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⑧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 전현수 경북대 교수·사학 jeonhs@mail.knu.ac.kr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4/7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조선공산당 창립 2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박헌영(가운데).

러치 미군정 장관은 24일 기자회견에서 아무런 사전교섭과 요구도 없이 파업에 들어간 철도파업은 불법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대구지역의 파업은 26일을 기해 전 산업분야로 확대됐다. 26일 오전부터 대구우편국 직원들이 동조파업에 돌입했고, 이튿날부터는 경주를 비롯해 포항, 안동, 상주 등 경북도 내 우편국도 일제히 파업에 들어갔다.

26일 오후에는 적산(敵産)관리업체인 대구중공업 주식회사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고, 섬유업계에도 파급돼 사환(絲丸)직물, 동아(東亞)직물, 대구견직 3개 공장 노동자들도 파업을 시작했다. 27일 적산인 신흥제사(新興製絲)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편창(片倉)제사, 조선생사 노동자들도 동조파업에 들어갔다.

도청 광장에 모인 기아(飢餓) 시위대

파업 바람은 대구의 언론계에도 불었다. 출판노조 소속 각 신문사 노조원들은 25일 오후 서울에서 전국출판노조가 파업에 들어간 데 자극받아 27일부터 일손을 놓기 시작했다. 좌익지인 민성일보의 공무국 직원들은 27일자 신문부터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민성일보에 이어 중도지인 영남일보, 우익지인 대구시보, 경북신문, 적산인 경북인쇄소 등에 소속된 노조원들도 29일부터 파업을 벌여 30일자 이후 신문제작을 거부했다. 공무국 직원들이 주도한 이 파업으로 대구의 언론은 유혈사태를 부른 격동기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다.



9월27일 경북도 당국은 노조측에 협상을 요구했다. 헤론(Gordon J. F. Heron) 미군정 지사와 김의균 조선인 지사는 전평 대구지방평의회 윤장혁 위원장을 비롯 파업본부 노조간부 4명을 도지사실로 불러 파업철회를 종용하는 협상을 벌였다. 윤장혁은 식량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과 중앙의 지령이 없는 한 파업을 중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헤론 지사는 식량문제는 지방 차원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수송에 애로가 있고 절대량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관노(官勞) 담판은 서로의 팽팽한 주장만 확인했을 뿐 아무런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협상 결과 별다른 진전이 없자 윤장혁 등 노조간부들은 27일 오후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이하 ‘대구투위’)라는 간판을 정식으로 내걸었다. 9월27일 현재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 수는 철도노조원 1200여 명, 섬유 및 직물업체 노동자 1800여 명, 도내 우편국 직원 1200여 명, 출판노조원 112명, 기타 직종의 노동자 660여 명 등 모두 5000여 명에 달했다.

9월28일과 29일, 그리고 30일은 투위를 중심으로 파업노동자들의 위세가 한층 고조됐다. 이에 권영석 제5관구경찰청장은 치안책임자로서 윤장혁 등 대구투위 간부들에게 회담을 요구했다. 28일 권 청장은 ▲파업 이유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겠지만 ▲쟁의는 합법적으로 하고 ▲앞으로 각 단체 대표 3인 이내가 실내에 모여 쟁의에 대해 토의하는 것은 인정하되 ▲시위행동과 선동적 행동은 용인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대해 윤장혁은 공안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합법적으로 쟁의를 벌이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사건의 날’인 1946년 10월1일 오후. 도청 광장에서는 부녀자들이 중심이 된 1000여 명의 기아 시위대가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대구역 앞 광장과 서쪽의 금정 일대에서 무장경찰대와 시위대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대치했다. 삼엄한 경계태세 속에 시위대의 혁명가 합창이 울려 퍼졌다.

경찰측이 대구투위 간판을 떼라고 요구했으나 대구투위가 이를 거부함으로써 긴장이 고조됐다. 양측이 타협해 경찰이 바리케이드와 무장을 해제하려고 할 때 시위대 쪽에서 날아온 정체불명의 돌팔매가 경찰을 자극했다. 이 투석을 계기로 경찰은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고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이때 노동자 1명이 피살됐다.

경찰 발포로 노동자가 사망하자 이날 밤 대구의 좌익간부들은 비상대책회의를 긴급히 소집했다. 회의 결론은 다음날 전 조직원을 동원해 경찰에 대한 항의규탄은 물론 책임추궁을 벌인다는 것으로 귀결됐다. 2일 대구의과대학, 대구사범대학, 대구농과대학 학생들은 대구사범대학에서 연합집회를 연 뒤 경찰 발포로 사망한 사람의 시체를 메고 대구경찰서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오전 10시경 3개 대학 학생들과 남녀 중학생 수천명이 대구경찰서를 포위하고 발포중지와 무장해제, 체포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했다.

대구역과 금정의 대구투위 앞에서도 다시 위기가 고조됐다. 전날 경찰의 총격으로 동료 한 사람을 잃은 파업 노조원들은, 200명으로 늘어난 무장경찰대와 기마경찰대가 역전 일대의 교통을 차단하고 있었음에도 대구투위 앞에 재집결하는 데 성공했다.

4/7
전현수 경북대 교수·사학 jeonhs@mail.knu.ac.kr
목록 닫기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댓글 창 닫기

2020/11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