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불현듯 세상에 나와 기억에도 없는 유아기를 보내고, 자아의 개념을 깨닫고 그 자아를 부정하면서 반항기를 겪고, 세상이 싫어져 방황하다 주위를 둘러본 끝에 사회에 순응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건설적인 삶을 산다고 생각하다가도 이따금 ‘답습’이라는 단어가 치밀어오를 때가 있다. 살아가느냐, 살아지느냐. 멀찍이 떨어져 자신의 삶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인간은 이처럼 다양한 속성을 상황에 따라 선택적으로 발현한다. 자신이 몸 기대어 살고 있는 자연과 타인을 사랑하면서도 해치게 되는 역설은 인간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이다. 사랑을 핑계로 대상에 대한 독점과 지배를 정당화하려 하기 때문이다.
‘삶’은 철학의 기본적인 주제로서 모든 대학 입시에 자주 출제되는 논제이다. 그러므로 삶에 대해 깊이 사유하면서 자신의 관(觀)을 세워야 한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은 인상파 김기덕 감독이 삶의 희로애락을 사계절에 비유해 청아(淸雅)한 수묵화처럼 그려낸 작품이다. 기가 육체를 만들고 육체가 단풍처럼 변하고 썩어 이슬로 땅에 스며드는 사람의 특성을 사계절의 반복과 같다고 가정하고, 육체적 성장에 따라 사물에 관한 사유 체계도 점점 성숙해감을 보여준다. 인과응보 또는 업보를 나타내기 위한 구조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비교적 단순하다. 사계절에 빗댄 수도승의 인생은 죄 없는 생명체에 돌을 매달아 괴롭힌 ‘인(因)’이 욕망과 집착이 부른 분노와 살인으로 치닫는 ‘과(果)’로 응보하는 과정으로서 그 이야기를 드러내는 이미지 주조 능력은 압도적이다.
계절마다 변하는 사찰 주변의 풍경을 담아낸 화면도 빼어나게 아름답다. 이 작품의 공간 배경은 ‘호수에 떠 있는 절’로서, 고립과 도피의 공간이자 자유와 해탈의 공간이라는 양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계절에 따라 천진한 동자승이 소년기, 청년기, 중년기를 거치고 마침내 자신을 가르치던 노스님의 나이가 된다. 영화는 그의 등에 매달린 돌덩이 같은 고뇌와 더불어 인생이 흘러가는 과정을 호수 에 떠 있는 사찰의 아름다운 사계 위에 그려낸다.
업을 안고 시작한 人生
깊은 산속 주산지 호수에 단아하게 떠 있는 사찰에 노승(오영수 분)과 동자승(김종호 분)이 기거하고 있다. 지척에 있는 뭍으로 가는 교통수단은 조그마한 나룻배 한 척뿐이다.
▶ 봄-업 : 장난에 빠진 아이, 살생의 업을 시작하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 노승과 동자승이 나룻배를 타고 호수를 가로질러 뭍의 산으로 올라간다. 동자승이 산을 오르내리며 약초를 캐기 시작한다. 약초를 캐다 뱀을 발견하고 손으로 잡아 멀리 던져버린다. 개울에서 잡은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을 실로 꽁꽁 묶고는 뒤에 돌멩이를 매달아놓고 깔깔대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돌에매달린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은 괴로워 몸부림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승은 잠든 동자승의 등에 돌을 묶어둔다. 잠에서 깬 동자승이 울먹이며 힘들다고 하소연하자 노승은 잘못을 되돌려놓지 못하면 평생의 업이 될 것이라 이른다.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은 지금 어떻게 되었겠느냐?”
“잘못했습니다.”
“가서 찾아서 모두 풀어주고 오너라. 그럼 풀어주마.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 중 어느 하나라도 죽었으면 너는 그 돌을 평생 동안 마음에 지니고 살 것이다.”
이렇게 동자승이 재미 삼아 다른 생명에 가한 폭력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면서 어떤 고뇌에 휩싸이게 되는지, 그리고 그 고통의 자장(磁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떤 몸부림을 치게 되는지 영화는 정적인 화면 속에 주제의 질감을 수채화처럼 이어간다.
▶ 여름-욕망 : 사랑에 눈뜬 소년, 집착을 알게 되다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 어느새 동자승이 17세 소년(서재경 분)으로 성장해 소년승이 되었을 때, 사찰에 동갑내기의 병약한 소녀(하여진 분)가 요양하러 들어온다. 소녀를 데리고 온 어머니(김정영 분)가 노승에게 묻는다.
“나을 수 있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마음의 병 같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면 몸도 편안해지겠지요.”
소녀의 어머니가 떠나고 나자 소년승의 마음에 소녀를 향한 뜨거운 사랑의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소녀를 나룻배에 태워 뭍에 있는 산의 개울로 데려간다. 두 사람은 물고기를 잡고 놀면서 서로에게 관심을 나타낸다.
다음날에는 소녀와 호수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더욱 친숙한 관계가 된다. 두 사람은 뭍에 있는 산의 바위에서 사랑을 나누고 나서 사찰로 함께 돌아온다. 소년승은 밤에 자다가 소녀가 자는 방으로 가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다음날 아침 소년승이 소녀에게 묻는다.
“이제 안 아파?”
“하나도 안 아파. 신기해.”
“안 보면 미칠 것 같아. 왜 이러지?”
소년승과 소녀는 나룻배에서 서로 껴안고 잔다. 아침에 일어나 이 모습을 지켜본 노승이 나룻배 밑의 구멍을 열어 물이 들어오게 한다. 배에 물이 차자 두 사람은 놀라서 깬다.
“잘못했습니다.”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니라.”
노승이 소녀에게 묻는다.
“이제 아프지 않으냐?”
“네.”
“그게 약이었구나. 이제 다 나았으니 떠나거라.”
그러자 소년승이 애원하듯이 말한다.
“안 됩니다. 스님!”
“욕망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살의를 품게 한다.”
노승이 직접 소녀를 나룻배에 태워 떠나보낸다. 소년승은 소녀를 향한 그리움과 욕망을 잠재울 수 없어 세속의 정을 잘라내지 못하고 사찰을 떠난다.
순환, 다시 시작되는 봄
▶ 가을-분노 : 절망에 빠진 청년, 고통으로 몸을 떨다
어느덧 낙엽이 지는 가을. 노승은 뭍으로 나가 사온 물건을 싼 신문지를 펼치다 ‘30대, 아내 살해 후 도주’라는 기사를 보게 된다. 범인의 사진도 함께 실려 있다. 바로 10여 년 전에 사찰을 떠난 소년승이 청년(김영민 분)이 되어 살인을 저지른 것이었다. 청년은 배신한 아내를 죽인 살인범 신분으로 사찰로 도피해온다.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노승이 말을 건넨다.
“많이 컸구나. 그래 그동안 잘 살았느냐? 재미있는 얘기 좀 들어보자.”
청년이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노승이 다시 말한다.
“속세가 많이 괴로웠나 보다.”
“절 좀 그냥 내버려두세요. 괴롭습니다.”
“뭐가 그리 괴로워?”
“난 사랑을 한 죄밖에 없습니다. 내가 원한 건 그 여자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걘 다른 사람을 만났습니다. 나말고요.”
“그랬구나.”
“그게 말이 됩니까? 나만 사랑한다고 해놓고….”
“속세가 그런 줄 몰랐더냐? 가진 것을 놓아야 할 때가 있느니라. 내가 좋은 걸 남도 좋은지 왜 몰라?”
청년은 가을의 단풍만큼이나 붉게 타오르는 분노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폐(閉)’라고 쓴 종이에 물을 묻혀 눈과 코와 입에 붙이고 자살을 기도한다. 노승은 그를 매달아놓고 모질게 매질한다. 노승은 고양이 꼬리에 먹을 묻혀 사찰의 마루에 반야심경을 써놓고 청년에게 칼로 한 글자씩 새기며 마음을 다스리라고 한다.
“남을 쉽게 죽인다고 해서 자기 자신도 쉽게 죽일 수는 없다. 칼로 이 글자들을 다 파거라. 한 자씩 파면서 분노를 마음에서 지워라.”
사찰로 형사들이 찾아오고 청년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 잡혀간다. 노승은 나룻배에다 장작을 쌓아놓고 자신의 입과 코와 눈과 귀에다 폐(閉)라고 쓴 종이를 붙인다. 그리고 촛불에다 불을 붙여 스스로 다비식을 치르며 숨진다.
▶ 겨울-비움 : 성찰하는 중년, 내면의 평화를 구하다
영화가 마무리되면서 주제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겨울 단락에는 김기덕 감독이 직접 출연해 지난 인생을 성찰하는 구도자적 모습을 표현한다.
호수마저 꽁꽁 얼어버린 겨울. 형기(刑期)를 마친 중년의 남자(김기덕 분)가 폐허가 된 산사로 돌아왔다. 그는 노승의 사리를 수습해 얼음 불상을 만들고, 겨울 산사에서 심신을 수련하며 내면의 평화를 구하는 나날을 보낸다.
추운 겨울날 사찰을 찾아온 이름 모를 여인이 어린아이만 남겨둔 채 언 호숫가를 건너가다 물에 빠져 숨진다. 결국 중년의 남자는 아기를 키우면서 비로소 가슴을 짓누르던 압박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게 된다. 남자는 몸에다 절구를 매달고 산을 오르는 고행에 나선다. 이때 명창 김영임의 ‘정선아리랑’이 흘러나온다. 애끊는 노랫가락이 전율을 느끼게 한다.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포스터.
이제 노승이 된 남자는 어느새 자라 동자승이 된 아이와 함께 사찰에서 평화로운 봄날을 보내고 있다. 동자승은 옛날 그 봄의 아이처럼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의 입 속에 돌멩이를 집어넣는 장난을 치며 깔깔댄다. 영화는 이 장면을 보여주면서 반복되는 인생의 사계를 암시한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은 김기덕 감독의 아홉 번째 영화다. 김 감독은 ‘사마리아’로 2004년 베를린영화제 감독상, ‘빈 집’으로 2004년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화두는 인간 내면에 있는, 또는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 의해 강요된 폭력성과 잔인함이다. 그는 폭력성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풀어내 항상 논쟁의 핵심에 놓였다. 그는 냉혹한 사회에서 겪은 좌절의 상처와 분노를 오래 달군 칼끝으로 상처를 후벼파듯 그려왔다.
이처럼 사건과 인물을 고통의 극한까지 몰고 가던 이전 작품들에 비하면 훨씬 품이 넓어지고 시선도 부드러워졌다. 다섯 가지 소주제로 나눠진 이야기는 둥그런 곡선을 밟으며 조용히 순환하고, 탁 트인 화면은 눈에 낀 오염물을 씻어낼 듯 아름다운 풍경을 흘려보낸다. 세상을 보는 감독의 눈이 훨씬 편안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은 스위스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청년비평가상을 비롯해 4개 상(賞)을 받았으며, 2004년 러시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릴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는 황금양(羊)상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또한 국내에서는 2003년 청룡영화상 작품상과 2004년 대종상영화제 작품상을 수상했다.
영화 속 논술·구술 워밍업
▼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서 계절에 비유한 인간의 삶을 생각하면서 사계절의 인생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핵심 기본 논제
▼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은 인생의 무상함을 깨우치고 도(道)에 정진하는 삶을 강조하고 있다. 인생에 대한 깨달음의 관점을 현대인의 삶에 적용해보고, 이와 관련해 바람직한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술하시오.
예시 답안
현대사회에서는 물질적 풍요와 생활의 안정을 목적으로 하는 세속적인 삶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를 발견하고 깨달음을 통해 주관적인 행복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동양의 불교는 해탈의 경지에 오르는 것을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다. ‘세속적 욕망의 덧없음’을 깨닫는 소승적(小乘的) 차원을 뛰어넘어 이타주의에 입각해 인간을 구원하는 대승적(大乘的) 차원으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한 개인의 깨달음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사회를 구원하고 이바지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즉 개인의 발전이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 사회의 발전이 개인의 발전에 기여하는 관계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의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자아의 발견을 강조하면서 ‘나는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나누어 접근했다. 이것을 그는 소망과 능력과 의무라는 세 변으로 이뤄진 하나의 삼각형으로 보았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능력이나 의무에 비해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소망한다. 이때는 자제력을 발휘해 소망이라는 변을 줄여 다른 두 변과 엇비슷하게 맞추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편 능력이라는 변을 부단히 늘임으로써 억눌러왔던 소망을 조심스럽게 이루는 적극적인 방법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회 속에서 규정되는 나의 위치를 찾아 의무인 자아의 변을 늘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현대 인간의 삶은 물질적 조건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물질적 조건의 충족은 인간에게 윤리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윤택한 삶을 가능하게 하지만, 건전한 사회 규범과 윤리적 절제로 제한되지 않을 때는 도리어 인간의 삶을 황폐화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윤택한 삶을 누리려면 탐욕과 소비주의적 성향으로 가득 찬 소유 지향의 낡은 삶에서, 창조적이고 기쁨을 이웃과 공유하는 존재 지향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반복되는 인생의 사계를 그린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의 한 장면.
(가)와 (나)는 현대인의 삶의 양식의 어떤 측면을 보여주는 글이다. 이 두 글에 비추어, (다)의 시 화자가 희구하는 삶의 방식을 설명하고 이러한 삶의 방식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1200∼1400자(한양대 1999 정시)
▼ 제시문
(가) 1만년이나 계속되어온 농경사회가 한두 세기 만에 일어난 산업사회에 밀려나고 바야흐로 탈(脫)산업사회화 시대가 우리 앞에 전개되기 시작했다. 최근 고도로 진화된 산업사회에서는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량이 15년마다 배로 늘어나고 있는데 이토록 혁명적인 변화는 일찍이 없었다. 더욱이 배증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점차 단축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의 습관, 신조, 생활양식 등에 폭넓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처럼 고속으로 변화하는 생활양식에 편승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으며, 생활의 페이스가 늦어지면 오히려 걱정하거나 언짢게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제임스 윌슨의 조사에 따르면 유럽의 우수한 과학자가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주하는 이유의 하나는 빠른 생활의 페이스였다. 실제로 북미로 이주한 517명의 영국 과학자나 의사에게 설문한 결과, 그들이 이주를 결정하게 된 데는 급료가 많고 연구 설비가 나은 점도 작용했지만 그보다는 빨리 돌아가는 사회적 템포가 커다란 배후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다른 이유보다 북미의 빠른 시대감각을 선택한 것이다.
유사한 예를 최근 파리에서 개점한 미국식 트럭 스토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처음 이 가게가 문을 열었을 때는 상당한 반발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옥외의 비스트로(주점)에서 1∼2시간을 소비하며 한 잔의 아페리티프를 마시던 프랑스인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트럭 스토어에서 산 밀크셰이크를 마구 들이켜게 됐다. 최근에는 트럭 스토어식 가게가 널리 퍼지면서 3만년 역사의 비스트로는 문을 닫게 됐다. ‘타임’지(誌) 기사를 인용하자면 이들 가게는 ‘즉석 주문’의 희생이 된 것이다.
어떤 히피족이 일반사회에서 뛰쳐나와 한가로운 생활을 하거나 또는 다른 생활을 찾는 까닭은 기술문명의 가치에 대한 혐오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긴박한 생활 페이스에서 무의식중에 도피하려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나) 산업시대의 시작 이래 여러 세대가 자연을 지배하고 물질적 풍요를 가져오며 최대 다수에게 최대 행복을 가져다주고 방해받지 않는 개인적인 자유가 보장되리라는 약속을 믿어왔고 그 약속이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기계에너지와 핵에너지가 동물의 힘과 인간의 노동력을 대치하고, 컴퓨터가 인간의 두뇌를 대신하는 산업발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우리에게 무한한 생산과 무한한 소비의 길이 열렸으며, 기술이 우리를 전능(全能)하게 하고 과학이 우리를 전지(全知)의 존재로 만들었다고 믿게 됐다.
그러나 산업시대는 결국 이 위대한 약속을 이행하는 데 실패했고,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즉 모든 욕망의 무한정한 충족은 안녕을 가져다주지 않으며 또한 행복의 길로 이끌지도 못할뿐더러 최대의 쾌락으로 가는 길조차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또한 우리의 사상, 감정, 취미가 정부와 기업 그리고 이들이 지배하는 대중 매체에 의해 조종되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관료적 기계 장치 속의 톱니바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우리가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꿈은 끝나버렸다.
이제 우리는 사유재산, 이윤, 힘을 지주(支柱)로 삼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리하여 취득하는 것, 소유하는 것, 이윤을 남기는 것을 산업사회에 사는 개인의 신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인식하게 됐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재산을 획득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데 전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좀처럼 생존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 양식을 가장 당연한 생존양식으로, 심지어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생활양식으로 알고 있다.
(다)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고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문제 해결을 위한 Tip
▶ 논제는 현대 물질문명 사회에서 시의 화자(話者)가 희구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견해를 묻고 있다. (가)와 (나)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삶의 방식에서 (다)의 시가 희구하는 삶의 방식이 가지는 의미와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해야 한다.
▶ 제시문 (가)∼(다)는 현대인의 삶의 양식을 여러 측면에서 보여준다. (가)는 탈산업사회화 시대에 급격한 생활양식의 변화와 그에 적응해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는 삶을 추구하는 히피를 소개하고 있다. (나)는 산업시대가 물질적 풍요와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주리라는 믿음이 깨지면서 개인은 ‘관료적 기계 장치 속의 톱니바퀴’에 불과하다는 존재성의 상실과 소유 양식을 당연한 것으로 믿고 살게 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다)는 (나)와는 반대로 인간의 정신적 고향인 자연으로 돌아가 생명의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한가롭고 여유 있는 삶을 살기를 희구하고 있다.
▶ (가)와 (나)의 삶의 방식에 비추어 볼 때, (다)의 삶의 방식을 현실에 대한 도피로 볼 수도 있고, 인간의 존재 양식이 상실된 시대에 새로운 존재 양식을 찾기 위한 모색으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자세를 취하든 간에 주관적 감정에 치우쳐 감상적인 글이 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다)의 삶의 방식이 바람직하다 하더라도 모두 자연으로 돌아가 한가롭고 여유 있게 산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므로 산업사회에서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 즉 생명존중 등 인간의 존재 양식이 바로 서는 삶 속에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쪽으로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면 무난한 논술이 될 것이다.
▶ (가)는 앨빈 토플러의 ‘미래의 충격’, (나)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에서 발췌했으며 (다)는 박목월의 시 ‘산이 날 에워싸고’이다.
예시 답안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다양하다. 다양한 삶의 방식은 각자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선택한 것이므로 가치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설정된 일정한 규범을 벗어나지 않는 한, 어떠한 삶의 방식이든 존중해야 한다.
(가)는 현대인의 생활 속도가 무척 빨라지고 있는 예를 통해 과거와는 다른 현대사회의 스피디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빠른 속도에 적응해 사회적으로 뒤처지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소외되거나 스스로 사회로부터 도피하는 삶의 방식도 드러낸다. (나)는 산업사회 이후 현대인이 추구한 소유 양식의 삶이 인간의 행복을 최대한 보장하리라 믿어왔지만 그 믿음이 깨진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기술의 발달과 물질적 풍요가 오히려 개인을 사회의 부속품으로 만들어버리고 이윤의 추구, 물질적 가치의 존중은 존재 양식적 삶을 깨뜨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취득하고, 소유하고, 이윤을 남기는 소유 양식적 삶의 방식을 유일한 생활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가)와 (나)에 나타난 현대인의 삶이 사회적 변화 속도에 적응하기 위해 ‘즉석적’이 되어버리고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함으로써 본질적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음에 견주어 (다)의 시에 나타난 화자는 자연과 더불어 한가롭게 살아가는 삶을 희구하고 있다.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는 시의 구절을 통해 현재 화자가 처한 현실의 삶이 (가)와 (나)에 나타난 현대인의 삶과 다를 바 없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화자는 현대사회의 속도와 물질 가치의 소용돌이 속에 위말린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들찔레, 쑥대밭, 구름, 바람’이 암시하는 생명의 본질 가치와 자연성을 추구하는 삶을 원하고 있다.
시 속 화자가 희구하는 삶의 방식은, 맹목적인 소유 추구에 따른 인간관계의 파괴와 본질 가치의 상실을 극복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게 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이윤, 실용 등으로 대표되는 물질적 가치와는 다른 사랑, 자유 등과 같은 정신적이고 본질적인 가치가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 속에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가족간의 따뜻한 사랑, 친구나 이웃과의 거짓 없는 만남 그리고 ‘진정한 나’와의 만남이 있고, 우리는 이러한 만남을 통해 소유 양식의 삶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사회 속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현실을 생각할 때 이러한 삶의 방식은 사회 부적응에 대한 핑계나 현실 도피의 방법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 속의 화자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의 긍정적인 측면과 어차피 사회를 떠나서 고립적으로 살 수 없는 우리들 삶의 조건을 생각한다면, 현실의 불합리성을 극복하기 위해 이러한 삶의 방식을 현대를 살아가는 정신적 위안으로 삼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닐까.
관련 기출문제
다음 세 글에 나타난 삶의 태도를 밝히고, 그것이 현대사회에서 갖는 의의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사례를 들어 논술하시오. 1200자(±100자) (전남대 2001 정시)
▼ 제시문
(가) 자공(子貢)이 남쪽의 초(楚)나라를 여행하고 진(晉)나라로 돌아오려고 한수(漢水) 남쪽을 지나다가 한 노인이 마침 밭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노인은 굴 속 우물에 들어가 항아리에 물을 담아내어 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애써 열심히 일했지만 그 효과는 아주 작았다.
자공이 말했다. “여기에 기계가 있으면 하루에 100이랑까지도 물을 줄 수가 있습니다. 힘을 덜 들이고도 효과는 큽니다. 노인께선 그렇게 해보실 생각이 없으신지요?”
노인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고 말했다. “어떻게 하는 거요?”
자공은 대답했다. “나무에 구멍을 뚫어 기계를 만드는데, 뒤쪽은 무겁게 하고 앞쪽은 가볍게 합니다. 그러면 물을 퍼 올리는 것이 콸콸 넘치도록 빠릅니다. 그 기계를 두레박이라고 합니다.”
밭일을 하던 노인은 순간 낯빛을 붉혔다가 이내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내 스승에게 들었소만, 기계 따위를 갖게 되면 그 기계로 말미암은 일이 반드시 생겨나고, 그런 일이 생기면 기계에 얽매이는 마음이 생겨나는 법이라오. 그런 마음이 있게 되면 곧 순진결백(純眞潔白)한 본래 그대로의 것이 없어지게 되고, 그것이 없어지면 정신이나 본성의 작용이 안정되지 않게 되오. 정신과 본성이 안정되지 않은 자에겐 도(道)가 깃들이지 않소. 내가 두레박을 몰라서 쓰지 않는 게 아니라 부끄러워서 쓰지 않을 뿐이오.”
(나) 점심을 먹고 잠시 낮잠을 자던 사람이 깨자마자 고개를 쳐들고 “무슨 뉴스 없소?” 하고 물어본다. 마치 다른 모든 사람이 보초라도 서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30분마다 깨워달라고 하고 잠을 자는데 이 사람도 같은 생각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깨워준 답례로 자기의 꿈 얘기를 해준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뉴스는 아침식사만큼이나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된다. 그는 마치 “이 세상 어디서 그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든 상관없으니 무슨 새로운 일이 있었으면 꼭 좀 알려다오” 하는 태도로 커피와 롤빵을 들면서 신문을 읽는다. 그가 읽고 있는 뉴스는 와치토 강변에서 어떤 사람이 싸우다가 눈이 빠진 사건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 세상이라는 어둡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동굴에 살고 있으며, 그 자신 역시 퇴화되어서 흔적만 남은 눈을, 그나마 하나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하고 있다.
나는 우체국이 없어도 별 불편 없이 지낼 수 있다. 우체국을 통해 중요한 연락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좀 비판적으로 말하면, 내가 지금까지 받은 편지 중에서 우표 값이 아깝지 않은 것은 한두 통밖에 없었다. ‘페니 우편제도’는 “1페니 줄 테니 자네 생각을 알려주게” 하고 농담하던 것이 이제 실제로 1페니를 내게 된 제도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는 신문에서도 기억해둘 만한 뉴스를 읽은 적이 없다고 확신한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당했다든가, 살해되었다든가, 사고로 죽었다든가, 어떤 집이 불에 타고, 어떤 배가 침몰하고, 어떤 증기선이 폭발했다든가, 어떤 소가 서부 철도에서 기차에 치이고, 어떤 미친개가 죽임을 당했다든가, 겨울에 메뚜기떼가 나타났다든가 하는 따위의 신문 기사는 두 번 읽을 필요가 없다. 한 번이면 충분하다. 원리를 알면 됐지 구태여 수많은 사례와 응용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철학자에게 뉴스라는 것은 모두 하찮은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을 편집하거나 읽는 사람은 차나 마시고 있는 늙은 부인네들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깃거리에 걸신들린 사람이 적지 않게 있는 것 같다. 듣자하니 얼마 전 어느 신문사 사무실에서는 방금 도착한 해외 뉴스를 알려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통유리 몇 장이 깨져 나갔다고 한다.
뉴스란 도대체 무엇인가? 새로운 것보다는 시간이 지나도 낡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더 중요한가. 위(衛)나라의 대부 거백옥(據伯玉)은 공자(孔子)에게 사람을 보내 그의 근황을 물었다. 공자는 사자(使者)를 자기 옆에 앉히고 이렇게 물었다. “그대의 주인은 요즘 무엇을 하시는가?” 사자는 공손히 대답했다. “저의 주인께서는 자신의 허물을 줄이려고 하시지만 여의치 않사옵니다.” 사자가 간 다음에 공자는 말했다. “훌륭한 사자로다. 참으로 훌륭한 사자로다.”
때때로 사람들은 고전 연구가 더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에 밀려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탐구자는 그것이 어떤 언어로 씌어졌든 얼마나 오래되었든 항상 고전을 연구할 것이다. 고전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고귀한 생각을 기록한 것이 아니겠는가. 고전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신탁이며, 그 안에는 가장 현대적인 물음들에 대한, 아폴로의 신탁이나 제우스의 신탁도 밝히지 못한 해답들이 들어 있다. 고전 연구를 그만두는 것은 자연이 낡았다고 해서 자연 연구를 그만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달갑게 여기지 않는 전기 회사에 매여 있다. 나는 전기를 덜 사용함으로써 거기에 덜 매이려고 노력한다. 일을 하면서도 나는 가능한 한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농부로서 나는 일을 대부분 말(馬)을 이용해서 하며, 작가로서 나는 연필이나 펜으로 종이에 글을 쓴다.
내 아내는 30여 년 전에 구입해서 지금도 잘 작동하고 있는 로열 스탠더드 타자기로 내 글을 쳐준다. 타자하면서 잘못된 것이 있으면 가장자리에 조그맣게 표시를 한다. 아내는 내 글의 가장 훌륭한 비평가인데, 나의 습관적인 실수나 약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또 무엇을 써야 할지를 잘 알고 있으며, 어떤 때는 심지어 나보다도 더 잘 안다. 나는 우리가 기분 좋게 잘 돌아가는 문학의 가내공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지금까지 꽤 많은 사람이 컴퓨터를 사면 많은 것이 개선될 수 있다고 나에게 말해왔다. 내 대답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훌륭한 이유가 있다. 나는 작가로서 내 일이 노천 탄광에서 나오는 석탄에 직접적으로 의지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기가 싫다. 글을 쓰는 나의 행위가 자연을 약탈하는 일에 연루되어 있다면 어떻게 양심적으로 그에 반대하는 글을 쓸 수 있겠는가. 같은 이유로 나에게는 전깃불이 필요 없는 낮 시간에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전기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컴퓨터 제조 회사들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힘들게 농사일을 하고 있거나 농사를 망쳐버린 사람에게 값비싼 새 장비를 사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도록 유혹하는 광고를 보아왔다. 책이 필요한 공립학교에 컴퓨터를 들여놓게 한 그들의 광고 술책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미래에는 컴퓨터가 텔레비전만큼 보편화하리라는 사실이 내게는 감명을 주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다. 나는 컴퓨터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 즉 평화, 경제적 정의, 생태계의 건강, 정치적 정직성, 가족과 사회의 안정, 그리고 그밖의 훌륭한 일들에 우리를 한걸음도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컴퓨터는 나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할까? 우선 나는 지급 능력 이상으로, 또 달갑지 않은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 이상으로 돈을 지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돈 문제만이 아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기술상의 혁신은 항상 ‘낡은 모델’을 버릴 것을 요구하는데, 이 경우 ‘낡은 모델’은 로열 스탠더드 타자기만이 아니라 나의 비평가요 가장 가까운 독자이며 동료인 아내까지 포함한다. 즉 대체되는 것은 물건만이 아니라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기술 혁신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기술적으로 현대적인 작가가 되고자 한다면 내가 의지하고 소중히 여기는 관계들을 희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컴퓨터를 갖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어느 누구라도 컴퓨터를 사용함으로써 연필로 쓰는 것보다 더 잘 쓰거나 더 쉽게 쓸 수 있다고 믿지 않으며, 그런 생각이 불쾌하기까지 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단테의 작품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작품을 쓰는 데에 컴퓨터를 사용했고 이 뛰어난 점이 분명히 컴퓨터의 사용 때문이라면, 그때는 나도 컴퓨터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말하겠다. 그래도 컴퓨터를 사지는 않을 테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Tip
▶ 논제는 첫째, 제시문에서 드러나는 삶의 태도를 밝히라는 것이다. 둘째로 그런 삶의 태도가 현대사회에서 어떤 의의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셋째로 이 과정에서 적절한 사례를 활용하라는 주문을 덧붙였다.
▶ 제시문에는 모두 기술 문명의 편리함이나 실용성에 매몰되지 않는 태도가 나타나 있다. (가)에서 노인은 효율적으로 물을 긷는 기계가 있음을 알면서도 그런 기계에 의존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기계에 의존하다 보면 본래의 깨끗한 마음을 잃어버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나)에서는 새로운 것과 실용적인 것을 중시하는 풍조에 반대하고 고전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는 컴퓨터의 편리함보다는 그것 때문에 잃게 될 더 중요한 가치들에 대한 성찰이 나타나 있다.
▶ 제시문에 나타난 삶에 있어서 자기 성찰의 태도를 통하여 현대사회가 추구하는 편리함과 효율성에 대한 반성을 해야 한다. 편리함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사례로 휴대전화와 인터넷으로 인한 인간관계의 단절 등을 들면서 이에 대처하는 바람직한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 의견을 개진할 수 있을 것이다. 논술 과정에서 지엽성-총체성, 도구적인 것-원리적인 것, 외형적 가치-내면적 가치, 효율성-내적 성숙, 양-질 등 여러 가지 대립적 삶의 태도를 다룰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대비적 쌍들 중 어떤 것을 서술의 기점으로 삼아, 그 상관관계를 현대사회에 비추어 보면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해야 한다.
▶ (가)는 ‘장자(莊子)’ 외편인 ‘천지(天地)’편의 한 구절이다. (나)는 19세기 미국의 뛰어난 저술가인 헨리 소로(Henry D. Thoreau) 작 ‘월든(Walden)’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다)는 미국의 저명한 시인이며 문필가인 동시에 생태운동 이론가이며 실천가인 웬델 베리(Wendell Berry)의 ‘인간의 목적(What Are People For)’에 실린 ‘나는 왜 컴퓨터를 안 살 것인가’의 일부이다.
예시 답안
기술 문명의 발달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우리의 삶은 기술 문명의 영향력을 벗어나서는 영위하기 힘들 정도이며, 그만큼 기술 문명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생활의 편리함은 거의 대부분이 과학 기술에 힘입은 것이다. 하지만 기술 문명의 발달은 부정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는데, 인간의 기계화나 인간의 존엄성 상실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제시문 (가)에 나오는 노인은 효율적으로 물을 긷는 기계가 있음을 알면서도 그런 기계에 의존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기계에 의존하다 보면 본래의 깨끗한 마음을 잃어버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노인의 태도는 기술 문명에 대한 의존과 맹신에 빠져 있는 현대인들이 되새겨야 할 교훈을 주고 있다. 제시문 (나)는 새로운 것과 실용적인 것을 중시하는 풍조에 반대하고 고전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간과 삶의 근본 문제들에 대한 성찰 없이 효용성에만 매달려서는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제시문 (다)에는 컴퓨터의 편리함보다는 그것 때문에 잃게 될 더 중요한 가치들에 대한 성찰이 나타나 있다.
결국 세 제시문에는 모두 기술 문명의 편리함이나 실용성에 매몰되지 않는 태도가 나타나 있다. 눈에 보이는 효용성을 추종하기보다는 내면의 가치를 더욱 중시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기술 문명이 우리에게 편리한 삶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편리함에 취해서 보다 중요한 인간관계를 잃어버리고 있다. 요즘 인터넷의 발달로 사람과의 아무런 접촉이 없이 온라인에서 각종 일들이 처리되어버린다. 그러다 보니 익명의 사회가 되었으며 인간적인 관계는 소원해졌다. 이것은 기술 문명의 편리함이 인간관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는 사례이다.
현대인들은 새롭고 실용적인 것에 이끌리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기술 문명의 발달로 몸이 편해질수록 마음은 건조해지고 인간관계는 더욱 삭막해지고 있다. 인간과 삶의 근본 문제들에 대한 성찰 없이 편리함과 효용성에 매달리는 것은 가치 있는 삶이 아니다. 보람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기술적 효용성에서 벗어나 내면의 가치를 중시하는 자기 성찰의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관련 기출문제
다음 제시문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숙명여대 2005 수시1학기)
삶의 기본적인 목적 중의 하나는 자신의 삶에 대해 의미와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나에 대한 타인의 평가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이 스스로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한 사람의 삶의 질(質)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지금까지는 삶의 조건을 설명해주는 물질적인 풍요나 사회적 성취도와 같은 객관적인 지표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자신이 삶의 주체로서 얼마나 삶을 향유하며 생활의 즐거움과 정신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느냐 하는 주관적 지표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위 글이 말하는 ‘삶의 질적 수준을 결정하는 주관적 지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시오.
문제 해결을 위한 Tip
▶ 제시문에서는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인 성취보다는 정신적인 만족이 삶의 질적 수준을 좌우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적 수준이나 성취를 간과하는 답변은 현실을 무시한 도식적인 답변이 될 것이다. 지문에도 나와 있듯이 삶을 향유하며 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려면 경제적인 능력이 필요하며, 정신적인 풍요는 경제적인 면과 성취를 이룰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답변은 정신적인 면을 강조하되 현실적인 필요조건으로서 물질적인 풍요와 사회적 성취를 거론해야 할 것이다.
예시 답안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던 시대에는 경제적인 가치가 최우선이었지만 경제적 풍요를 이룬 시대에는 경제가 곧 삶의 질과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사회에서의 물질 추구는 물신주의와 인간 소외를 낳았다. 이러한 반성으로서 ‘삶의 질(quality of life)’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삶의 가치관이 변하는 과정을 ‘조용한 혁명(Silent Revolution)’이라고 한다. 조용한 혁명이란, 물질적 풍요와 생활의 안정을 일차적 관심사로 여기던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 점차 심리적 만족을 중시하는 삶의 질 문제로 그 관심이 옮겨가는 것을 말한다. 이는 개인의 삶에서 자아의 발견과 그 실현이 중시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삶의 질이란, 한 개인이 삶에 대해 느끼는 긍정적인 정서와 주관적인 만족감을 가리킨다. 이렇듯 삶의 질은 해당 개인이 직접 체험해서 느끼는 감정이므로, 물질적 풍요가 삶의 질을 측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물질적인 풍요가 삶의 질과 상관없다고 말할 수 없다. 의식주와 관련된 생활 조건이 안정되어야, 그보다 더 높은 삶의 질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존이나 안전의 욕구가 충족된 상황에서 사랑·존경·소속감 같은 욕구가 생겨나며, 이는 ‘앎’과 ‘아름다움’에 대한 지적·심미적 욕구를 낳는다.
|
한편 삶의 질은 복지 지수와 즐거움 지수를 합친 통계학적 지수로 측정되기도 한다. 복지 지수란, 삶이 개선되고 진보되는 정도를 숫자로 측정한 물질적·객관적 지표다. 경제적 풍요, 범죄 공포로부터의 해방, 복지 정책, 의료 시설의 정도 등이 복지 지수의 항목이다. 즐거움 지수는 자신이 얼마나 삶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지에 대한 심미적·주관적 지표다. 직장 만족도, 삶의 목표 만족도, 사랑과 존경을 향한 욕구, 자아실현, 지적·심미적 만족감 등이다.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을 통해 삶의 질적 수준에 대한 주관적인 관점을 살펴보면 인간에게는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과 애정의 욕구, 타인으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으려는 욕구, 자신의 능력을 창의적으로 발휘하려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다고 했다. 이 중 자아실현의 욕구가 충족될 때 삶의 질이 충족됨을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