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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⑧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 전현수 경북대 교수·사학 jeonhs@mail.knu.ac.kr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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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의 참극을 목격한 경찰과 우익청년들의 반격은 가혹한 앙갚음으로 나타났다. 경찰의 보복은 우선 주모자와 그 용의자들에 대한 대량검거선풍을 몰고 왔다. 대구에 계엄령이 내려진 10월2일 밤부터 11월말 사이에 경북도에서만 총 7400명, 대구와 그 주변지역에서 2250명의 좌익 정당 및 사회단체 간부, 학생, 노동자, 농민, 도시하층민, 부랑자들이 검거됐다. 이 중 6580명은 1947년 1월말께 석방됐으나 석방되기까지 경찰의 극심한 고문으로 초죽음이 됐다. 나머지 피검자 중 280명은 군사재판을 거쳐 형이 확정됐고 그 밖에 640여 명은 조사 중이거나 재판에 계류 중이었다.

경찰의 보복과 대량검거 선풍

경찰의 보복은 이름 없는 민초들에게도 가해졌다. 경북 칠곡군 인동면 신동에서는 고문경찰의 손에 농민 한 사람이 맞아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변사로 위장 처리된 고문사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부상경관을 박대했다고 여겨지는 대구시내의 의사들에게도 보복이 가해졌다.

경찰뿐 아니라 독촉국민회, 독촉청년연맹,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도 조직적으로 보복을 자행했다. 지방에 따라 일부 우익청년단체는 좌익관계자를 직접 체포 혹은 구타하는 사형(私刑)을 감행하고 심지어 좌익관계자의 가재(家財)를 파괴하는 테러를 일삼기도 했다.



군정재판은 10월12일부터 대구경찰서에서 열렸다. 일반 군정재판의 경우 선고할 수 있는 최고 형량이 징역 5년이었으므로 특별군정재판을 열어 최고 사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사형 선고는 경찰관 사상자를 많이 낸 화원, 하빈, 영천 사건 주동자들에게 내려졌다. 이들은 이듬해 6월까지 길고 지루한 재판 끝에 대부분 무기형으로 감형됐다.

광복 후 최초의 동족상잔이자 좌우의 유혈충돌인 ‘10·1사건’은 4년 후 다시 대규모 광포한 학살로 이어졌다. ‘10·1사건’에 연루돼 형무소나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1950년 6·25 전쟁을 전후해서 달성군 가창골에서, 경산의 코발트광산에서, 수감 중인 형무소에서 살해됐다. 더 심하게는 경찰청 담벽에 세워졌다가 가마니에 덮인 시체로 변했다. 이때 죽은 사람이 수천명에 달했다.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사건
田鉉秀
●1960년 출생
●성균관대 사학과 졸업, 서울대 석사(국사학), 러시아 모스크바국립대 아시아아프리카대학 박사(역사학)
●국무총리실 한민족연구발전 위원회 전문위원, 외교통상부 한일수교회담 문서공개 전담심사반 민간위원 역임
●現 경북대 사학과 교수 (한국현대사, 북한현대사 전공)
●저서 : ‘소련군정 시기 북한의 사회경제개혁’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공저) ‘북한현대사’(공저) ‘쉬띄꼬프 일기’(역서)


대구에서 시작된 ‘10·1사건’은 경북, 경남 등 영남지방에 이어 전남북, 경기, 충청, 강원 등 남한 전역으로 파급됐다. 10월 초순을 정점으로 11월말까지 간헐적으로 지속된 이 사건을 좌익은 3·1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반제반봉건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10월인민항쟁’이라 이름 붙였다. 반면 우익은 이 사건을 ‘폭동’이나 ‘소요’로 불렀다. 한편 사건 직후 대구지방의 언론은 ‘10·1사건’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을 썼다. 폭풍의 10월이 지나간 지 60년이 되는 올해 이 사건으로부터 우리는 어떠한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1946년 10월 말 브라운 소장과 여운형, 김규식이 공동의장으로 참여한 ‘조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는 ‘10·1사건’이 경찰에 대한 반감, 군정 내 친일파의 존재, 일부 한국인 관리의 부패, 파괴분자들의 선동 탓에 일어났다고 결론지었다. ‘10·1사건’이 미군정의 정책파탄에 따른 한국 민중의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사태를 살육과 파괴로 몰고 간 책임은 ‘신전술’로 기울어 잘못된 정책을 채택한 조공에 있다는 것이다. ‘10·1사건’은 좌우합작보다는 좌우대립과 보복학살을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신동아 200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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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수 경북대 교수·사학 jeonhs@mail.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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