 상태에서 주변 풍광을 보고 싶다면 춥거나 비온 뒤 새벽에 산을 타야 한다. 겨울철 산에 올라본 사람은 추위 때문에 사진기를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김홍주 선생도 이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산에서는 정말 묘한 일이 자주 벌어진다. 어떤 날에는 선명하게 보였던 산이 어떤 날에는 전혀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산의 전망을 정확하게 그리려면 적어도 예닐곱 번은 올라서야 한다.

    김홍주 선생은 수년간에 걸쳐 이런 작업을 했다. 때로는 이틀 동안 한 끼도 먹지 못했다. 그런 고행 끝에 31개의 명산 위에서 산세를 살피며 찍은 사진이 무려 1만여장. 산꾼들은 김홍주 선생의 노력 덕분에 소백산에서 무려 120km나 떨어진 지리산까지 조망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리게 됐다.



    자전거 도시 상주의 풍경

    4월16일 오후, 안양에서 상주행 직행버스를 탔다. 버스는 충주를 지나 문경 점촌에 정차한 뒤 상주를 향해 달렸다. 차창 밖으로 흐드러지게 핀 복숭아꽃과 배꽃이 끝없이 펼쳐졌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한 과수원 길로 이따금씩 농부가 경운기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저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농촌의 노인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날 것이고, 경쟁력을 잃은 나무는 차례대로 베어질 것이다. FTA(자유무역협정)는 한편으로 새로운 수출길을 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농민들의 주름살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과연 우리에게는 농촌의 시름을 덜고 도농간 거리를 좁히고 나눔의 미덕을 발휘할 수 있는 묘안이 없는 것일까.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구부야 구부 구부가 눈물이 난다”
    ‘자전거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상주시 초입부터 거대한 ‘자전거 부대’가 눈에 들어왔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 시장바구니를 싣고 가는 아주머니들, 터미널에서 자전거로 환승하는 사람들….

    상주시가 자전거 도시로 등장한 데는 지형적 요인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상주는 도로교통이 발달하기 이전, 낙동강 물줄기의 길목으로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상주사람들은 일제시대부터 낙동강을 타고 들어온 일제 자전거를 접할 수 있었다. 여기에 상주의 지형이 경사도 5도 미만의 완만한 분지형이다보니, 자전거는 일찌감치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었다. 1920년대에 상주역 전국자전거경주대회에 당대의 국민영웅 엄복동 선생이 참가한 사실에서 상주와 자전거의 오랜 인연을 엿볼 수 있다.

    예로부터 상주는 곶감과 누에고치 그리고 삼베로 유명해 ‘삼백(三白)의 도시’로 불렸다. 하지만 요즘 상주사람들은 여기에 ‘은륜(銀輪)’을 더해 ‘사백의 도시’라고 말한다. 실제로 상주는 가구당 평균 2대의 자전거를 보유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선진국 수준에 육박한다. 상주시에서는 자동차가 자전거를 피해 운행하다 보니 교통사고 발생비율이 낮다. 자전거 세워둘 공간이 부족해 자전거 통학을 제한하는 학교도 있다.

    ‘자전거 여행’으로 유명한 소설가 김훈 선생은 자신의 ‘애마’ 자전거를 ‘아날로그의 순수성을 간직한 채 걷기의 원시성을 극복한 도구’라고 평한 바 있다. 실제로 수만 명이 자전거를 타고 저마다 생활터전으로 나서는 상주의 아침 풍경을 보면 그말이 실감난다.

    17일 새벽 상주시 화북에서 택시를 타고 늘재로 붙었다. 택시기사는 화북면에서 식당을 운영하는데, 백두대간 종주자를 만나면 집에서 재워주기도 한단다. 그 이유를 물으니 “백두대간 타는 사람이라면 믿을 만하기 때문”이라는 것. 산꾼의 마음을 믿고 방을 내준다는 얘기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밥까지 챙겨준 택시기사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구부야 구부 구부가 눈물이 난다”

    문경새재 조곡폭포.

    처음부터 가파른 오르막이다. 20여분 걷다 보니 쉬어갈 만한 곳이 나왔다. 그곳엔 제법 품위를 갖춘 표석 하나가 서 있었다. ‘정국기원단(靖國祈願壇)’. 말 그대로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기원한다는 뜻이다. 땀을 닦고 천천히 숨을 고른 뒤 표석 앞에 서자 이곳이 새롭게 보였다. 무엇보다 표석 앞쪽으로 펼쳐진 속리산 주능선이 아름답고, 표석을 양쪽에서 살포시 껴안듯이 감싸고 있는 소나무가 편안해 보였다. 자세히 보니 표석에는 ‘백두대간 중흥지, 백의민족 성지’라는 문구도 새겨져 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산세와 지형을 헤아려 표석을 세웠다.

    청화산(984m) 정상에 이를 즈음 동쪽 하늘에서 해가 쑥쑥 치솟았다. 언제나 느끼는 일이지만 해가 떠오르는 건 순식간이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 보면 어둠이 빛으로 변하는 순간을 놓치기 쉽다. 천지만물은 바로 이 순간 온 몸으로 빛을 빨아들이고 생기를 돋운다. 청화산 정상에서 바라본 들녘의 봄은 이미 무르익었지만, 산중의 봄은 이제 한창이다. 소나무 사이의 공간을 붉게 물들인 진달래꽃이 더없이 반갑다. 청록과 진분홍이 이처럼 어우러지는 장면이 또 어디에 있을까?

    청화산은 대야산(930.7m) 희양산(998m)과 함께 속리산-문경새재 구간을 빛내는 명산이다. 청화산은 대야산이나 희양산에 비해 산세가 부드럽고 난코스도 없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청화산 정상은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선이자, 상주와 문경의 갈림길이다. 여기서 오른쪽을 내려다보면 원적사라는 절이 나온다. 신라 무열왕 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절로 불교계에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수도처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987년에 새롭게 지어진 것이다.

    청화산에서 갓바위재로 넘어가는 능선은 가벼운 산길이다.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 편안하게 달려갈 수 있다. 간간이 암릉구간이 나타나지만 그다지 길지 않아 부담 없이 내칠 수 있다. 갓바위재 못미쳐 우뚝 솟은 봉우리에서 아래쪽을 내려보니 산자락을 뱀꼬리처럼 휘감은 길이 보인다. 어찌 보면 한반도 지도의 남쪽 모양과도 닮았다. 백두대간 주변에는 이처럼 기이한 형태의 길이 두루 펼쳐져 있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저 길까지 모두 밟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땀 속에서 꿈과 희망을

    갓바위재를 지나치면 왼쪽으로 멀리 의상저수지가 보인다. 충북과 경북의 도계가 그 위를 지난다. 이곳에서 암릉을 기어오르면 바로 조항령(961.2m)이다. 이곳은 조망이 뛰어나 남으로 청화산, 북으로 대야산을 훤하게 감상할 수 있다. 산꾼들이 이런 자리를 그냥 두고 갈 리 없다. 정상의 표지석에 씌어진 한 줄 문구가 나그네의 피로를 거뜬히 풀어준다. ‘백두대간을 힘차게 걸어 땀 속에서 꿈과 희망을…. 아아! 우리의 산하!’.

    백두대간은 조항령 북쪽으로 바위능선을 타고 뻗기 직전 뾰족한 바위들을 뿌려놓았는데, 이곳은 마귀할미통시바위로 알려져 있다. ‘통시’는 화장실을 뜻하는 영남지방의 사투리. 따라서 마귀할멈이 드나드는 변소처럼 으스스할 것 같지만 경치는 구김살없이 시원스럽다. 여유가 있다면 마귀할미통시바위 옆에 있는 손녀통시바위까지 둘러볼 만하다.

    이밖에도 조항령에서 고모령을 넘는 길에는 다양한 모양의 바위가 줄지어 비경을 이루고 있는데, 옛날 호랑이가 살았다는 집채바위와 제법 품위 있게 통과할 수 있는 대문바위 등이 눈길을 끈다. 옥의 티라고나 할까. 이 좋은 터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이 있으니, 마구 파헤쳐진 채석장이다.

    고모령에서 밀재까지는 완만하게 올라섰다가 급하게 떨어진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걸으면 머지않아 밀재에 닿는다. 이곳에서부터 대야산 산행이 시작된다. 대야산은 바위산이라 할 만큼 암릉구간이 많다. 특히 대야산을 넘어 버리기미재로 가는 길에서는 상당한 체력소모를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대야산 정상에서 충분히 휴식하는 게 좋다.

    대야산 정상에서 지도를 꺼내놓고 동서남북을 번갈아 바라보며 산세를 살피는데, 중년 남성 네 명이 가파른 북벽을 넘어 산 위로 올라섰다. 얼른 보아도 어지간히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 같았다. 그 중에는 네 번째 대간을 종주하고 있다는 분도 있고, 오랫동안 골프에 빠져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종주대에 합류한 사람도 있었다. 무엇보다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관심사가 다른 그들이 대간을 걸으면서 두터운 친분을 쌓고 있다는 점이었다.

    산에서 만나는 인연은 넘칠 때보다 모자랄 때가 많다. 얘기를 좀더 듣고 싶어도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고, 깊은 마음을 드러내자니 상대방이 여러모로 신경 쓰인다. 그래서 꼭 붙들고 싶은 사람이라면 하산길에 술 한잔을 청하곤 하는데, 이번처럼 마주보고 달리는 경우엔 그마저도 어렵다. 서로의 안부를 기원하며 돌아설 수밖에. 4인의 종주대는 떠나기에 앞서 필자에게 대야산-촛대봉 구간의 난코스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대야산의 바위에 취한 필자는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들이 대야산을 내려오는 길목에선 조심하라고 왜 그토록 일렀는지 나중에야 실감할 수 있었다. 급한 내리막길에 나뭇가지마저 여의치 않아 미끄럼을 타야 했고, 밧줄로 오르내리는 길에서도 머리칼이 쭈뼛 서는 순간을 수차례 맞았다. 특이한 것은 맨 몸으로 올라서기도 힘겨운 자리에 줄줄이 늘어서 있는 무덤이다. 누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묻었고, 또 무슨 이유로 무덤이 닳고 닳아 등산로와 높이가 같아지도록 방치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일단 촛대봉을 넘어서면 한숨을 돌릴 수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불란치재를 지나 옛날 곰들이 넘어 다녔다는 곰넘이봉을 통과하면 버리미기재가 나온다. 이곳은 충북 괴산과 경북 가은을 연결하는 913번 도로가 지난다. 아스팔트길을 따라 가은쪽으로 3km쯤 걸어가니 대형 주차장이 나오고, 그 밑으로는 경북지방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산비탈밭농사지대가 펼쳐진다. 필자가 이곳을 지날 즈음 본격적인 농번기를 앞두고 각양각색의 허수아비가 늘어서기 시작했는데, 특히 녹색 치마에 검은 머리까지 늘어뜨린 여인허수아비가 압권이었다.

    완장리 마을까지 내려와 오른편 벌바위 쪽으로 10분쯤 올라가면 유명한 식당이 하나 나온다. 백두대간 종주자들에게 잘 알려진 돌마당식당이다. 식당주인 심만섭씨는 20년 전 우연히 대야산을 등반했다가 산세에 반해 전 재산을 털어 대야산 밑에 정착했다. 그는 수석과 조경에도 조예가 깊어 식당 구석구석을 다채롭게 꾸며놓았다. 필자는 식당 입구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바로 대야산 정상에서 아쉽게 헤어졌던 아저씨들이었다. 그들은 연배가 한참 낮은 필자를 기꺼이 술자리에 끼어주었다. 산벚꽃 향내 짙은 야외에서 동동주에 취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백두대간의 사리’

    18일 새벽. 서둘러 대간에 붙으려 하는데 식당 주인은 “여기까지 와서 선유동을 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며 자신의 차로 필자를 안내했다. 선유동은 흔히 대야산 서쪽, 그러니까 충북 괴산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문경사람들은 대야산 동쪽을 선유동이라고 부른다. 과연 선유동은 고금의 풍류객들이 감탄할 만한 곳이었다. 시간이 없어 입구만 둘러봤는 데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특히 계곡의 바위와 연분홍빛 산벚꽃의 궁합이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문경 선유동에는 곳곳에 음각한 글씨들이 보이는데, 지역주민들은 이것이 고운 최치원의 작품이라고 믿고 있다.

    버리미기재에서 식당 주인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장성봉(915.3m) 쪽으로 올라섰다. 긴 오르막이지만 경사는 그리 급하지 않다. 장성봉부터는 고만고만한 능선이 이어졌다. 왼편으로 막장봉(887m)을 보내고 조금 더 가니 쉬어갈 만한 바위마당이 나왔다. 그냥 달릴 수도 있는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한 이유는 절벽의 묘한 풍경 때문이었다. 말라죽은 나무는 대부분 흉물이 되기 십상인데, 이 물건은 고고한 자태를 잃지 않았다.

    바위산장에서부터는 빠르게 내칠 수 있는 구간이다. 비슷한 높이의 봉우리를 서너 개 넘어서면 오른쪽으로 악휘봉(845m)이 보이고 왼편 아래쪽으로는 은티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부터 희양산 자락이다. 희양산은 유명세에 비해 직접 오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사방이 바위로 둘러싸인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불교계에서 접근을 적극적으로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희양산에는 한국불교 조계종 총무원의 특별수도원인 봉암사가 있는데, 석가탄신일에도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도량이다.

    신라 헌강왕 5년(879) 지증도헌국사가 창건한 9산 선문 중의 하나인 봉암사는 한국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한국불교는 조선시대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안팎으로 큰 상처를 입는데, 1947년 성철스님 주도로 청담, 자운, 월산, 혜암, 법전스님 등이 봉암사에 모여 “부처님 법답게 살자”며 쇄신의 깃발을 치켜들었다. 한국불교의 역사를 바꾼 봉암사 결의가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이런 까닭에 백두대간을 순례하며 한국불교의 발자취를 더듬은 윤제학 선생은 봉암사를 가리켜 ‘백두대간의 사리’라고까지 칭했다.

    희양산과 은티마을이 갈라지는 곳에는 재미있는 낙서가 하나 있다. ‘소인은 못갑니다. 산꾼만 가십시오.’ 이 말을 이해하려면 희양산 품으로 좀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스님들은 봉암사로 이어지는 길목마다 고대전투에서나 볼 수 있던 목책을 둘러쳤다. 또한 희양산 정상으로 가는 중턱에는 온종일 스님들이 당번을 서고 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희양산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스님들도 백두대간 종주대에게는 예외적으로 통행을 허용해 왔고, 산꾼들도 스님들께 누를 끼치지 않고 지나가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혹시라도 희양산 도량에서 스님들을 만난다면 이렇게 예를 갖추길 바란다. “스님, 성불하십시오.”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구부야 구부 구부가 눈물이 난다”

    청화산 중턱의 정국기원단. 멀리 속리산 주능선이 보인다.

    은터재를 넘어 구왕봉으로 가는 길에서는 이곳이 봉암사 도량임을 자연스럽게 확인할 수 있다. 등산로를 막아놓은 목책과 노끈이 거친 방식으로 경계심을 심어준다면, 봉암사 주지스님의 이름으로 써놓은 문구는 중생의 욕심을 완곡하게 달래준다.

    “일체중생이 번뇌 틀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으니 출가인은 이에 분발하여 사람마다 본래 구족한 불성을 바로 보아 사람과 천상이 스승됨이라. 이곳은 그와 같은 스님들이 수행하는 청정도량이므로 현명하신 여러분께서는 양지하시고 출입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구왕봉에 올라서자 연한 오렌짓빛 희양산이 성큼 다가왔다. 산 전체가 큰 바위 형상인데 바위틈에 뿌리박고 자라난 소나무들이 그 운치를 더해준다. 구왕봉에서 20여m쯤 내려서면 오른쪽으로 희양산 골짜기를 감상할 수 있다. 희양산에서 뻗어나간 산줄기가 힘을 다하고 숨을 고르는 지점에 바로 봉암사 도량이 있다. 멀리 청정도량을 바라보며 ‘나는 무엇 때문에 백두대간을 타는가’라는 화두를 부여잡고 자문자답하는 사이 산중의 저녁이 빠르게 찾아오고 있었다.

    4월24일, 충주에서 연풍을 거쳐 은티마을로 향했다. 충주와 문경을 잇는 3번 국도를 지나는 동안, 택시기사는 지역경제의 퇴보를 아쉬워했다. 문경탄광과 충주비료공장이 활발하게 가동하던 시절 3번 국도는 전국에서 가장 번잡한 도로 가운데 하나였지만, 지금은 1시간을 기다려야 직행버스 한 대가 다닐 만큼 한산한 길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필자는 택시 기사의 푸념을 한 귀로 흘려보내면서도 그의 어감에 묻어나는 충청도 특유의 소박함과 어눌함을 정겹게 느꼈다. 아마도 충주가 배경인 임순례 감독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진한 감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생이 함부로 넘어설 수 없는 희양산 도량을 통과하면서 필자는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새벽에 지나가자는 것이고, 둘째는 청정도량에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희양산 구간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빗물을 잔뜩 머금은 희양산의 바위를 기어오르면서 저절로 새나오는 신음소리를 자제하지는 못했다. 백두대간 주능선에서 살짝 비켜서 있는 희양산 정상의 풍광에 반해 터져나온 감탄사도 끝내 지키지 못한 나와의 약속이었다.

    희양산 정상에서 지름티재로 돌아 나와 북쪽으로 걷다 보면 오래된 성터가 보이는데, 이곳은 신라시대의 희양산성이다. 삼국시대의 역사에서 한강 유역은 각국의 흥망에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따라서 경주가 근거지인 신라의 처지에서 보자면, 문경-상주라인이 한강으로 가는 교두보였고 희양산성도 전략적 요충지에 속했을 것이다.

    성터를 지나면 시루봉(914.5m)이 보이고 이곳에서부터 백두대간은 동으로 길게 흘러갔다가 그 길을 되돌아 북서쪽의 이화령 쪽으로 빠져나간다. 종주자로선 빤히 바라다보이는 이화령을 두고 길게 휘돌아 걷는 셈이다. 도중에 이만봉(989m) 백화산(1063.5m) 황학산(910m) 등 꽤 높은 산들을 통과하게 되지만, 백화산 구간을 빼면 경사가 그리 심하지 않아 부담 없이 지날 수 있다.

    황학산을 지나면 간벌지대가 나타나고 여기서 왼쪽으로 휘었다가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경운기가 다닐 정도의 넓은 길이 열린다. 이곳은 좌우로 침엽수가 길게 뻗어 있고 바닥에는 풀들이 알맞게 자라고 있어 삼림욕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조금 더 걸어가니 넓은 길은 오른편 각서리 쪽으로 빠지고 대간은 오솔길로 변한다. 길은 조금 좁아졌지만 혼자 산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군데군데 군사훈련을 위해 만들어놓은 진지와 이동통로를 지나 산허리를 오른편으로 휘감아 돌아서면 이화령 고개가 나온다. 이화령은 1925년 신작로가 개통되면서 경북과 충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 됐는데, 최근 이화령터널이 뚫리면서 산꾼이나 들러가는 옛 고개로 바뀌었다.

    조령샘물에 목 축이는 길손이시여

    문경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다. 시내 곳곳에 옛 모습이 간직돼 있는가하면 외곽에 우후죽순처럼 러브호텔이 들어서 있다. 문경이 이처럼 달라진 결정적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세트가 문경새재도립공원에 들어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 이 지역에 온천이 개발된 탓이다. 결국 문경의 변화는 내부의 필요성보다는 타지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필자는 신용카드가 통용되지 않는 시내의 장급 여관과 너무 비싼 외곽의 러브호텔 중 그 어느 쪽에서도 숙소를 구하지 못하고, 결국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허름한 여인숙에 짐을 풀었다. 문경탄광이 번성하기 전부터 문을 열었다는 이 여인숙은 아직도 연탄을 때고 있었다. 그 이유를 묻자 여인숙 주인은 가슴 뭉클한 세월의 변화를 털어놓았다.

    “광부들한테 하룻밤에 600원씩 받은 돈으로 4남매를 대학까지 보냈습니다. 탄광은 사라졌지만 그 사람들까지 잊어버릴 수는 없잖아요.”

    4월25일 새벽, 택시를 타고 이화령으로 향했다. 날이 밝으려면 1시간 정도 더 기다려야 했지만, 등산로에는 일찌감치 야간산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화령-문경새재 코스의 첫 번째 고개인 조령산(1026m)까지는 8부 능선을 길게 돌아서 올라간다. 도중에 목을 축일 수 있는 조령샘이 나오는데, 물맛보다도 이곳에 붙어 있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조령샘물에서 목을 축이는 길손이시여! 사랑 하나 풀어 던진 샘물에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그대 넋두리가 한 가닥 그리움으로 솟아나고….’

    조령산에서 신선봉(937m) 923m봉을 지나 문경새재(조령)로 가는 길은 호쾌한 바위능선이다. 속리산의 천황봉-문장대 암릉이 부드럽게 안기는 맛이라면 문경새재는 질기게 씹히는 느낌이다. 그래서 쉴 새 없이 오르내리다 보면 진이 다 빠진다. 하지만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보는 문경땅의 풍광은 수고로움을 달래주고도 남는다. 이 구간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는 뭐니뭐니해도 문경새재의 지형적 특성이다. 울창하게 둘러친 바위와 숲속에서 통로라고는 조령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문경새재를 천혜의 요새라고 부르는 이유다.

    너무도 유명한 일화지만 문경새재는 조선왕조의 운명을 바꿔놓은 곳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고시니 유키나가는 부산에 상륙한 뒤 한양을 빠르게 공략하기 위해 문경새재로 진격해 경주에서 북상하던 가토 기요마사의 군사와 합류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문경새재의 험준한 지형을 확인하고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이때 조선의 신립 장군은 문경새재에서 싸우기에는 시간이 늦었다고 판단하고, 충주의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쳤다가 전멸했다.

    물론 왜군이 파상공세를 퍼붓던 당시 상황에서 신립 장군의 전략이 일방적으로 판단착오였다고만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왜군조차 겁을 먹었던 문경새재를 조선군이 전혀 활용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문경새재의 성곽은 한마디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만들어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충주의 의병장 신충원은 오늘날의 문경새재 제2관문에 성을 쌓고 왜군을 기습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그러자 조정에서도 뒤늦게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을 감안해 제1관문(주흘관) 제2관문(조곡관) 제3관문(조령관)으로 이어지는 3중 관문을 설치한 것이다.

    문경새재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으나 가장 유력한 것이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이다. 이밖에도 풀이 우거진 고개(草岾), 새로 생긴 고개(新재), 이화령 사이의 고개(사이재) 등으로 해석한 문헌도 존재하지만, 조령(鳥嶺)에서 새재라는 말이 나왔다고 보는 의견이 우세하다. 새재는 군사적 요충지 말고도 영남의 한양진출 통로라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조선 중기부터 영남의 사림파들이 하나둘씩 조정에 출사해 정권의 핵심세력으로 등장하는데, 이들이 한양을 오갈 때 넘었던 고개가 바로 새재다.

    ‘진도아리랑’에 웬 문경새재?

    문경새재 제3관문에서 제2관문을 거쳐 제1관문으로 내려서는 길은 문화탐방 코스로서 손색이 없다. 제3관문 바로 밑의 금의환향길, 장원급제길, 책바위 등에선 조선시대 영남지방 선비의 꿈을 엿볼 수 있고, 제2관문 주변 소나무 숲의 송진 채취용 V자 홈에서는 일제의 수탈 흔적을 확인할 수 있으며, 제1관문 안쪽에 자리잡은 KBS 세트에서는 고려시대 민초의 생활양식을 관찰할 수 있다. 조선시대 영남감사가 관인을 주고받았던 교구정터, 과객이 쉬어갔던 주막, 문경의 역사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는 박물관 등이 모두 이곳에 있다. 등산로 바로 옆에서 시원하게 물줄기를 떨어뜨리는 25m 높이의 3단 조곡폭포, 차를 끓이면 더욱 맛이 깊어진다는 조곡약수터도 쉬엄쉬엄 들러갈 만한 곳이다.

    문경새재가 조선시대에 얼마나 유명한 장소였는지를 짐작케 하는 사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호남지방의 민요 ‘진도아리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를 통해 너무나도 유명해진 ‘진도아리랑’의 첫구절은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 구부가 눈물이 난다’로 시작된다. 호남의 끝 진도지방의 노랫말에 왜 문경새재가 끼어든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별곡이다. 진도 총각이 경상도의 대갓집에서 머슴을 살다가 주인집 딸과 정분이 났고, 그 사실이 발각되자 고향인 진도로 도망쳐 살았는데 안타깝게도 총각은 병들어 죽고, 홀로 된 경상도 여인이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진도총각을 따라 문경새재를 넘던 설움을 노래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호남의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청운의 꿈을 품고 문경새재를 넘었으나, 시험에 낙방하자 신세를 한탄하면서 부른 노래라는 설이다.



    지역차별이 극심했던 조선시대에 호남 출신이 과거에 급제한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실제로 과거 합격자의 절반은 영남 출신이었고, 나머지는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가 차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호남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장원급제자들이 자주 넘었던 새재로 향한 것이 아니었을까. 새재보다 가까운 추풍령을 넘자니 추풍낙엽의 악몽이 떠올랐을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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