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호

‘신화-진시황릉의 비밀’ ‘영웅(英雄)’

혼을 빼는 현란한 영상, 그 뒤에 감춰진 위험한 속내

  • 이욱연 서강대 교수·중국현대문학 gomexico@sogang.ac.kr

    입력2006-07-20 18: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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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류스타 김희선과 청룽이 호흡을 맞춰 화제가 된 ‘신화-진시황릉의 비밀’과 장이머우 감독의 ‘영웅’은 각각 진시황릉과 진시황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중국이 세계 강국으로 부활하고 있는 이때, 두 영화가 그리고 있는 진시황의 모습은 다소 혼란스럽다. 백성의 희생을 강요하며 급격하고 엄격하게 천하통일을 강행한 진시황에게 너그러운 두 영화는 무엇을 말하려는가. 진나라에 이어 동아시아 제일의 문화를 꽃피운 당나라의 도읍지이기도 했던 시안에서 제국의 마땅한 모습을 찾아보려 한다.
    ‘신화-진시황릉의 비밀’ ‘영웅(英雄)’

    중국 시안의 병마용. 수천명의 병사 얼굴이 모두 다르다.

    ‘시안(西安)’이라 하면 낯설고, ‘장안(長安)’이라 부르면 친근하다. 아마 동아시아 사람이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장안은 한 시대, 한 왕조의 특정 도시 이름 차원을 넘는다. 찬란했던 동아시아의 문화제국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은 동아시아인의 기억 속에 하나의 문화적인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장안이 시안이라는 새 이름을 얻은 것은 명나라 때다. 서북 지방을 안정시킨다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다. 시안의 과거, 즉 장안의 역사는 찬란했다. 하지만 시안의 현재는 찬란한 장안의 역사가 퇴색해가는 과정이다.

    시안은 중국에서 제일가는 역사 도시다. 역대 13개 왕조가 시안을 도읍으로 삼았다. 아테네, 로마, 카이로와 더불어 세계 4대 고도(古都)로 꼽힌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만년의 역사를 보려면 시안으로 가라. 1000년의 역사를 보려면 베이징으로 가라. 100년의 역사를 보려면 상하이로 가라. 10년의 역사를 보려면 선전(深玔)으로 가라.”

    1만년의 역사를 간직한 시안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안은 매우 초라하다. 특히 사회주의 시장경제 시대를 맞아 나날이 성장하는 동해 연안의 도시들과 비교하면, 시안은 몰락한 귀족, 빛바랜 골동품 같다.



    오늘날 중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 중에 자핑와(賈平凹)가 있다. 시안의 문화적 상징으로 대접받는 작가다. 자핑와는 1993년에 시안을 무대로 한 장편소설을 발표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시안 문인과 고위 관료의 타락상을 선정적으로 다룬 이 소설의 제목은 ‘폐도(廢都)’. 우리나라에도 같은 제목으로 번역, 출판됐다. 소설에서 폐허의 도시는 물론 시안이다. 자핑와는 “지구 차원에서 보면 중국이 폐허의 도시이고, 중국 차원에서 보자면 시안이 폐허”라고 말한다. 화려하던 장안은 사라지고 폐도 같은 시안만 남았다.

    1998년 미국 대통령 클린턴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클린턴은 베이징이나 상하이가 아니라 시안에 가장 먼저 들렀고, 시안 종루(鐘樓)에 올라 들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한 민족을 이해하려면 이 민족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클린턴의 행보와 말에 시안 사람들은 감격했다. 폐허의 도시, 몰락한 귀족의 집에 비유되면서 자존심이 형편없이 상해 있던 시안 사람들의 마음을 클린턴이 달래준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시안의 초상이다.

    싱자오쓰와 한국의 인연

    13개 왕조가 시안(혹은 시안 인근)에 도읍을 차렸지만, 시안은 역시 진나라와 당나라의 도시다. 최초의 통일제국 진, 그리고 가장 번성했던 문화제국 당, 중국 역사를 대표하는 두 제국의 도시가 시안이다. 그래서 병마용과 진시황 무덤으로 가는 길이 진나라의 흔적을 따라가는 길이라면, 양귀비가 목욕했다는 화칭츠(華淸池), 현장(玄훻)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모시기 위해 지은 다옌타(大雁塔)와 샤오옌타(小雁塔)로 가는 길은 당나라의 흔적을 따라 가는 길이다.

    ‘신화-진시황릉의 비밀’ ‘영웅(英雄)’

    영화 ‘영웅’(왼쪽)과 ‘신화’ 포스터.

    한국인이라면 여기에 한 곳을 추가해야 시안을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있다. 시안 동남쪽 교외에 있는 싱자오쓰(興敎寺)로 가는 길이 그것이다. 커다란 와불이 인상적인 이곳은 대웅전 앞에 있는, ‘서유기’에 나오는 현장법사의 사리탑으로 유명한 절이다. 하지만 한국인이 눈여겨봐야 할 것은 현장탑 왼쪽에 있는 3층짜리 원측탑(圓測塔)이다. 원측은 신라 왕손으로 15세에 장안에 와서 고승들에게 수학하고 인도에 유학을 다녀온 뒤 현장법사의 수제자가 됐다. 원측은 신라로 돌아오지 않았고, 신라 불교와 직접적인 관계도 없다. 오히려 중국 불교사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현장의 수제자로서 법상종을 창립하고, 산스크리트어가 능해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이 절과 한국의 인연은 이뿐 아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병 출신들은 국내에 침투하기 위해 미국 정보기관에 들어가 훈련을 받았다. 장준하, 김준엽이 그랬다. 이들이 이범석 장군 지휘 아래 국내 침투 훈련을 받은 곳이 싱자오쓰다. 하지만 한국인 관광객이 이곳 싱자오쓰를 찾기는 쉽지 않다. 단체관광한다면 더 그렇다. 시안 관광의 동선은 병마용을 중심으로 이뤄지는데, 싱자오쓰는 그 반대 방향에 있다.

    ‘진시황릉이 맞을까?’

    시안에 갔다가 진시황 무덤을 보고 허탈했다는 사람이 더러 있다. 자신이 발디딘 야산이 익히 들은 신비한 진시황릉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상 속의 진시황릉과 너무 차이가 나서 그렇다.

    탕지리(唐季禮) 감독이 연출하고, 청룽(成龍)과 김희선이 주연한 영화 ‘신화-진시황릉의 비밀’의 제목처럼 진시황 무덤은 신화 그 자체다. 2200여 년 동안 침묵하면서 숱한 추측과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막상 그 앞에 가보면 중국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야산이다. ‘정말 진시황의 무덤이 맞을까, 내 발 밑에 진시황이 잠들어 있고, 인어 기름으로 만든 영원히 꺼지지 않는 초가 타고 있고, 수은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으며, 외부 침입자가 침투하면 화살이 비 오듯 발사될까….’ 많은 사람은 더없이 평범해 보이는 이 야산이 영화 ‘인디아나 존스’가 무색할 정도의 환상과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는 신화 속 진시황 무덤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무덤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을 모두 생매장한 데다 지금까지 발굴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까닭에 진시황릉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시황릉에 대한 유일한 정보이자, 진시황릉에 대한 숱한 신화를 만들어낸 주인공은 사마천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들어 있는 ‘진시황 본기’의 내용이 그것이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에 전국의 죄인 70만명을 동원해 땅을 깊이 파고 구리물을 부어 외관을 만들었다. 자동으로 발사되는 화살을 만들어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쏘게 했고, 수은으로 강과 내, 바다를 만들어 기계 장치를 통해 흘러가게 했다. 또한 위는 해와 달, 온갖 별을 수놓은 천문 모양으로 장식하고 아래는 산과 강을 형상화한 모형을 설치했다. 무덤 내부에는 인어 기름(도롱뇽 혹은 사람을 닮은 물고기라는 등의 해석이 있음)으로 촛불을 밝혀 영원히 꺼지지 않도록 했다.

    물론 ‘사기’의 내용이 맞는지는 진시황릉이 발굴되기 전까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최근에 진시황릉 토양의 수은 함량이 인근 지역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기’에 적힌 내용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

    영화 ‘신화’는 주인공 잭(청룽)이 진시황릉의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을 그렸다. 고고학자 잭은 전생에 진시황을 지키는 근위대 장수 몽의였다. 영화는 진나라와 현재를 오가며 진행된다. 자연히 청룽은 잭과 몽의, 두 인물을 연기한다. 기본 콘셉트는 ‘인디아나 존스’에서 빌려왔다. 해리슨 포드가 ‘인디아나 존스’에서 고고학자이면서 싸움도 잘하듯 ‘신화’의 청룽도 마찬가지다.

    ‘신화-진시황릉의 비밀’ ‘영웅(英雄)’

    진시황의 후궁이 된 여인 옥수와 진시황의 근위대 장수 몽의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신화’.

    진시황의 후궁이 된 옥수

    영화에서 진시황릉 내부는 무중력 상태다. 모든 것이 떠 있다. 그런 무덤 속에서 2000년이 넘도록 아직까지 살아 있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우리의 조상으로 아주 오래 전 나라의 안정을 위해 진시황의 후궁이 된 여인 옥수다(영화에서는 ‘조선의 여인’이라고 나오지만 진나라와 조선, 혹은 고조선은 연대가 전혀 맞지 않는다). 중국에서 안재욱과 더불어 최초로 한류 바람을 일으켰고, 지금도 중국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한류 스타 김희선이 옥수 공주 역할을 맡아 이 영화가 중화권에서 흥행에 성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진시황릉에 살아 있는 다른 한 사람은 진나라 근위대 남궁 장군이다. 이 두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불로장생의 선단(仙丹)을 먹어서다. 원래 진시황을 위해 구해온 선단을 신하들이 이 두 사람에게 먼저 먹어보라고 했다. 진짜 불사(不死)약인지 시험해본 것이다. 그 약은 진짜였다. 두 사람은 진시황을 따라 순장된 뒤에도 무덤 속에서 오늘날까지 2000여 년 전 모습 그대로 살아남아 있게 된다. 옥수 공주는 진시황의 무덤에서 몽의 장군을 기다렸다. 진나라로 끌려오는 길에 자기를 지켜준 몽의 장군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진시황 무덤 속에서 아직까지 살아 있는 또 다른 한 사람, 남궁 장군은 몽의 장군의 부하다. 몽의 장군이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끝까지 옥수 공주를 지키라고 한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진시황의 무덤을 고고학자 잭이 찾아낸다. 옥수 공주는 자기가 기다리던 연인 몽의 장군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한다. 잭도 꿈에서 늘 보던 여인을 실제로 만나게 된다. 하지만 옥수 공주는 자기 앞에 나타난 사람이 진나라 장군 몽의가 아니라 고고학자 잭이라는 것을 알고는 잭을 따라나서지 않는다. “몽의가 아니라면 못 가요, 난 몽의를 기다려야 해요” 하면서 진시황릉에 남는다.

    영화 말미에 잭은 “이 유물은 영원히 지하에 묻혀 있어야 한다”면서 ‘신화(The Myth)’라는 제목의 책을 덮는다. 신화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제 진시황릉에는 우리 조상의 한 사람인 옥수 공주가 불로장생의 약을 먹고 아직도 살아 사랑하는 몽의 장군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진시황릉에 대한 상상 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고 해야 하나.

    영원한 신화, 상상력의 샘

    그런데 영화에서 조선의 여인 옥수 공주의 이미지가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 능란하게 중국어를 구사하는(더빙한 성우의 중국어 대사가 한국말을 하는 김희선의 입 모양과 맞지 않는 게 거슬리지만) 가련한 표정의 옥수 공주가 하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몽의 장군을 기다리는 일뿐이다.

    요즘 한국과 중국, 홍콩의 영화시장이 통합되면서 ‘신화’처럼 각 나라의 콘텐츠와 배우를 공유하는 것이 강력한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한국, 중국, 홍콩의 영화가 아니라 동아시아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 영화를 만들려면 동아시아적인 사고로 내용을 구성해야 하지 않을까. 순전히 동아시아 영화시장에서의 흥행을 고려해 김희선을 캐스팅했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가련한 표정을 짓는 것이 전부인 조선의 공주 이미지는 그리 유쾌하지 않다. 진시황릉 불멸의 신화를 위해 동원되고, 희생된 공주 옥수의 이미지는 다분히 중국 중심적이다. 중국 신화를 위해, 더 넓은 영화시장만을 고려해 한국 배우를 동원한 것에 그치고 말았다.

    진시황릉은 1974년에 병마용이 발굴된 이래 1981년까지 황릉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부분적으로 발굴 작업이 진행됐지만, 지금은 중단 상태다. 현재 발굴된 지역은 전체 진시황 무덤의 10%도 되지 않는다. 본격적인 발굴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내부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정확히 몰라 자칫 능을 훼손할 수 있어서 섣불리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조금만 파면 물이 나오는 지형의 특성상 물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발굴시 진시황릉 전체를 덮을 수 있는 돔 형식의 구조물을 설치해야 하는데 그럴 만한 기술이 없어서다.

    ‘신화-진시황릉의 비밀’ ‘영웅(英雄)’

    시안이 폐허가 됐다지만 장안성은 동아시아의 문화제국이었던 당나라의 당시 위세를 짐작케 한다.

    천심과 민심의 묵시록

    진시황릉은 중국인은 물론이고 동아시아인들에게도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하는 영원한 신화이자 상상력의 샘이다. 영화에서처럼 신화는 진시황이라는 인물이 아니라 진시황릉이다. 요즘은 ‘사기’의 내용을 토대로 진시황릉 내부를 디지털로 생생하게 복원해내기도 하지만 진시황릉은 여전히 신화 자체다. 아직껏 발굴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진시황릉을 발굴해버리면 이제 진시황릉에 관한 더 이상의 신화는, 더 이상의 상상은 없다. 그동안 진시황릉을 소재로 무수한 영화가 만들어졌듯이 진시황릉은 무수한 문화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디지털 자원이다. 영화와 게임, 만화, 소설, 숱한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는 지금 진시황릉은 우리에게 남은 거의 유일한 상상력의 보고다. 진시황릉을 발굴해 신화를 해체하고 신비를 벗겨버리면 동아시아인들의 상상을 자극해온 신화가 사라져버릴 것 아닌가. 그렇게 보면, 영화에서 잭의 말대로 진시황릉은 그대로 지하에 신화로 묻어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영화 ‘신화’에서처럼 진시황릉 내부가 무중력 상태라고 상상하는 것도 진시황릉이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신화’에서는 진시황 시대에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을 이용해 무덤 안을 무중력 상태로 만들었다고 나온다. 오락 영화인 만큼 발상이 기발하면서도 황당하다. 물론 진시황 때 운석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사기’에 남아 있다. 진시황 36년의 일이다. 그런데 누군가 땅에 떨어진 운석에 “진시황이 죽고 땅이 나뉠 것이다(始皇帝死而地分)”라고 새겼다. 이 소식을 들은 진시황이 당장 그자를 찾아내라고 명한다. 군사들이 동원되어 인근 마을 사람들을 일일이 심문하지만 찾아내지 못한다. 결국 진시황은 인근 마을 사람들을 모두 잡아 죽이고 돌을 불태워 없애버리라고 명을 내린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운석은 폭군 진시황이 죽고, 결국 진나라도 망할 것이라는 하늘의 계시다. 진시황을 보는 천심(天心)과 민심(民心)의 묵시록인 셈이다. 하지만 진시황은 운석에서 천심과 민심(民心)의 징후를 읽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백성을 무자비하게 죽인다. 사마천은 운석 사건을 진시황이 얼마나 난폭했는지 보여주는 일례로 기록했다. 그런데 영화 ‘신화’에서 운석은 그와 정반대 구실을 한다. 진시황릉의 위대한 신화를 창조하고, 나아가 진시황 시대가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암시하는 매개체인 것이다. 진시황과 그의 시대를 보는 눈이 이렇게 바뀌어도 되는 것일까.

    중국 최대 무협 블록버스터

    ‘신화’가 진시황릉에 관한 신화라면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영화 ‘영웅(英雄)’(2002)은 진시황에 관한 신화다. ‘영웅’은 중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중국 영화사상 최대의 자본(약 360억원)을 투자했다. 모두 순수한 중국 자본이었다. 중국 영화사상 최대의 무협 블록버스터인 셈이다. 개봉 후 중국에서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웠다. 해외에서도 대인기였다. 일본, 대만, 홍콩 등 동아시아권에서 크게 인기를 누린 것은 물론이고 2004년 미국에서 개봉되어 2031개 스크린에 걸리면서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가운데 4500만달러(약 450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영화는 2000년 전 전국시대가 배경이다. 당시 중국은 7개 나라로 나뉘어 천하 패권을 두고 치열하게 다퉜다. 7개 나라 가운데 진나라가 제일 강했고, 조(趙)나라를 포함한 나머지 6개국은 합종도 하고 연횡도 하면서 진나라에 대항하였다. 진이 전국을 통일하기 전, 왕이 ‘시황(始皇)’이라는 호칭을 쓰기 전이다. 영화는 ‘무명(無名)’ 리롄제가 진나라 왕을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진나라 왕이 무명을 부른 것은 그가 왕을 놀라게 할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당시 진나라 왕은 10년 동안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조나라 자객 장천과 비설, 파검이 진나라 왕의 목숨을 노렸기 때문이다. 특히 비설(장만위)과 파검(량차오웨이)은 3년 전 3000명이나 되는 왕의 호위병을 뚫고 왕의 침소에까지 침입해 왕을 살해하려 하였다. 진나라 왕은 늘 자신을 살해하려는 자객들의 위협에 시달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최초로 통일 왕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원한을 샀을 것인가.

    그런데 무명이 나타나 그 자객들을 모두 물리쳤다. 무명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상을 받을 때 특별히 왕의 10보 앞까지 다가가도록 허락받는다. 하지만 무명 또한 자객이다. 진나라 때문에 가족이 몰살당한 복수를 하기 위해 10년 동안 암살 계획을 세워온 인물이다. 10보 안에만 들어서면 진나라 왕을 반드시 죽일 수 있는 ‘10보 필살 검법’을 연마한 그는 마침내 10보 안에 들어서 있다.

    ‘신화-진시황릉의 비밀’ ‘영웅(英雄)’

    호탄시장. 비단길 관문이었던 시안에 불어닥친 호풍(胡風)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무명은 진나라 왕에게 자신이 어떻게 그들 자객을 살해하고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무명의 이야기를 다 들은 진나라 왕은 무명의 이야기가 거짓이고, 무명 또한 자객임을 간파한다. 진나라 왕은 무명 앞에 놓인 초의 흔들리는 불꽃에서 무명의 살기(殺氣)를 느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자신을 살해하기 위해 10보 필살 검법을 연마한 자객 무명이 10보 안에 있고, 호위대는 100보 밖에 있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체념한 듯 말한다.

    “오늘이 짐한테는 운명의 날이겠구나.”

    “진왕을 죽여선 안 된다”

    무명이 왕을 향해 뛰어올라 칼을 날린다. 하지만 칼은 왕을 아슬아슬하게 빗겨간다. 무명이 일부러 그랬다. 왕을 살려준 것이다. ‘영웅’은 익히 알려진 자객 형가(荊軻)가 진시황을 살해하려 했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형가는 칼을 지도에 숨겼다가 진시황을 향해 휘두른다. 하지만 놀란 진시황이 황급히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진시황의 옷소매만 자르고 실패한다. 붙잡힌 형가는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당한다. 형가 이야기와 달리 ‘영웅’에서는 진시황 살해 시도가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무명 스스로 포기한다. 장이머우가 만든 ‘영웅’의 개성이지만, 이 장면이 논란을 빚기도 했다.

    무명은 왜 진나라 왕을 죽이지 않았을까. 파검에게 설득당한 때문이다. 무명은 10보 안까지 왕에게 접근하기 위해 파검의 목숨이 필요했고, 파검에게 도움을 청하러 간다. 하지만 파검은 왕을 죽이는 것에 반대한다. 3년 전, 그가 연인 비설과 함께 진나라 왕을 살해하러 갔다가 그냥 나온 것도 실은 파검이 일부러 진나라 왕을 놓아준 것이다.

    파검은 “진왕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전쟁은 오직 진나라만이 종식시킬 수 있고, 그래야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는 것이 파검의 생각이다. 즉 천하통일이란 대의를 위해 진왕을 암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무명에게 ‘천하(天下)’라는 글자를 모래 위에 써 보이면서 말한다. “한 사람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조와 진의 원한도 천하라는 대의 아래선 사소하다”고. 550년 동안 계속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천하를 위해, 평화를 위해 진나라 왕을 죽이면 안 된다는 파검의 생각에 무명이 설득당하고, 결국 무명은 진왕을 살해하는 것을 스스로 포기한다.

    사실 무명이 진정한 협객이라면 그렇게 스스로 포기할 수 없다. 협객이라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협객의 정신은 ‘말은 신의가 있어야 하고, 행동은 결과가 있어야 하며 승낙을 했으면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言必信, 行必果, 諾必誠)’이다. 사실 무(武)와 협(俠)의 결합으로서의 무협은 필연적으로 폭력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칼은 무의 상징이고, 길을 가다 불의를 보면 칼을 뽑아 도와주는 것이 무협의 정신이다. 무협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은 폭력을 통해 폭력을 제압하는 것(以暴制暴)이다. 더구나 중국의 문화 전통에서 자기의 체면을 손상시킨다거나 자기에게 치명적 위해를 가한 사람에게 보복하는 것은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의 하나로 정당화되었다. 무협 영화나 소설이 보복을 기본 모티프로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협객은 원래 ‘무로써 세상의 금기를 범하는(俠以武犯禁)’사람이다. 그들은 관의 세력과 기존 질서 밖에서 떠도는 유민이고 무정부주의자다. 협객의 이러한 특징은 봉건 통치 세력에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그런데 ‘영웅’에서 파검과 무명은 이제 기존 질서를 승인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칼을 거둔다. ‘영웅’은 무협의 기본 공식에서 완전히 이탈한 것이다.

    ‘신화-진시황릉의 비밀’ ‘영웅(英雄)’

    리롄제, 장만위, 량차오웨이, 장쯔이 등이 출연한 영화 ‘영웅’은 중국 영화사상 최대 자본이 투입돼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

    새로운 신화 창조

    ‘영웅’이 이처럼 무협 정통 계보에서 이탈한 것은 장이머우 감독이 의도한 바다. 장이머우는 형가 이야기를 새롭게 변화시킨 이유에 대해 “무협 주제의 틀을 넘어서고자 했다”고 말했다. 정의로운 폭력을 행사하여 폭력을 제압하고 복수하는 무협의 기본 틀을 벗어나려고 했다는 것이다.

    무명에게서 파검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진시황은 감격한다.

    “짐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 짐을 암살하려 했던 자라니. 짐은 수많은 비난과 음모, 계략을 견뎌왔다. 누구도 내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짐의 신하조차 짐을 독재자라고 간주했다. 파검이 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짐의 뜻을 간파할 줄이야!”

    ‘신화-진시황릉의 비밀’ ‘영웅(英雄)’

    전국시대, 다른 여러 나라로부터 원한을 산 진의 왕과 그를 죽이려는 자객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영웅’.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진시황이 야심과 권력욕이 가득하고 난폭하여 걸핏하면 백성을 살해하는 폭군이라면, 영화 ‘영웅’이 묘사한 진나라 왕은 그 스스로 더 많은 사람을 죽이지 않기 위해 불가피하게 살인을 하고, 천하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악역을 고통스럽게 자임하는 비운의 영웅인 것이다. 그런 영웅이 천하의 통일과 평화를 이루는 데 약자와 개인은 희생해야 하고, 사적인 원한은 접어야 한다.

    영화의 메시지가 여기까지 이르는 순간, 이 영화는 위험해진다. 천하의 통일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유예되어야 한다는 파시즘과 강자의 철학을 옹호하고 선전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중국에서도 그런 비판이 나왔고, 우리나라에서는 비판의 강도가 더욱 심했다. 중국이 강대국으로 도약하는 것을 목도하면서 많은 사람이 세계에, 동아시아에 새로운 제국이 출현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고 있는 상황에 영화 ‘영웅’이 던진 메시지는 한없이 위험해 보인 것이다.

    중국이 강국으로 부활하는 즈음에 ‘신화’에서도 그렇고 ‘영웅’에서도 그렇고 진시황의 이미지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영웅’이 담고 있는 강자의 철학, 파시즘은 사람의 넋을 앗아갈 정도로 현란하고 매혹적인 영상과 색채감 속에 제 모습을 감추고 있다. 위험한 것은 늘 그렇게 황홀한 외피로 유혹하고, 그래서 더 위험하다.

    ‘영웅’은 무명이 결국 진나라 군사들이 무지막지하게 쏘아대는 화살을 맞고 죽고 난 뒤 자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기원전 221년, 진의 왕은 중국을 통일한 후 전쟁을 끝내고, 장성을 세워 나라와 백성을 지켜 중국 역사상 첫 황제가 되어 진시황이라 불렸다.”

    장이머우는 진시황에 관한 기존의 해석을 뒤집고, 그에 관한 새로운 신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신화는 새로운 세기에 도약하는 중국에 관한 신화와 상당 부분 겹쳐 있다.

    胡風의 흔적, 양러우파오모(羊肉泡)

    시안에 가면 많은 사람이 ‘서태후 교자연(餃子宴)’이라고 하는, 종류가 180여 가지나 된다는 각양각색의 교자 요리를 먹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시안에서 가장 인상에 남은 음식은 교자가 아니라 양러우파오모(羊肉泡)이다.

    1993년 여름, 처음 시안에 갔을 때 시안의 한 대학에 있는 시안 토박이가 시안의 명물을 사주겠다며 이슬람 식당에 데리고 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사람들이 빵을 먹지 않고, 손으로 뜯어서 그릇에 담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우리에게도 빈 그릇을 가져다줬다. 필자는 영문도 모른 채 다른 사람들처럼 빵을 뜯어서 그릇에 담았다. 다 뜯어진 빵 조각을 종업원이 다시 가져갔고, 10분쯤 뒤에 주먹만한 양고기가 가득 담긴 탕을 내왔다. 그 탕에 애써 찢은 빵 조각이 들어 있었다. 맛이 일품이었다. 그 뒤로 시안에 가면 단골로 찾는 메뉴가 됐다.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양러우파오모가 병마용과 함께 시안의 명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양러우파오모를 처음 먹을 때는 내가 먹는 탕 안에 내 손으로 찢은 빵이 들어 있는 게 맞는지, 혹시 다른 사람 손으로 찢은 빵을 준 게 아닌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일단 식당에 들어가면, 종업원이 그릇을 가져가면서 건네 준 번호표에 따라 내 손으로 뜯은 빵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양러우파오모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양러우파오모는 간판에 ‘칭쩐(淸眞)’이라고 적힌 식당엔 거의 다 있다.

    양러우파오모처럼 시안에는 이슬람의 흔적이 많다. 시안, 옛 장안은 비단길의 출발지였다. 그런 까닭에 시안에서 동서 문명이 만났다. 당나라 때 장안은 동서 문명의 집산지로서 절정을 맞는다. 이란과 투르크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이 장안 시내 곳곳에 집단 촌락을 이뤘다. 당나라 사람들은 서역에서 전해오는 이국적인 정취에 매료됐다. 악기, 향료, 약품, 음악…. 심지어 술집의 아름다운 서역 아가씨, 즉 호희(胡姬)가 이백(李白)의 시에 등장할 정도였다. 장안은 ‘호풍(胡風)’에 흠뻑 젖었고, 이 호풍의 유행은 100년이나 지속됐다. 시안에 지금도 남아 있는 이슬람 집단 거주지와 이슬람 사원 칭쩐쓰(淸眞寺) 부근에서 열리는 이슬람 야시장, 양러우파오모 같은 음식은 호풍의 흔적이다.

    ‘신화-진시황릉의 비밀’ ‘영웅(英雄)’

    무협의 기본 공식에서 이탈해 진나라 왕을 비운의 영웅으로 묘사한 영화 ‘영웅’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문화제국 唐의 원동력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동서 문명이 뒤섞이고, 원측이나 해초 같은 신라의 승려를 비롯해 서역인들까지 몰려든 국제도시였다. 장안은 동서양의 모든 문물이 흘러들어 서로 다른 것들이 공존하는 공간, 다양성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혼성과 다양성이 찬란한 당나라 문화를 꽃피웠다. 당나라를 최고의 문화제국으로 만든 원동력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당나라에 비해 시안에 있었던 또 다른 제국 진나라는 사정이 정반대였다. 진나라는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하는 제국이었다. ‘영웅’에서 진시황은 ‘검(劒)’자 쓰는 방법이 19가지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고는 “한 글자를 쓰는 데 19가지 방법이나 있다니, 얼마나 불편한가. 내가 그렇게 어지러운 문자를 전부 없애버리겠다”고 말한다. 과연 진시황은 이체자가 많았던 한자를 소전체(小篆體) 하나로 통일한다.

    진시황은 여섯 나라를 없애고 천하만 통일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일했다. 분서갱유를 통해 사상을 통일했고, 글자를 통일했다. 그뿐 아니다. 군복, 깃발 등 국가를 상징하는 색깔을 모두 검은색으로 통일했다. 중국 전통사상에 따르면 오행은 서로 순환하고 상극 상생 작용을 한다. 그 오행에 따르면 진나라 이전의 주나라는 불(火)의 나라였다. 그러니 진나라가 주나라를 대체하려면 불을 제압하는 물(水)의 원리를 지녀야 한다. 오행에서 물은 오방색 가운데 검은색과 대응한다. 그래서 물의 색인 검은색이 진나라의 색깔이 됐다. 영화에서 무명이 진나라 왕을 만나는 부분에서 검은색이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중국에서 검은색이 불법이나 사상적인 반동 등의 부정적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현대에 와서다.

    진나라는 또한 숫자가 들어가는 모든 것을 6으로 통일했다. 중국어에서 6자의 발음은 물처럼 순조롭게 흐른다는 뜻의 溜, 流자 등과 같아서 행운을 상징했다. 진시황은 어사의 모자 크기를 여섯 치로, 가마의 너비도 여섯 자로 정하고, 수레도 여섯 마리의 말이 끌게 했다.

    제국은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

    그렇게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한 뒤 그것을 어기는 자는 법으로 엄하게 다스려 추호도 용서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처단했다. 그게 진이라는 제국의 통치원리였다. 진나라는 기원전 221년에 천하를 통일하고, 기원전 207년에 망했다. 통일왕조는 불과 14년간 존속했다. 반면 당나라는 290년간 지속됐다. 시안에 있었던 중국을 상징하는 두 제국 진나라와 당나라의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일통(一統) 천하를 만들었던 진나라와 서로 다른 것들이 뒤섞이면서 다양성의 공간을 연출했던 문화제국 당나라의 차이 아닐까.

    ‘신화-진시황릉의 비밀’ ‘영웅(英雄)’
    李旭淵

    1963년 광주 출생

    고려대 중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중국 베이징 사범대 대학원 고급진수과정 수료

    現 서강대 중국문화과 교수

    논문 및 저서 : ‘중국 지식인 사회의 새로운 동향’ ‘소설 속의 문화대혁명’ ‘개혁 개방 이후 전통 문화의 재평가와 변용’ ‘전환기의 중국 사회’1, 2(공저)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노신 산문선집’ 등



    시안에 가면 진시황릉 정상에서 북으로는 웨이수(渭水)를 남으로는 중난산(終南山)을 아득히 바라보면서 중국을 대표하는 두 제국의 운명을 떠올려볼 일이다. 제국은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서. 미국이라는 제국과 중국이라는 제국의 틈바구니에 있는 지금 우리로서는 그런 고민이 더욱 절실하다. 천하의 평화를 염원하다가 희생당한 파검과 무명을 생각하면서 그들의 순진한 꿈이 헛되지 않을 새로운 제국의 원리를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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