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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⑧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 전현수 경북대 교수·사학 jeonhs@mail.knu.ac.kr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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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끝난 후 미군정의 탄압과 우익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린 조선공산당은 그때까지의 중도노선을 포기하고 투쟁노선을 선택했다. 그해 9월 전국적으로 발생한 총파업은 좌우합작 및 단정(單政) 반대의 기치를 내건 조선공산당의 생존전략이기도 했다. 유혈충돌과 보복학살로 얼룩진 대구 ‘10·1사건’은 총파업을 둘러싼 좌우익 대결의 결정체였다. 총파업이 인민항쟁, 또는 폭동으로 발전한 것은 미군정의 식량정책에 대한 농민의 불만과 친일경찰 득세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가 결렬되기 전까지는 미군정에 대한 좌익의 방침은 ‘우의적 친선’이었다. 노동운동도 미군정에 협력하는 산업건설노선에 따라 전개됐다. 좌익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한국 문제에 대한 결정(이하 모스크바결정)이 가까운 시일 안에 완전한 독립정부로 발전할 임시정부 수립을 약속하고 있어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고 보았다.

따라서 좌익은 ‘근로대중이야말로 진실한 건설자이며, 신성한 생산애호자’라는 기치 아래 자주독립과 경제건설을 원조하는 미군정의 정책에 적극 협력하며, 양심적 민족자본에 대해서는 파업을 하지 않을뿐더러 생산에 적극 협력하는 노선을 견지했다.

그러나 현실은 좌익의 기대를 배반했다. 미군정은 1946년 5월 미소공위가 무기휴회로 들어가자 좌익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미군정은 법령 제72호를 공포해 좌익의 활동을 포괄적으로 구속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당 간부 10여 명을 체포했고, 조선공산당(이하 조공) 본부의 퇴거를 명령하는 한편, 조공 기관지 ‘해방일보’에 정간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직접 공세와 함께 38선의 무허가 월경(越境)을 금지하고, 한국을 항구적인 미군기지로 전환할 계획을 발표했으며, 입법의원 설립을 승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좌익은 미군정의 이 조치를 분단의 영구화, 좌익의 분열과 조공의 고립화 및 단독정부 수립 음모로 받아들였다.

미군정은 5월17일 삼척탄광노동자의 파업투쟁과 7월3일 조선화물자동차주식회사 경성지점 종업원의 무단해고 반대투쟁을 단호하게 진압했다. 미군정은 7월23일 ‘민주성’과 ‘자율성’을 요건으로 내세운 법령 제97호(노동 문제에 관한 공공정책 및 노동부 설치)를 공포해 좌익계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 산하 노동조합을 부인하고 우익계인 대한노총의 활동 자유를 장려했다. 우익은 미소공위의 ‘휴회’를 ‘결렬’로 선전하며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1946년 6월2일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에 단독정부를 즉시 수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익은 좌익단체와 좌익인사에 대한 테러를 강화했다.



미군정의 조선공산당 간부 체포령

좌익은 가장 확실하고 평화적인 정권장악 수단으로 간주해온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우익의 테러로 수세에 몰리자 정세를 뒤집을 대책 마련에 골몰했다. 그러나 새로운 상황에 대한 대응방안을 놓고 분열됐다.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좌파는 미군정과 협력을 유지하고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광범위한 좌우합작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조공은 ‘신전술’로 기울었다. 조공은 모스크바결정의 총체적 실천에 따른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 전망을 유지하면서, 군정협력에서 군정의 실정(失政)에 대한 적극적인 폭로와 규탄으로, 반동경찰과 우익의 테러탄압에 대한 무저항에서 자위적 반격으로, 대중의 일상적 요구투쟁 억제에서 촉진으로 정책을 전환하는 한편 좌우합작 반대와 ‘좌익의 독자적 진출’을 선언했다.

정책 전환과 더불어 노동운동 노선도 바뀌었다. 전평은 기존 협력방침을 철회하고 미군정의 정책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8월13일 전평은 국민생활을 파멸의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북조선처럼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대산업을 국유화하며 진보적 노동법령을 실시하고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평은 산업건설운동의 우편향을 비판하는 데 집중했다. 전평 기관지 ‘전국노동자신문’은 8월23일자 논설에서 파업회피를 권고한 지령을 ‘노동자 계급의 무장을 해제하는 전술’이라고 비난하고, 전평은 노동대중의 기본적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대중적 군중투쟁의 한 형태인 파업을 지극히 귀중한 투쟁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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