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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생각

라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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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여의도광장으로 롤러스케이트나 자전거를 타러 다니던 아이들 사이에서 ‘컵라면’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만 부으면 바로 익혀 먹을 수 있다는 컵라면을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와 맛을 보았다. 그때는 라면 용기가 컵이 아닌 사발 모양으로 나와 ‘사발면’이라고 불렀다. 통학 시간만 왕복 세 시간이 걸리던 학교까지 오면 점심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배가 고팠다. 매점에 비치된 보온통의 물은 늘 미지근했다. 그 물에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다가는 수업 시작종이 울리기 일쑤였다. 설익은 라면맛을 혀가 기억하고 있다. 라면은 면발도 중요하지만 역시 국물맛과 냄새가 한몫을 한다고 생각한다.

1980년대 후반, 이른바 라면 우지(牛脂) 파동으로 나라 안이 들썩였다. 라면을 튀기는 기름으로 공업용 쇠기름을 사용했다는 익명의 투서가 날아들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 때문에 1963년 처음 라면 시장에 뛰어들어 승승장구하던 라면 회사는 이후 부진을 면치 못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 회사의 무죄가 밝혀졌지만 이미 다른 회사에 시장의 주도권을 내준 뒤였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라면은 반으로 부러뜨려 끓이지 않아도 되었다.

라면의 원조국이라는 일본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라면집이었다. 삿포로, 오사카, 도쿄의 라면집에서 ‘라멘’을 맛보는 동안 ‘역시 라면은 우리 라면이 제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우리 라면이 인기가 있어 슈퍼마켓에서 심심찮게 그것을 볼 수 있다. 비상용으로 가지고 간 라면 한 봉지를 유스호스텔에서 만난 일본인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때 생각은 하기도 싫다고 한다. 이집 저집 다 처지가 어렵던 터라 자식을 맡기면서도 친척들은 쌀은커녕 돈 한 푼 보태주지 않았다. 어머니 허리만 휘었다. 우리집을 거쳐 간 사촌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져 가정을 꾸렸다. 사촌 중의 한 명은 매일 라면만 주는 것이 질렸는지 어머니에게 밥과 반찬 좀 달라고 투정을 부렸다고 했다. 고향 여행길에 그 사촌을 만났는데, 그 시절을 돌이키며 감사하다면서 용돈을 내놓더라고 했다.

라면을 먹던 시절, 라면으로 부족해서 한 사촌은 기름기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퇴근을 해서 수돗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기껏해야 열아홉, 스무 살이었으니 먹고 싶은 게 참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참 나이 어린 서울 사촌동생인 내게 가끔 100원짜리 동전을 쥐어주곤 했다. 그렇게 받은 돈으로 나는 학교 가는 길에 가게에 들러 군것질거리를 사는 재미에 들렸다. 그때 그 젊은이들이 우리나라의 산업 일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움직인 것의 8할이 라면이었다. 그래서 라면 생각을 하면 그 오빠들 생각이 난다.



1963년 많은 농민이 일을 찾아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었다. 농민은 노동자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쌀값을 내리고 쌀을 대체할 식량을 찾았다. 그때 ‘삼양라면’이 출시됐다. 라면은 왜 꼬불꼬불한가요? 아이들의 질문에 반찬 없이 라면발을 후루룩거리던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구불구불한 것이 인생이라고.

영남대 박현수 선생과 대화하다 라면 이야기가 나왔다. 라면은 인스턴트 음식으로 부담 없이 빨리 먹을 수 있지만 라면에 담겨 있는 그 시절의 생활상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다. 박 선생과 절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라면의 인기를 보고 힌트를 얻었다. 이탈리아 수사의 도움을 얻어 마카로니 공장을 열었는데 결과는 뻔했다. 공장은 얼마 안 가 문을 닫고 말았다.

요즘도 라면을 먹고 먹지만 옛날 그 맛이 나지 않는다. 대형 마트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알루미늄 냄비를 사다 라면을 끓여 보았다. 학이 그려진 상표의 그 냄비가 분명한데 그때 그 맛이 아니다. 그때 냄비들은 하나같이 찌그러져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냄비를 바닥에 내려뜨려 운두가 조금 찌그러졌다. 그래도 그 맛이 아니다. 아무래도 음식이란 그릇도 그릇이지만 불이 중요한 모양이다. 화력이 센 가스불로 끓이니 그 맛이 나지 않는 것이다.



학교 근처에는 분식집이 있게 마련이다. 가게 앞을 지나다가 분식집 창문에 라면이라고 적힌 글자를 보면 나도 모르게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요즘 라면만큼 변화무쌍한 음식이 없다. 콩나물을 넣고 햄, 치즈를 넣고 김가루를 뿌리고 볶고 튀기고 우리 아이는 심지어 우유를 부어 먹는다. 하지만 가장 맛있는 라면은 역시 달걀만 푼, 노란 단무지를 반찬으로 먹는 그 라면이다. 그때 라면 그릇에 머리를 디밀고 라면을 먹던 그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나.

신동아 2005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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