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말 친러파의 거두이자 고종황제의 최측근이었던 내장원경 이용익. 나라가 망하기 직전 30여만원의 거금을 은행에 맡겨둔 그가 타국에서 불귀의 객이 되자, 지금 돈으로 수백억원에 달하는 자금이 허공으로 사라져버린다. 통장을 물려받은 손자는 이를 되찾으려 나서지만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일 것을 염려한 친일파와 총독부에 의해 감금당하고 마는데…. 30년 세월이 지나서야 시작된 법정 공방의 전모, 그 뒤에 얽혀 있는 구한말 대신들의 파렴치한 이전투구.
‘삼천리’ 1936년 4월호에 실린 ‘이용익의 백만원이 사느냐 죽느냐’ 기사.
1902년 10월2일, 제일은행 경성출장소(지금의 한국은행 본관)에 내장원경(內臟院卿) 이용익(1854~1907)이 나타났다. 제일은행은 일본의 민간은행이었지만, 1878년 조선에 진출한 이래로 은행권 발행, 국고금 출납 등 사실상 조선의 중앙은행 기능을 담당했다. 조선 최초로 설립된 은행인 만큼 자본금 규모로 보나 영업 능력으로 보나 대한천일은행, 한성은행 등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은행을 압도했다.
내장원경 이용익은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지배인실로 안내되었다. 내장원경은 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의 수장. 당시 조선 유일의 수출산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광산과 인삼밭에서 나오는 세수(稅收)는 모두 내장원에 귀속됐다. 내장원경이란 자리는 엄청난 규모의 황실 자산과 이권을 관리하는 대한제국 최고의 ‘노른자위 보직’이었다.
더구나 이용익은 고종의 최측근 경제관료이기 이전에 그 자신이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에 다수의 금광을 소유한 백만장자였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은행의 극진한 환대를 받을 만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용익은 지배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본인 명의로 당좌예금 계좌를 개설하고 뭉칫돈 23만7519원 74전을 입금했다. 당시 대한천일은행 은행장이던 영친왕 이은의 월급이 50원, 부은행장이던 이용익의 월급이 25원이었다. 정확한 환산은 불가능하지만, 100년 전의 23만여 원은 오늘날 230억원보다 훨씬 큰돈이었음이 분명하다.
이후 친러파의 거두 이용익은 친일파가 들끓는 조정에서 고군분투의 세월을 보냈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면 러시아가 이길 것으로 믿고 한일의정서 체결에 끝까지 반대하다가, 1904년 1월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일본으로 압송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다행히 같은 해 12월에 가까스로 억류에서 풀려나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직후인 1905년 1월14일, 관직 없이 야인 생활을 하던 이용익은 3년 만에 제일은행 경성출장소를 다시 찾았다. 이번에도 어디서 났는지 뭉칫돈 10만원을 입금했다. 열흘 후인 1월24일에도 다시 2만4000원을 입금했다. 7월7일에는 수표로 3만원을 인출해 당좌예금의 잔액은 원금만 33만1519원 74전이 되었다.
33만원의 행방
한 달 후 이용익은 경상북도 관찰사로 관직에 복귀했고, 5월에는 군부대신에 임명되어 중앙정계로 돌아왔다. 일본에 압송되는 수난을 겪고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이번에는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해 친일파의 미움을 샀다. 8월14일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됐지만, 현지에 부임하는 대신 8월17일 고종의 밀명을 받아 비밀리에 출국했다. 프랑스를 거쳐 러시아에 도착한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자객의 저격을 받고 중상을 입는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이용익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가 요양하다 1907년 1월에 사망했다. 대정객(政客)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33만원 당좌예금도 주인을 잃고 허공에 떠버렸다.
15년의 세월이 지난 1922년 1월26일, 일본 중의원에서 야당인 헌정회를 대표해 대정부 질의자로 나온 아라카와 대의사(代議士·의원)가 다음과 같은 ‘생뚱 맞은’ 의혹을 제기했다.
“1905년 이용익이 제일은행 경성출장소에 맡겨둔 예금 33만원이 행방불명됐다. 일본 정부는 내막을 철저히 규명하라. 정부라는 권력집단이 남의 사유재산을 근거 없이 압수할 수 있는 것인가?”
아라카와 대의사는 단상을 탕탕 쳐대며 맹렬하게 추궁했다. 개인의 사유재산을 정부가 임의로 처분한 의혹이 있다면 문제를 공론화해 진상을 밝히는 것이 야당의원 본연의 임무였다. 그러나 죽은 지 이미 15년이나 지난 조선인, 더구나 죽는 순간까지 일본의 조선 침탈에 저항한 친러파 정객의 재산 문제를 뒤늦게 야당이 들고 나온 이유가 석연치 않았다. 정치적 복선이 깔린 폭로임이 분명했다.
정부위원으로 중의원에 참석했던 사이토 조선총독은 “23만원은 이용익의 사재(私財)가 아니라 공금이라 조선 정부가 환수했고, 나머지 10만원은 추후 조사해보겠다”고만 답변했다.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답변이었다. 공금이라고 해서 예금주에게 통보도 하지 않고 정부가 환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공권력을 이용해 사유재산을 착복한 정치적 스캔들로 비화할 만한 사안이었지만, 이용익의 예금을 둘러싼 의혹은 그 후 중의원에서 더는 논의되지 않았다. 의혹을 묻어두기로 하는 여야간 밀실타협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변죽만 울리다 끝난 중의원의 의혹제기는 단지 논란의 시작에 불과했다. 2년 후 이용익의 유족은 정식으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구한국시대 내장원경 이용익의 장남 이현재는 이왕가를 위시하여 일본 정부와 제일은행을 상대로 불법 행위에 인한 손해배상금 79만9989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4월11일 동경지방재판소에 제기했다. 러일전쟁이 있던 당년 조선 천지가 혼란했을 때, 이용익이 제일은행 경성출장소에 맡기어둔 예금 총액 33만원이 어느 사이에 조선 왕가의 명의로 이전된 것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다. 지난 1922년 의회에서 아라카와 고로가 한 차례 의혹을 제기했던 사건이다. 소송에 사용한 인지대만 2400원이라는 거액에 달한다. 한창때 세도를 부리던 귀인(貴人)들이 차례로 법정에 서게 될 것이라 한다. (‘동아일보’ 1924년 4월12일자) |
공식적으로 소송의 원고는 이용익의 양자 이현재로 되어 있지만, 실제 소송을 주도한 것은 손자 이종호(1885~1932)였다. 부친이 이용익의 양자였기 때문에 이종호는 조부와 서른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이용익은 죽기 직전 문제의 33만원이 입금된 예금통장을 측근의 손을 거쳐 손자 이종호에게 넘겨줬다. 이종호는 예금의 행방을 가장 정확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 ‘손해배상청구소송’은 엄청난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무엇보다도 80만원에 달하는 엄청난 청구금액에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인지대 2400원이면 당시 경성시내에서 서민주택 한 채를 족히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은행에 맡겨놓은 천문학적 금액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는 것은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소송을 제기한 시점도 의문이었다. 통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마지막으로 예금한 지 20년, 이용익이 죽은 지 18년이 지나서야 소송을 제기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만약 한동안 통장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면 2년 전 아라카와가 의회에서 의혹을 제기했을 때라도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보통사람 같으면 단 하루도 참지 못할 거금이었다.
그렇다고 이용익의 유족이 그 정도 금액을 가볍게 여길 만큼 상속 재산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백만장자의 상속자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이종호는 궁핍하게 살았다. 이종호의 부인 장계인은 고단했던 신혼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웃지나 마세요. 처음 박동(견지동)에서 살림을 차렸는데 살림이래야 단칸셋방살이였습니다. 그마저 한 달도 못 돼 집을 내놓으라고 하니 갈 데는 없고 해서 동대문 밖 절간으로 갔습니다. 절에 가서도 한 달 반이 되니 집세가 밀려서 또 나오게 되었습니다.그때 내가 돈 100원을 얻어서 집세를 갚아 주고 새문 밖에 15원짜리 집 한 채를 빌렸습니다. 불행한 운명이라 그 집에도 오래 못 있게 되어 누가 거저 얻어 주는 집에서 한 달이나 살다가 거기서 또 쫓겨나 돈의동으로 이사했지요. 돈의동 집에서 3년간 살다가 이 집으로 이사해서 지금까지 지냅니다. 1년 동안에 이사를 대여섯 번 했으니 그간에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요. 나는 밥 지을 줄도 모르고, 빨래할 줄도 몰랐어요. 그러면서도 손수 밥해먹고 영감 옷을 내 손으로 지어 입혔지요.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어렵지 않겠지만 서투른 것을 하려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용익 90만원 사건 속에 맺히고 맺힌 가인의 눈물’, ‘삼천리’ 1932년 5월호) |
거금이 입금된 통장을 쥐고도 방값이 없어 단칸 셋방을 전전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통장에 든 돈이야 은행에서 내주지 않으니 찾아 쓸 수 없었다 하더라도, 금광계의 풍운아 이용익의 백만금 재산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삼천리’ 1930년 7월호에 실린 ‘이용익씨 90만원 사건’ 기사.
전대미문의 대(大) 민사소송은 온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소송을 제기한 지 한 달이 채 되기도 전 이종호가 돌연 소송을 취하해 재판은 싱겁게 끝이 났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이종호가 조부의 돈이 아닌 줄 알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번 소송을 제기해보았다가 뒤늦게 마음을 돌린 것이었을까. 혹시 재판 직전 막후교섭으로 쌍방이 극적으로 타협을 본 것은 아니었을까. 이용익의 예금 80만원을 둘러싼 대의혹은 당사자들만 비밀을 간직한 채 영원히 묻히는 듯했다. 그러나 이 또한 ‘1승5패, 9년 소송’이라는 긴 드라마의 서막에 불과했다.
‘고종의 내탕금’ vs ‘이용익의 사재’
다시 6년이 지난 1930년 6월2일, 이종호는 제일은행을 상대로 ‘예금청구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제기했다. 원금 33만1519원 74전에 1902년에서 1930년까지의 이자까지 총 89만3906원 78전을 지급할 것을 청구했다. 소송을 제기했다 취하했던 1924년부터 6년 사이의 이자만 10만원 남짓이었다. 판결이 날 때까지 매년 6%씩 이자를 추가로 지급할 것을 청구했으므로 재판이 길어지면 소송가액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것이었다. 6월26일과 9월8일 두 차례에 걸친 준비 수속에서 피고와 원고의 주장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피고측 주장)은행측은 원고측의 주장대로 이용익이 예금한 사실은 분명하나 그 당좌예금 전부는 대한제국 궁내부의 내탕금(內帑金·임금이 개인적인 용도로 쓰는 돈)이지 이용익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제1회 예금 23만여 원은 1904년 조선주재 일본공사 하야시 곤노스케의 소개로 당시 내장원경 윤웅렬의 당좌로 돌려놓았고, 그후 두 차례의 예금은 통감부 총무장관 쓰루하라 사다기치의 소개로 1907년 6월 9일 궁내부 외사과장 유찬의 당좌로 옮겼다. 그 돈은 이미 전부 지불되었다.백보 양보해 이용익의 사재라 하더라도 벌써 30년 전 입금된 돈이라 시효가 지나 지불할 수 없다. (원고측 주장)은행측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하여 원고측은 당초 당좌예금이라는 것은 정기예금과 달라 해당 은행에 예금이 존속되는 동안에는 예금자는 언제든지 해당 은행에 대하여 예금의 지불을 청구할 수 있다. 묵시의 특약이 따르는 성질의 예금이므로 시효에 걸릴 성질의 채권이 아니다.당좌예금이 시효에 걸린다고 가정하더라도 피고는 원고에 대하여 채무를 승인하였으니 시효 문제가 성립되지 않는다.백보를 양보하여 제1회 예금 23만여 원은 이용익이 내장원경에 재직할 때이니 내탕금이라고 하더라도 제2, 제3회의 예금은 이용익이 재야에 있을 때 예금한 것이므로 사재인 것이 분명하다.설혹 내탕금이라 하더라도 개인 명의로 예금된 이상 은행은 그 예금의 내용까지 간섭할 하등의 권리가 없다. (‘90만금은 어디로’, ‘동아일보’1930년 10월17일자) |
결국 쟁점은 이용익이 입금한 돈이 고종의 내탕금인지 사재인지, 당좌예금의 시효가 성립되는지, 예금주의 동의 없이 은행이 임의로 예금을 돌려놓을 수 있는지 세 가지로 압축됐다. 재판이 시작되자 ‘한일강제병합’ 전후, 대한제국과 일본 정계를 주름잡던 내로라하는 정객들이 차례로 소환돼 증언대에 올랐다. 당시 승녕부총관 조민희, 전권공사 하야시, 경시총감부 고등과장 마에다, 통감부 총무장관 쓰루하라, 궁내부 차관 고미야, 궁내부 외사과장 유찬, 전 이왕직 차관 시노다, 현 육군대장 어담, 현 조선은행 총재 이치하라 등 전현직 고위관료 수십명이 증인 신문을 받았다.
재판이 진행됨에 따라, 이용익의 예금을 둘러싼 음모와 흑막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예금청구소송은 급기야 하세가와와 사이토, 두 전직 조선총독까지 깊숙이 개입된 어마어마한 정치적 스캔들로 비화했다.
이종호는 어느 날 갑자기 소송을 제기한 것이 아니다. 1907년 이용익이 죽은 직후부터 집요하게 예금지급을 청구했으나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이다.
풍운아 이용익
이용익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최측근에서 보좌한 친러파 정객이었다. 당대 제일의 세도가로 위세를 부렸지만,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베일에 싸여 있다. 그는 1854년 함경북도 명천의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글공부도 거의 하지 않고 열여덟 살에 금광으로 뛰어든 것을 보면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을 개연성이 크다. 하지만 ‘전주 이씨 완풍대군파 세보(世譜)’에는 이용익의 조부 이광집은 무과에 급제해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고 부친 이병효는 고산현감, 전주진관 등 무반 벼슬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현직관리의 아들이 무슨 연유로 금전꾼, 보부상 등 천역을 전전했는지 알 길이 없다. 1930년대 잡지는 이용익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대체 이용익이란 어떤 인물이냐. 당시 구한국 정계의 걸물인 줄은 누구나 알지만 그의 위인을 모르는 이가 많으리라. 그는 함북 명천 사람으로 신장 6척(180cm), 잘생긴 용모의 쾌남아로서 17~18세 때 함남 갑산금광에 들어가 주먹만한 금괴 여러 개를 파내 등에 짊어지고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서울에 올라와 고종께 바쳤다. 고종께서는 처음 보시는 시골사내지만 말에 거짓이 없고 꾸밈없는 그 풍격이며 기골 장대한 풍채를 보시고 국가에 유용한 인물이라 생각하셔서 관직을 주셨다.때마침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싸움이 있어 대원군이 황후를 쫓자 이 변고를 피하고자 황후께서 장호원에 피난하셨다. 이용익은 민영익과 협력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단신으로 장호원 산곡에 내려가 황후를모셔다가 창덕궁에 들게 하였다.이 일이 있은 뒤 고종은 이용익을 더욱 신임해 군수, 북방부사 등 관직을 제수했다. 중앙 정계에 입성한 이용익은 전국 금광의 세무감독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영화가 극에 달하여 내장원경, 원사부(元師府), 검사총장(檢事總長) 등 중임을 맡게 되었다. 일본공사 하야시는 “이용익은 고종에게 유일무이의 충신이었고 개인적 욕심 때문에 돈을 탐하는 일이 없는 매우 질소한 인물이었다”고 말했다.이용익이 군부대신으로 있을 때 러일전쟁이 터졌다. 그때 일본공사 하야시와 헌병사령관 노즈는 이용익을 군함에 실어 도쿄로 보냈다. 그것이 1904년 2월이다. 도쿄에 간 이용익은 약 1년 동안 열심히 교육제도와 문화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귀국할 때 그는 사재 10여만원을 던져 서적을 사가지고 돌아와서 보성관을 만들고 보성중학(지금의 고려대학교)을 창립하였다. (‘이용익의 백만원이 사느냐 죽느냐’, ‘삼천리’ 1936년 4월호) |
‘혜성’ 1931년 6월호에 실린 ‘이용익가 백만원 사건’.
이용익이 결코 청렴한 관리는 아니었지만, 후손에게 남긴 유산은 33만원이 입금된 통장이 유일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이역 하늘에서 눈을 감으면서 임종을 지키던 친구와 동지에게 통장을 건네주며 돈을 찾아 손자 이종호에게 맡겨달라고 몇 번이고 당부했다.
이용익의 사망소식을 들은 손자 이종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달려가서 조부의 시신을 수습해 고향인 함경북도 명천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마친 후 그는 조부의 임종을 지킨 지인으로부터 33만원이 입금된 통장을 건네받았다. 이종호는 이듬해 경성으로 올라와서 제일은행에 지급을 청구했다. 그러나 제일은행은 뚜렷한 이유 없이 예금지급을 차일피일 미뤘다. 몇 번이나 요구해도 그때마다 “지금은 지급할 수 없다”는 똑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거액의 예금을 노린 친일파의 조직적 방해공작 탓이었다.
송병준의 책동
내부대신 송병준은 일찍부터 이용익이 제일은행에 맡긴 예금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1908년 이종호가 제일은행을 상대로 예금지급 운동을 벌인다는 소식을 들은 송병준은 이종호를 승녕부(承寧府·양위 후 고종 관련 업무를 담당한 임시관청)로 불러들였다.
“이용익이 제일은행에 맡긴 돈은 내탕금이니 네가 가지고 있는 통장과 도장을 당장 내놓아라!”
송병준은 약관을 갓 넘긴 이종호를 무섭게 얼러댔다. 그러나 거인의 가업을 승계한 이종호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 돈은 조부의 개인재산입니다. 알 만한 분이 어찌 조부의 유산을 가로채려 하십니까.”
오십 줄을 넘긴 송병준은 애송이 이종호에게 모욕을 당하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승녕부 총관 조민희를 대동하고 고종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이용익의 예금은 황실의 내탕금이니 마땅히 돌려받아야 하옵니다.”
그러나 고종은 송병준의 간곡한 청을 단칼에 묵살했다.
“그 돈은 이용익의 개인재산이니 개인이 자의로 할 것이라 누가 능히 간섭할 수 있으랴.”
돈을 향한 송병준의 집착은 대단했다. 이용익의 돈을 ‘합법적’으로 횡령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다음날 아침 송병준은 경무청 경관을 풀어 당주동 이종호의 집을 포위하고 곤히 자고 있던 이종호를 체포했다. 그러고는 내무대신 관저 골방에 감금한 채 밤낮으로 통장을 내놓으라고 회유하고 협박했다.
당시 송병준은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세도대신이요, 일진회 회장 자리를 차고앉은 친일파의 수괴였다. 조선인 중에는 누구도 그의 책동을 막을 수 없었다. 이종호는 조부의 유산 33만원을 빼앗기든지 목숨을 빼앗기든지, 절체절명의 위기에 내몰렸다.
백주 한양 천지에서 이러한 활극이 있는 줄 하늘이 알까, 땅이나 알까.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송병준의 수작을 눈치 챈 단 한 사람의 의협남자가 있었다. 당시 서북학회(1908년 설립된 애국계몽단체)를 끼고 바람처럼 비처럼 활약하던 육군참령 이갑이었다.이갑과 이종호는 예로부터 국사를 이야기하던 심복(心腹)이요 서북학회 일로 한솥밥을 먹던 맹우(盟友)였다. 이갑은 송병준을 물리치자면 하세가와 군사령관(훗날 조선총독)에게 청할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세가와 대장을 찾아가 이종호를 구해달라고 청했다. 하세가와 대장은 이갑의 이야기를 듣고 곧장 송병준의 집에 가서 송병준을 꾸짖고 이종호를 풀어주게 했다. 이종호는 감금된 지 사흘 만에 풀려났다. (‘이용익의 백만원이 사느냐 죽느냐’, ‘삼천리’ 1936년 4월호) |
하세가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한 송병준은 하세가와의 정적(政敵)이던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이종호에게 그런 큰돈을 내주면 폭동을 일으키는 정치자금으로 사용될 터이니 내주지 말라”고 신신 당부했다. 송병준의 치졸한 책동으로 이종호의 예금청구 운동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조선 정국은 하세가와 군사령관파(派)와 이토 통감파로 갈려 있었다. 송병준은 이토 통감파의 우두머리였다. 친일파를 몹시 싫어하던 이종호와 이갑이었지만, 목숨을 부지하자면 하세가와에게 줄을 댈 수밖에 없었다. 1909년 하세가와 군사령관이 일본으로 귀임하자 송병준의 발호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종호는 예금의 인출은커녕 목숨조차 보전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했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총탄을 맞고 죽자 이종호는 사건 혐의자로 체포되어 수감되기까지 했다.
혐의가 풀려 석방된 후 이종호는 조선에서는 활동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망명길에 올랐다. 베이징으로 갔으나 그곳도 안전하지 않아 칭다오를 거쳐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에서 한동안 활동하다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이종호는 조부의 예금을 인출해 독립운동자금으로 쓸 계획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러청은행(露淸銀行)을 통해 일본 제일은행과 예금지급 협상을 재개했다.
한창 교섭이 진행 중이던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더 머무를 수 없게 된 이종호는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경성으로 압송돼야 했다. 일본 경찰은 이종호를 고향인 함경북도 명천으로 보내 1년 동안 가택연금시켰다.
길고 긴 협상
명천에서 ‘맑은 날은 밭을 갈고 흐린 날은 책을 읽으며’ 한 해를 보낸 이종호는, 1918년 9월 거주제한이 풀리자 곧장 서울로 올라왔다. 상경한 즉시 제일은행 경성지점으로 달려가서 지배인 다케무라를 만났다. 다케무라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청은행과 교섭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전임자가 맡아 보던 일이라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조사해본 뒤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며칠 후 “1902년 제1회 예금은 장부를 폐기해서 알 수 없고, 1905년 제2, 제3의 예금은 공금으로 판정돼 대한제국 궁내부로 이체했다”는 회답이 돌아왔다. 다케무라는 “정부 관계 업무는 1909년 한국은행(1911년 이후 조선은행)으로 이관했으니 더 이상 제일은행의 소관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이종호는 어떤 업무를 한국은행에 이관했는지 이관명세서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러나 다케무라는 이관명세서 같은 것은 없으며, 대한제국 궁내부로 이체한 돈은 이미 출금됐다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예금주에게 아무런 통보도 없이 예금을 다른 계좌로 이체하는 법이 어디 있냐고 추궁하니, 다케무라는 당시 정부의 명령이 엄해 따랐을 뿐이니 은행의 책임이 아니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제일은행과 벌인 1차 교섭은 결국 언성만 높였을 뿐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
내부대신 시절의 송병준(왼쪽)과 일본공사 하야시. 이용익 명의의 예금이 지급될 경우 친러파의 활동자금으로 활용될 것을 염려해 조직적인 방해공작을 펼쳤다.
이처럼 한줄기 서광이 비칠 때 3·1 운동이 일어났다. 3·1 운동은 독립운동가 이종호에게는 한없이 큰 감격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크나큰 불행이었다. 제일은행과 벌이던 협상이 타결되기 직전 하세가와 총독은 3·1 운동의 책임을 지고 사직해 도쿄로 돌아갔다. 총독이 물러나니 예금 지급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조하던 관리들과 제일은행 관계자들은 차례로 손을 뗐다.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1920년, 이종호는 어떻게든 예금을 돌려받겠다고 결심하고 도쿄로 건너갔다. 도쿄에서 이종호는 10여 년 전 자신을 죽일 듯 박해하던 송병준을 우연히 만났다. 송병준은 뜻밖에도 이종호를 반갑게 맞으며 지난 일을 사과했다. 그리고 과거는 모두 잊고 지금 다시 손잡으면 자기가 증인이 되어 예금을 찾아주겠다고 했다. 일본의 유명한 로비스트 오쿠무라를 소개하며 그에게 맡기면 예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종호는 송병준의 말을 믿고 오쿠무라에게 전권을 맡기고 귀국했다.
오쿠무라는 백방으로 줄을 대 결국 아라카와 대의사를 통해 중의원에서 이용익의 예금을 둘러싼 의혹을 폭로해 사건을 공론화하는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파문은 더는 확대되지 않고 이내 수습됐다. 정치적 압력으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자 오쿠무라는 1924년 도쿄지방재판소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오쿠무라는 소장(訴狀)에 제일은행뿐 아니라 조선총독을 비롯해 이왕직 장관, 순종까지 피고로 적시했다. 문제가 소송으로까지 비화하자 총독부와 이왕직에서 합의를 요구했다. 신하로서 임금을 상대로 송사를 벌이는 것이 외람된 일이라고 생각하던 차에 합의 요구가 들어오자 이종호는 서둘러 소송을 취하했다. 사이토 총독은 이종호를 총독부로 불러들여 솔깃한 제안을 했다.
사이토 총독은 이종호를 불러놓고 “좌우간 20여 년이나 지난 일이요 제일은행에서는 지급할 돈이 없다고 하니 지금으로서는 돈을 찾을 길이 없다. 그 대신 산림(山林)을 줄 테니 승낙하라”고 말했다. 여러 번 교섭해도 신통한 해결방법이 없던 이종호의 친지들은 산림으로라도 돌려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황해도 어느 산림을 불하 받을 작정으로 이왕직장관 등을 찾아 다녔다. 그 산림은 그때 시가로 약 60만원이란 설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조차 사이토 총독이 영국 런던으로 군축회의 대표로 파견돼 서울을 떠나자 좌절되고 말았다. (‘이용익의 백만원이 사느냐 죽느냐’, ‘삼천리’ 1936년 4월호) |
제일은행, 총독부, 이왕직을 상대로 한 막후교섭은 무려 7년을 끌면서도 신통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들춰본 궁내부 서류 어디에도 예금이 인출된 흔적이 없음을 알아낸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이용익의 예금은 국고로 환수된 것이 아니라 친일대신 중 누군가가 중간에서 착복한 것이었다. 이종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1930년 6월2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정식으로 예금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조부의 통장을 손에 넣은 지 무려 24년 만의 일이었다.
1승5패, 9년 소송
법정 공방은 그로부터 여섯 차례에 걸쳐 9년간 이어졌다. 3심인 대심원에서 한 차례 원심파기가 있었고, 대심원의 확정판결 후 한 차례 재심청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현직 고관대작들의 증언은 소송의 유·불리를 떠나 대한제국 시기 국정의 난맥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1904년 러일전쟁 직전, 친러파 이용익은 한규설 내각의 군부대신에 임명됐고 친일파 거두 송병준은 오랜 일본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해 일진회를 조직했다. 그해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용익은 러시아의 승리를 확신하고 일본과의 조약체결에 반대했고, 송병준은 일진회를 통해 일본군에 물자를 공급하고 친일 선전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용익은 일본군의 조선 통과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일본군에 납치돼 도쿄로 압송됐다. 하야시 전권공사와 일진회 회장 송병준이 결탁해 ‘이용익 납치 작전’을 주도했다. 하야시와 송병준은 조정에서 친러파를 축출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친러파의 자금줄을 틀어막을 음모를 꾸몄다.
하야시는 제일은행 경성지점을 찾아가서 “이용익의 예금 23만원은 황실의 공금이니 즉시 황실 예금으로 돌려놓으라”고 강요했다. 제일은행은 아무리 서슬이 퍼런 공사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개인 명의의 예금을 본인의 승낙도 받지 않고 다른 계좌로 돌려놓을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나 한 번의 거절로 포기할 하야시와 송병준이 아니었다. 하야시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제일은행을 압박했다.
공사의 집요한 요구에 제일은행은 하는 수 없이 고미야 궁내부 차관에게 이용익 명의로 제일은행 경성지점에 예금된 23만원이 황실의 내탕금인지 물어보았다. 고미야는 금시초문인지라 승녕부 재무이사 조민희에게 물었고, 조민희는 다시 승녕부 총감 이대오에게 알아보았다. 사실 확인을 위해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리자 고종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고종은 “이용익의 개인재산을 황실에서 간섭할 필요가 없다”는 어지(御旨)를 내렸다. 이로써 제일은행은 하야시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도 될 명분을 확보했다. 그러나 ‘한낱’ 대한제국 황제의 어명에 기가 꺾일 하야시가 아니었다.
“훗날 문제가 생기면 내가 전부 책임을 지겠다는 각서를 쓸 테니 무조건 23만원을 황실 예금으로 바꿔놓으라.”
하야시는 제일은행을 찾아가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니 제일은행도 하는 수 없이 하야시의 각서를 받고 23만원을 내장원경 윤웅렬의 명의로 돌려놓았다. 일본 최대 은행인 제일은행이 달랑 전권공사의 각서 한 장 받아놓고 예금주 동의 없이 예금의 명의를 돌려놓은 희대의 사기극을 연출한 것이었다. 하야시의 서명을 받은 각서는 재판부에 증거품으로 제출되었다. 윤웅렬의 명의로 이전된 23만원은 그후 인출된 사실만 확인됐을 뿐 사용처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제일은행의 파렴치한 행위는 그 뒤에도 계속됐다. 이듬해 이용익이 귀국해 제일은행 경성지점을 찾았을 때, 담당자는 이용익이 고국을 비운 사이 일어난 ‘소동’에 대해 한마디도 귀띔하지 않았다. 귀띔은커녕 천연덕스럽게 두 차례에 걸쳐 12만4000원을 입금받았다. 지난해 인출된 돈을 통장에서 지우지도 않아 이용익이 돌려받은 통장에는 ‘36만원’ 잔액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이후 이용익이 수표로 3만원을 인출해 통장에 기록된 예금잔고는 33만원으로 줄어들었다. 제일은행의 주장대로라면 그때 이미 이용익의 은행계좌에는 10만원밖에 남지 않은 셈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이용익이 첫 번째로 입금한 23만원의 행방은 어느 정도 밝혀졌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입금한 12만4000원은 어떠한 경로를 거쳐 궁내부 외사과장 유찬의 당좌예금으로 옮겨졌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증인신문에서 유찬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1907년에 궁내대신의 명령으로 은행에서 10만원을 찾아다가 궁내대신에게 교부한 사실은 있소. 예금청구 수속은 모르겠소. 다만 돈 찾아오라 하면서 궁내대신은 상께서 10만원을 중신 윤택영에게 하사하실 것이라 하셨다 했소. 그때 총무장관 쓰루하라의 소개를 받은 사실은 없소. 그때 찾은 돈이 이용익의 당좌예금에서 흘러 들어온 것인지는 알 수 없소. 이용익이 제 돈을 예금한 것인지 내탕금을 예금한 것인지내가 알 바 아니오.” (‘이용익의 백만원이 사느냐 죽느냐’, ‘삼천리’ 1936년 4월호) |
제일은행은 이용익의 첫 번째 예금이 황실의 공임인 증거로, 1902년 10월 2일 미쓰이물산 경성지점이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인삼을 불하받고 대금 22만8819원 70전을 당좌수표로 결제했는데 수취인이 이용익이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이용익은 같은 날 본인명의로 당좌예금계좌를 개설해 23만7519원 74전을 입금했다. 미쓰이물산의 당좌수표에 현금 8700원 4전을 합해 입금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종호는 “당시 이용익은 내로라하는 세도대신이요 금광 수십구를 경영하던 백만장자인 만큼 수중에 20만~30만원의 현금은 있었을 것”이라고 제일은행의 주장을 반박했다. 더욱이 꼬리에 생뚱맞게 붙은 ‘4전’은 제일은행의 주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문제의 본질은 자금의 성격이나 예금의 시효가 아니었다. 자금이 공금이든 사재이든 예금주의 승인 없이 은행이 임의로 개인명의의 예금을 다른 계좌로 돌려놓을 수 있는지가 사건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재판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1심과 2심 재판에서 승패를 가름한 것은 예금의 ‘시효’였다.
1심인 도쿄지방재판소와 2심인 도쿄복심법원은 30년이나 지난 예금은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예금도 채권에 준해서 시효를 가진다는 제일은행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예금에 시효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 역사상 첫 판결이었다. 그러나 3심인 대심원에서 이 문제는 번복됐다. 대심원은 당좌예금에는 시효가 없으니 다시 심리하라며 2심 판결을 파기해 도쿄복심법원으로 사건을 환송했다.
시효 문제가 사라진 후에는 예금된 자금의 성격 문제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도쿄복심법원의 재심에서는 예금이 이용익의 사재다, 황실의 내탕금이다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2심 법원은 다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원고에게 한 차례 승리를 안겨주었던 대심원은 확정판결에서는 피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후 이현재 명의의 재심 청구는 대심원에서 각하됐다.
함경북도 명천군 이현재는 지난 1930년 부친 이용익이 내장원경으로 재임 중 1902년 제일은행 경성지점에 예금한 89만3967원의 지불청구소송을 제기한 이래 9년 동안 법정공방 결과 대심원에서 원고 패소의 확정판결을 내렸는데, 이에 불복 재심을 요구했던바 21일 대심원으로부터 재심 청구 각하 판결을 내렸다. 원고의 예금은 이용익의 소유가 아니라 궁내부의 내탕금이고, 이용익이 살아있을 때 내장원경 윤웅렬의 명의로 변경되었고, 대부분 지불했을 뿐만 아니라 잔액은 시효에의해 소멸했다는 것이 확정 판결 이유였다. 원고는 그렇다고 그만둘 수 없어 재심을 신청한 것이라 한다. (‘몽환의 80만원’, ‘동아일보’ 1938년 11월22일자) |
1907년부터 조부의 예금을 찾기 위해 25년간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이종호는 1932년 1심 판결도 보지 못한 채 협심증으로 사망했다. 그 뒤 소송은 이종호의 아우 이종관이 주도했다. 1930년부터 9년을 끌면서 진행된 여섯 번의 재판은 1승5패의 초라한 성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것으로 이용익의 백만원 예금은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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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말아먹은 대신들은 나랏돈 빼먹는 것으로도 모자라 서로의 사재까지 삼키려고 이전투구를 벌였다. 이용익의 33만원 예금은 따지고 보면 이용익의 사재도, 황실의 내탕금도 아닌 백성의 고혈(膏血)이다. 그리고 그 거금은 언제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쓰였는지도 확인되지 않은 채 사라져버렸다. 백성의 고혈이 줄줄 새어 나가니 어찌 나라가 부강해질 리 있겠는가. ‘이용익 백만원 사건’을 돌이켜보면, 나라가 망하게 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