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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⑧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 전현수 경북대 교수·사학 jeonhs@mail.knu.ac.kr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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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1946년 10월 대구 ‘10·1사건’에 이어 경남북, 전남, 경기 등 여러 곳에서 좌익 주도의 방화, 파괴 행위가 잇따르자 우익 청년 당원들이 의용경찰대를 편성하고 소탕에 나섰다.

대구와 인접한 몇몇 군에서는 10월2일부터 대중이 들고 일어났다. 미군이 출동하자 대구를 탈출한 과격한 군중 일부가 화물차량을 빼앗아 타고 대구 외곽지역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군에서는 좌익 성향인 인민위원회나 농민조합, 민청 조직이 중심이 됐다. 경북도에서는 경찰과 마찰이 잦은 곳, 하곡 수집 등의 실적문제로 군 당국과 농민조합 간에 대립이 심한 곳, 지주나 친일토호의 뿌리가 깊어 반감이 쌓인 곳, 주민의 반발의식이 강한 곳에서 격렬하고 잔혹한 살상이 빚어졌다. 도내에서 민경(民警)간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곳은 영천군과 칠곡군이었다.

미군의 G-2(정보기관) 주간요약 보고서에 따르면 영천군에서는 3일 아침 2000여 명의 시위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고 경찰서장과 경찰관 15명을 살해했다. 이밖에도 경찰관 46명이 실종됐는데, 이 중 적어도 40명은 시위군중이 납치했다. 시위군중도 15명이 사살되고 부상자가 다수 발생하는 등 피해가 커져갔다.

시위군중은 대구에서 지원경찰 100명이 내려오기까지 만 이틀 동안 영천 일원을 지배했다. 그동안 경찰서와 우편국을 전소시키고 경찰무기고, 신한공사, 법원, 그리고 적어도 100여 채의 건물을 포함한 많은 공공기관과 가옥을 불태웠다. 이 소란 속에 영천군수를 비롯해 면직원과 관리 19명이 살해당했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박정희 형 박상희의 활약

영천군과 함께 잔혹한 보복행위가 벌어진 곳은 칠곡군이었다. G-2 보고서에 따르면 10월2일 오후 9시 소총과 수류탄, 낫과 창으로 무장한 1000여 명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3일 새벽 왜관경찰서를 습격했다. 경찰서를 점령한 군중은 왜관경찰서장과 2명의 경찰관을 낫과 도끼로 참살했다. 지방 주민들이 주축인 시위대는 3일 오전 2시에서 3시 사이에 칠곡, 안동, 석적, 약목, 북삼 등의 경찰지서를 습격, 파괴하고 그곳의 경찰관, 관공리, 부유층 소유 가옥 50여 채를 파괴했다. 이 와중에 시위대 7명도 사망했다.



선산군 내의 봉기는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대구에서 내려온 지원인력의 선동 없이 군민들이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난 점과 박정희의 중형(仲兄)인 박상희(朴相熙)의 활약이 돋보였다는 점이다. 박상희는 일제 강점기부터 민족의식에 젖어 항일운동을 해온 선산의 애국지사였다. 그는 신간회에도 간여했고, 조선일보 구미지국장, 조선중앙일보 대구지국 기자 등으로 활동했다.

10월3일 오전 9시 당시 선산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인 박상희가 이끄는 2000여 명의 군중은 구미경찰서를 습격하고 모든 기능을 인민위원회로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경찰서장 등 경찰관 16명을 유치장에 감금했다. 또 구미 면사무소를 습격해 양곡 135가마를 탈취했다. 이들은 서장과 서원의 가옥은 물론 선산군 내 요인의 집을 모조리 파괴했다. 무기를 탈취한 40여 명의 군중은 선산군청도 습격했다. 6일 오전 지원경찰이 들이닥치자 박상희는 도주하다가 사살당했다. 박상희는 경찰서 점령 직후 일부 과격분자들이 감금된 경찰관과 우익인사를 즉결처분하자고 주장하자 이를 적극 만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경북도에서는 오지의 산악지대인 영양군과 동해의 고도인 울릉도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군에서 조직적인 봉기나 개별적인 저항이 일어났다. 경북도를 통틀어 볼 때 대구부, 달성군, 성주군, 칠곡군, 영천군, 의성군, 선산군, 군위군, 경주군 등 9개 부·군은 시위 군중이 한때 경찰서를 점령할 정도로 시위가 격렬했던 곳이다. 평소 좌익세가 드셌을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불안과 미군정의 인사정책, 하곡수집 정책 등 당면한 실정(失政)으로 주민의 불만이 극도에 달해 크고 작은 마찰이 잦았던 곳이다. 또 대구와 교통이 원활하고 왕래가 활발해 대구의 유혈상쟁이 몇 시간 안 돼 곧바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피해도 컸다.

G-2 보고서에 따르면 경북도의 총 피해액은 4억원, 경찰측 인명피해는 보안대(경찰보조원 및 마을 자경대원)를 포함해 사망 80명, 행방불명 및 납치가 145명, 부상이 96명으로 집계됐다.

G-2 보고서는 시위대의 피해에 대해서는 사망 48명, 부상 63명, 체포 1503명으로 집계했다. 대부분 습격을 받은 관리거나 우익인사인 민간인 사상자수는 사망 24명, 부상 41명, 납치 21명으로 집계됐다.

한편 G-2 보고서에 따르면 소총 204자루, 권총 11자루, 탄약 2688발이 탈취당했으나 회수된 것은 소총 118자루, 권총 3자루, 탄약 1035발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회수되지 못한 무기가 뒷날 빨치산의 전신인 야산대의 무기로 탈바꿈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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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수 경북대 교수·사학 jeonhs@mail.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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