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카와 대의사는 단상을 탕탕 쳐대며 맹렬하게 추궁했다. 개인의 사유재산을 정부가 임의로 처분한 의혹이 있다면 문제를 공론화해 진상을 밝히는 것이 야당의원 본연의 임무였다. 그러나 죽은 지 이미 15년이나 지난 조선인, 더구나 죽는 순간까지 일본의 조선 침탈에 저항한 친러파 정객의 재산 문제를 뒤늦게 야당이 들고 나온 이유가 석연치 않았다. 정치적 복선이 깔린 폭로임이 분명했다.
정부위원으로 중의원에 참석했던 사이토 조선총독은 “23만원은 이용익의 사재(私財)가 아니라 공금이라 조선 정부가 환수했고, 나머지 10만원은 추후 조사해보겠다”고만 답변했다.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답변이었다. 공금이라고 해서 예금주에게 통보도 하지 않고 정부가 환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공권력을 이용해 사유재산을 착복한 정치적 스캔들로 비화할 만한 사안이었지만, 이용익의 예금을 둘러싼 의혹은 그 후 중의원에서 더는 논의되지 않았다. 의혹을 묻어두기로 하는 여야간 밀실타협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변죽만 울리다 끝난 중의원의 의혹제기는 단지 논란의 시작에 불과했다. 2년 후 이용익의 유족은 정식으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구한국시대 내장원경 이용익의 장남 이현재는 이왕가를 위시하여 일본 정부와 제일은행을 상대로 불법 행위에 인한 손해배상금 79만9989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4월11일 동경지방재판소에 제기했다. 러일전쟁이 있던 당년 조선 천지가 혼란했을 때, 이용익이 제일은행 경성출장소에 맡기어둔 예금 총액 33만원이 어느 사이에 조선 왕가의 명의로 이전된 것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다. 지난 1922년 의회에서 아라카와 고로가 한 차례 의혹을 제기했던 사건이다. 소송에 사용한 인지대만 2400원이라는 거액에 달한다. 한창때 세도를 부리던 귀인(貴人)들이 차례로 법정에 서게 될 것이라 한다. (‘동아일보’ 1924년 4월12일자) |
공식적으로 소송의 원고는 이용익의 양자 이현재로 되어 있지만, 실제 소송을 주도한 것은 손자 이종호(1885~1932)였다. 부친이 이용익의 양자였기 때문에 이종호는 조부와 서른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이용익은 죽기 직전 문제의 33만원이 입금된 예금통장을 측근의 손을 거쳐 손자 이종호에게 넘겨줬다. 이종호는 예금의 행방을 가장 정확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 ‘손해배상청구소송’은 엄청난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무엇보다도 80만원에 달하는 엄청난 청구금액에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인지대 2400원이면 당시 경성시내에서 서민주택 한 채를 족히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은행에 맡겨놓은 천문학적 금액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는 것은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소송을 제기한 시점도 의문이었다. 통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마지막으로 예금한 지 20년, 이용익이 죽은 지 18년이 지나서야 소송을 제기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만약 한동안 통장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면 2년 전 아라카와가 의회에서 의혹을 제기했을 때라도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보통사람 같으면 단 하루도 참지 못할 거금이었다.
그렇다고 이용익의 유족이 그 정도 금액을 가볍게 여길 만큼 상속 재산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백만장자의 상속자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이종호는 궁핍하게 살았다. 이종호의 부인 장계인은 고단했던 신혼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웃지나 마세요. 처음 박동(견지동)에서 살림을 차렸는데 살림이래야 단칸셋방살이였습니다. 그마저 한 달도 못 돼 집을 내놓으라고 하니 갈 데는 없고 해서 동대문 밖 절간으로 갔습니다. 절에 가서도 한 달 반이 되니 집세가 밀려서 또 나오게 되었습니다.그때 내가 돈 100원을 얻어서 집세를 갚아 주고 새문 밖에 15원짜리 집 한 채를 빌렸습니다. 불행한 운명이라 그 집에도 오래 못 있게 되어 누가 거저 얻어 주는 집에서 한 달이나 살다가 거기서 또 쫓겨나 돈의동으로 이사했지요. 돈의동 집에서 3년간 살다가 이 집으로 이사해서 지금까지 지냅니다. 1년 동안에 이사를 대여섯 번 했으니 그간에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요. 나는 밥 지을 줄도 모르고, 빨래할 줄도 몰랐어요. 그러면서도 손수 밥해먹고 영감 옷을 내 손으로 지어 입혔지요.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어렵지 않겠지만 서투른 것을 하려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용익 90만원 사건 속에 맺히고 맺힌 가인의 눈물’, ‘삼천리’ 1932년 5월호) |
거금이 입금된 통장을 쥐고도 방값이 없어 단칸 셋방을 전전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통장에 든 돈이야 은행에서 내주지 않으니 찾아 쓸 수 없었다 하더라도, 금광계의 풍운아 이용익의 백만금 재산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