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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⑧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 전현수 경북대 교수·사학 jeonhs@mail.knu.ac.kr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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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도 채 안 돼 파업노동자 숫자는 수천명 선으로 불어났다. 박헌영이 쓴 ‘10월인민항쟁’에 따르면 9·9식 장총으로 무장한 경찰관들이 단상에서 선동하는 여공을 사살하고 그 뒤를 이어 나오는 노동자들에게 발포하기 시작해 18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보복총격으로 경찰관도 4명이 사망했다.

경찰 무기고 탈취와 미군 전차대 투입

약 1만5000명의 군중이 대구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이자 경북도 미군정 경찰부장 플레지어(John Charles Plezia) 소령은 권영석 경찰청장과 이성옥 대구경찰서장에게 무력으로 군중을 해산시킬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 서장은 플레지어의 진압명령을 거부했다. 플레지어와 권 청장이 경찰서를 떠나자 오전 11시30분경 이 서장은 무장해제를 결심하고 부하들에게 모든 총기를 무기고에 넣도록 명령했다.

낮 12시쯤 연좌해 있던 학생과 청년 수백명이 해산 권고를 무시하고 경찰서로 진입해 유치장을 부수고 그 안에 있던 100여 명을 석방했다. 이들은 무기고를 파괴하고 경찰무기를 모두 탈취했다. 군중의 험악한 기세에 놀란 20~30명의 경찰관은 경찰서 서쪽 담을 넘어 도망쳤다.

경찰서를 접수한 군중은 탈취한 무기 수십 정으로 무장했으나 실탄은 갖지 못했다. 무기탈취 후 군중은 무장대를 중심으로 100명에서 200명씩 분단(分團)을 조직해 일부는 대구경찰서를 지키고 일부는 파업 노동자가 수세에 몰려 있는 대구역전으로 갔다. 또 일부 분단조직은 대구시내 각 정·동에 파견돼 포진했다. 남아서 대구경찰서를 지키던 분단은 오후 3시쯤 미군의 탱크가 진격해오자 도망쳐 시내의 다른 분단에 합류했다.



미군 진압부대가 대구경찰서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쯤이었다. 이때 선발대로 나선 것은 보병이었다. 미군은 사건현장에 접근하고도 신속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위협 정찰만 했다. 오후 3시쯤 미군은 전차대를 투입하면서 적극적인 해산작전에 나섰다. 오후 3시 미군의 도시폭동 및 시가전 진압용 전술차인 M-7 마운트(Mount) 4대가 출현했다. 미군탱크의 출현으로 대구경찰서는 총성 한 번 없이 수복됐다. 학생들이 중심이 된 무장시위대는 총을 버리고 도망쳤다.

시위대가 대구경찰서를 점령하던 때부터 “경찰이 항복하고 경찰서가 점령됐다”는 소문이 일시에 대구 시내로 퍼졌다. 다소 과장되고 들뜨기조차 했던 이 소문은 과격청년들을 자극했음은 물론, 평소 경찰에 짓눌리며 밑바닥 삶을 살아오던 기층민과 부랑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었다. 이들 중에는 극렬하게 설치며 앙갚음하러 다니는 무리도 있었다. 군중심리, ‘주의자’들의 선동, 부랑자들의 난동이 삼박자가 돼 오후 1시 이후 대구시내와 인근 면 지역에선 처참한 살육이 벌어졌다.

폭동 초기 경북도 내에서 약 45명의 경찰관이 살해됐다. 미군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폭도로 변한 군중은 경찰의 얼굴과 몸뚱이를 칼과 도끼로 난자하고, 큰 돌을 머리에 떨어뜨려 짓이기기까지 했다고 한다. 경찰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대구시내에서 주변 군·면으로 확대

탱크를 앞세운 미군의 출현으로 시위대는 해산했으나 폭도로 변한 일부 시위대가 곳곳에서 소동을 부리자 미군정 관리들은 속이 탔다. 대구시내 각 기관 직원 대다수도 미군정에 등을 돌렸다. 미군정에 몸담고 있는 도청과 부청의 중하급 간부들은 2일 오후부터 노골적으로 자리를 뜨거나 태업을 했다. 경북도청의 부장급 이상 조선인 고위 간부들 사이에서도 ‘총사직론’이 제기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후 4시부터 권영석, 플레지어 조·미 경찰청장과 최문식, 이재복 등 좌익인사들 사이에 담판이 이루어졌다. 미군정은 이 비상사태를 조선인들이 자율적으로 수습하도록 요구했으나, 실제로는 좌익 쪽에서 영향력을 발휘해 소동을 중지시키라는 당부였다. 그러나 최문식, 이재복 등에게는 폭도로 변해버린 일부 비조직 군중의 광기에 찬 보복행위를 중지시킬 수단이 없었다. 회담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고, 오후 5시 미군정은 결국 계엄령을 선포했다.

대구지구 계엄사령관 포츠(Russell J. Ports) 대령은 포고령 제1호에서 경찰이 치안을 유지할 것이며, 최후 수단으로 군대가 동원될 것이고, 시민은 경찰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10명 이상의 집회와 회의가 금지되고,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야간통행도 금지됐다.

10월3일 포츠 계엄사령관은 최문식, 이재복, 손기채 등 대구의 좌익요인들을 내세워 선무(宣撫)방송을 하는 한편 이날 포고령 2호와 3호를 연달아 발표했다. 계엄포고령 2, 3호는 폭도들에게 무기반환, 피랍자 석방, 약탈중지 등을 명한 것으로, 위반하면 군대동원도 불사하겠다는 위협을 담고 있었다. 이때쯤 대구 시내에서는 대대적인 검거선풍으로 유혈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됐지만, 3일 이후부터는 점차 대구부를 벗어나 인근 읍면으로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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