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호

‘독도 영유권 굳히기’를 위한 제안

울릉도에 공항 지어 독도 실효지배 강화하자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06-07-19 18: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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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 건설 중인 사동항 방파제를 강화해 100인승 중형 여객기와 해군과 해경의 초계기가 뜨고 내릴 수 있는 활주로로 바꾸고, 사동항에 고속정과 경비정이 정박할 수 있는 해군·해경용 부두를 만들어야 한다. 울릉도에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을 늘리고, 수련장을 건설해 독도 탐험에 나선 청소년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울릉도가 ‘빵빵’하면 독도 영유권은 자연적으로 확고해진다.
    ‘독도 영유권 굳히기’를 위한 제안

    13년째 계속되고 있는 울릉도 사동항 방파제 공사. 오른쪽에 있는 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어 터미널과 주기장으로 사용하고, 여기서 나온 돌로 방파제를 강화해 100인승 중형기가 뜨고 내릴 수 있는 활주로로 만들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매년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간에 독도 영유권 다툼이 반복되고 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독트린(4월25일 특별담화)을 발표했건만 우리의 독도 영유는 불안하기만 하다. 독도 영유를 더욱 확고히 하는 방법은 없을까.

    독도 영유를 확실히 하는 지름길은 일본과 전쟁을 해 이긴 다음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표현을 명문화한 강화협정(평화협정)을 맺는 것이다. 그러나 한일 간에는 전쟁을 할 이유도 없고, 전쟁을 해서도 안 되므로 이는 적절한 방법이 되지 못한다.

    강화협정은 종종 평화협정이나 기본조약으로 불리기도 한다. 강화협정은 전쟁을 치러 승부가 난 후 복교(復交)할 때 주로 쓰이는 명칭이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은 대립관계를 끝내고 외교를 회복해 평화관계로 들어간다는 내용의 기본조약을 맺었다. 기본조약의 핵심 사항은 상대의 국경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접국끼리의 갈등은 양쪽이 주장하는 영토가 겹칠 때 일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당시 한일 양국 사이에는 독도에 대한 영유 주장이 겹쳤다. 일본은 복교를 하면 한국을 식민지배한 데 대한 사과로 청구권 자금을 내놓고 대신 독도 영유권을 가져가려고 했다. 이 때문에 이승만 정권 시절 양국은 국교 정상화 회담을 진척시키지 못했다.

    박정희의 조용한 외교



    경제재건 자금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박정희 정부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제주도와 홍도는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중국과 일본은 이 섬이 한국 영토라는 데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유사 이래 한국인이 살았고 한국의 역사 공간으로 만들어 왔으니 당연히 한국 영토로 이해한다.

    박정희 정부는 ‘독도는 신라 시대 이래 한국이 영유한 섬이니 새삼 누구 땅이냐를 놓고 논의할 필요가 없다’는 전략을 택했다. 이승만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자백을 받아내려고 했으나, 박정희 정부는 ‘독도는 원래부터 한국 땅이고 영유권 다툼은 있어 본 적이 없으니, 독도 영유권 이야기는 꺼낼 필요조차 없다’는 주장을 들고 나간 것.

    그러나 일본측에서 본다면 박정희 정부는 이승만 정권과 달리 ‘독도는 한국 땅’임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 된다. 당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침략국’이라는 오명을 빨리 벗어던지기를 원했다. 때문에 무기를 수출하지 않겠다고 하는 등 평화 애호국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식민지배를 당한 한국과 복교한다면, 이는 일본이 평화애호국으로 돌아섰음을 보여주는 좋은 ‘이벤트’가 된다. 이러한 계산하에 일본은 독도 영유권 문제를 건너뛰어 박정희 정부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일본은 협상 과정 내내 독도 영유권 문제를 거론했다. 이 때문에 협상에 참여한 김종필(JP)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차라리 독도를 폭파했으면 좋겠다”는 푸념까지 하게 됐다.

    기본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일본은 기본협정에서 독도 문제가 합의되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정기적으로 한국측에 독도 영유권 문제를 논의하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은 ‘독도는 영유권 분쟁이 있어 본 적이 없다’며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차이가 JP 발언의 진의를 의심하던 일부 국민을 자극했다. 반일(反日) 성향이 강한 이들은 박정희 정부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것은 켕기는 데가 있기 때문일 것으로 의심했다.

    이들은 압축성장을 한다는 이유로 독재를 하는 박 정권을 공격하기 위해 “청구권 자금을 받고 독도를 일본에 팔아넘겼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도 박 정부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이 주장이 옳다고 믿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 가운데는 정치인도 있었다.

    김영삼·노무현의 ‘시끄러운 외교’

    한국 정부의 무대응 전략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과 12해리 영해, 그리고 직선기선을 인정한 유엔 해양법 협약이 발효됐으니 1965년 체결된 한일어업협정을 폐기하고 새 협정을 맺자고 요구했다.

    유엔 해양법 협약 원칙 위에서 새 어업협정을 맺으면 득보다 실이 많으므로, 한국은 이에 응하지 않으려 했다. 한일어업협정은 어느 한쪽이 폐기를 통보하고 1년이 지나면 자동 폐기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국제법’인 이 협정을 폐기하는 것은 일본이 그토록 감추려고 한 호전성을 드러내는 것이 될 수가 있다.

    이 때문에 일본은 한일어업협정을 폐기한다는 통보를 한국에 보낼 수도 없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선택한 ‘묘안’이 중앙정부 관계자가 나서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이 미끼에 먼저 한국 언론이 걸려들고, 이어 대형 사냥감이 걸려들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했다. 포퓰리즘을 드러낸 발언이었다. 이로써 일본은 ‘독도는 영유권 다툼이 있는 섬’이라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97년 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외환위기가 일어나 두 나라에 많은 투자를 한 한국이 발목을 잡히게 됐다. 한국은 일본에서 돈을 빌려 이 나라들에 투자했는데, 일본이 한국이 빌려간 돈에 대한 만기를 연장해주지 않아 한국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에 빠지게 됐다.

    IMF 외환위기와 한일 어업 갈등은 김대중(DJ) 대통령이 집권해 일본과 새 한일어업협정을 맺고 만기연장 문제에 합의함으로써 풀리게 됐다. 새 협정은 어업협정이기 때문에 영토 문제는 논의하지 않았다. 이 협정을 맺을 때 한국은 오해를 없애기 위해 ‘영토 문제는 이 협정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단서를 집어넣었다.

    이때 독도가 있는 수역을 중간수역으로 결정했는데, 이것이 새로운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중간수역은 양국이 배타적 경제수역 선을 결정하지 못한 바다인데, DJ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를 ‘독도 영유권을 포기한 것’으로 보고, 비난을 퍼부었다. DJ는 지나친 대북 유화정책 때문에 비난을 받았으므로 그의 대한 비난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이런 자중지란이 노무현 정부 들어 확대됐다. 일본에서는 주로 시마네(島根)현 사람들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2005년 시마네현은 독도를 시마네현 영토로 선언한 고시(告示) 발표 100주년을 맞아, ‘다케시마(竹島)의 날’을 선포하고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일본의 47개 지방 정부 중 하나가 펼친 행사에 대해 한국의 전 언론이 대응하고 나서면서, 한국에서는 독도 영유권 확보가 핵심 이슈로 떠올랐다. 덕분에 일본은 또 한번 ‘독도는 영유권 다툼이 있는 섬’이라는 사실을 국제 사회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노 정부 내내 한일관계가 나빴는데, 지난 4월 일본은 보다 공격적인 방법으로 노 정부를 자극했다. 독도 근해로 해상보안청(한국의 해양경찰청) 배를 보내 수로 측량을 하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日, 독도 분쟁지역화 성공

    이에 노 대통령은 “독도 문제에 대한 대응방침을 전면 재검토하겠다”며 ‘일본의 물리적인 도발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겠다’ ‘세계 여론과 일본 국민에게 일본 정부의 부당한 처사를 끊임없이 고발해 나가겠다’ ‘일본 정부가 잘못을 바로잡을 때까지 국가적 역량과 외교적 자원을 모두 동원하여 노력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는 박정희 대통령 이래 일관해온 ‘조용한 외교’의 포기를 선언하는 독트린이었다. 노 대통령은 독도 정책을 이승만 대통령 시절로 되돌려놓았다.

    13개 해양경찰서를 거느리고 있는 해양경찰청은 1000t급 이상 대형 경비함을 20척 보유하고 있다. 5000t짜리 한 척, 3000t짜리 다섯 척, 1500t짜리 일곱 척, 1000t짜리 일곱 척이다.

    일본 해상보안청 측량선이 온다고 하자 한국 해양경찰청은 동해·속초·부산·제주 해양경찰서에 속한 18척의 경비함(중형 포함)을 동원해 방어 작전에 나섰다. 서해를 제외한 동·남해의 대형 경비함을 전부 동원한 것이다.

    해양경찰청 경비함이 일본 해상보안청의 측량선을 나포한다면 이는 세계적인 뉴스가 된다. 이어 독도 영유권 문제를 놓고 양측 해경이 대립했다는 해설이 쏟아질 것이므로 독도는 한일 양국간에 영유권 다툼이 있는 섬이라는 것을 온 세계에 알리는 결과를 낳는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이런 부담을 안고 ‘벼랑끝 전술’을 선택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뒀다. 일본이 측량선 출항을 포기한 것.

    그러나 이를 성공으로 자평하면 단견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은 독도를 분쟁 지역으로 알리는 성과를 거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 정부는 독도 영유권 문제 등을 다룰 동북아재단을 만들겠다고 했다. 동북아재단은 독도는 한국 땅임을 밝히는 논리를 생산해야 하는데, 과연 이들이 생산한 논리가 일본 국민과 세계 시민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일본이 독도를 넘보는 데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시끄러운 외교’는 일본을 도와주고 독도 영유권도 보장받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시끄러운 노선’을 선택한 이승만 대통령 시절 실질적으로 독도를 지켜낸 사람은 울릉도 주민이었다. 정부는 북한과 전쟁을 치르느라 독도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울릉도 주민에게 독도 주변은 중요한 어장이었다. 때문에 홍순칠씨를 비롯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의용수비대를 구성해 독도를 지켰다. 그러나 지금 독도 주변은 황금 어장이 아니다. 오징어잡이가 시들해지면서 울릉도의 경기는 크게 쇠퇴했다.

    1961년 1만8417명이던 울릉도 주민은 1974년 2만9810명까지 증가했으나 이후 쇠퇴를 거듭해 2005년엔 9550명으로 감소했다(1961년 이전은 정확한 통계가 없다). 오징어잡이가 쇠퇴한 지금 호박엿 하나만으로 울릉도 경기를 지탱하라는 것은 무리이다. 울릉도에는 대학이 없고 고등학교도 한 개뿐이라 주민들은 계속 육지로 떠나고 있다.

    airport + seaport

    이렇게 퇴조하기만 하던 울릉도 경기에 반짝 하는 불빛이 들어왔다. 지난해 일본이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한 것에 대한 맞불로 정부가 독도 자유 입도(入島)를 허용한 것. 그로 인해 울릉도를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들은 동해나 포항으로 간 다음 다시 반 나절 동안 배를 타고 울릉도를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울릉도 가기가 이렇게 힘들어서는 울릉도 경기가 살아나기 힘들다. 육지인들의 울릉도 여행은 쉬워져야 한다. 독도 관광이 중요한 생업 수단이 될 때 울릉도 사람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독도 방어에 나설 것이다. 독도의 배후지인 울릉도를 윤택하게 하기 위해선 울릉도를 관광지로 만들어야 한다.

    제주도가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될 수 있었던 첫째 조건은 공항이다. 마찬가지로 울릉도를 관광지로 개발하는 데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울릉도 공항이다. 울릉도에 공항이 생겨, 서울이나 부산에서 1시간 남짓 만에 날아올 수 있어야 울릉도의 경기가 ‘빵빵’해진다.

    그러나 울릉도는 바다 한복판에 깎아지르듯이 솟아 있는 섬이라 활주로를 만들 평지가 없다. 토목 전문가들은 대안으로 현재 건설 중인 사동항 방파제를 지목한다. 2011년 완공 예정으로 1993년 착공해 13년째 짓고 있는 사동항 방파제를 넓혀 100인급 중형기가 내릴 수 있는 활주로로 만들자는 것. 100인승 비행기는 2km 길이의 활주로를 필요로 하는데, 공사를 확대해 그 정도 길이로 만들자는 것. 활주로는 방파제보다 훨씬 단단히 지어야 하므로 활주로 건설에 필요한 돌은 사동항 바로 옆에 있는 돌산을 까서 마련한다.

    방파제 활주로에서는 여객기뿐만 아니라 해경과 해군의 초계기도 뜨고 내릴 수 있다. 초계기는 함정보다 훨씬 더 빨리, 그리고 먼 거리를 감시할 수 있다. 울릉도에서 독도는 헬기로 20분밖에 걸리지 않으므로 초계기는 훨씬 더 쉽게 독도 주변을 감시할 수 있다.

    아울러 사동항 중 일부는 해경이나 해군 부두로 돌린다. 현재 울릉도에는 해군과 해경 부두가 없어 동해에서 출항한 대형 함정이 독도 방어에 나서고 있다. 독도 방어를 위해서는 경비정이나 고속정 같은 작은 함정도 필요한데 이러한 배는 동해항에서 나올 수 없다. 사동항을 민·군 부두가 함께 있는 시포트(sea port)와 에어포트(air port)로 개발하자는 것이다.

    울릉도에 공항을 만든다면 정부는 울릉도 개발 종합계획을 세워야 한다. 울릉도는 태초의 신비가 숨어 있는 자연의 보고이다. 따라서 이 경관을 유지하면서 개발하는 방안을 세워야 한다. 전문가들은 그러한 방안의 하나로 울릉도를 초·중·고생을 위한 수련장으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즉 울릉도 곳곳에 유스호스텔이나 수련장을 지어 겨울과 태풍철을 제외하고 사동공항을 통해 학생들을 받아들인다. 학생들은 울릉도 일주와 성인봉 등반을 한 후, 날씨 좋은 날을 택해 독도 탐방에 나서는 것이다. 이 여행을 통해 학생들은 애국이 무엇인지를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

    울릉도를 애국심 학습장으로

    울릉도 주민들은 이 산업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이들에게 독도는 생업의 무대이므로 이들은 누구보다 독도 방어에 열성을 쏟게 된다. 한 안보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 정부 배가 독도에 접근해올 때 경비함이나 군함이 출동해 막는 것은 사실 정부로서는 크게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민간 배가 출항해 막아선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본의 정부 배는 한국 민간 배를 함부로 다룰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도가 생업의 무대가 되면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 방어에 누구보다 열성을 보일 것이다.”

    수심이 깊다는 문제와 돌을 넣어 더 단단히 지어야 한다는 기술적인 어려움이 있지만 사동항 방파제를 이용해 활주로를 만든다면 울릉도는 윤택해질 것이다. 그 공항을 통해 많은 국민이 독도를 탐방할 수 있게 되면, 독도를 지키겠다는 국민 열의는 강해지고 애국심도 높아진다. 군사적으로도 독도 방어가 용이해진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독도 영유권 갈등은 앞으로도 계속될 문제이다. 따라서 시끄럽게 대응하는 것보다는 실제 지배를 강화해나가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조용한 외교로 복귀하면서 사동항 방파제를 강화해 활주로로 바꾸는 방안을 심도 있게 검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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