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해주는 한국인에게 기회의 땅이 될 수 있을까. 러시아와 협력을 강화하고 북한의 노동력을 활용하면 극동지역에 새로운 평화의 싹이 틀 수 있을까. 그간 한국이 외면해온 고려인의 자활을 돕는다면 라시아에 퍼져 있는 한인 네트워크가 활성화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러시아 극동지역을 취재했다. 결론은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
6월3일,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린 끝에 우수리스크 우정마을에 도착했다. 일행 10여 명의 직업은 다양하지만 목적은 하나, ‘고려인 정착 지원’이다. 사회연대은행 이종수 운영위원장은 고려인 농업정착을 위한 마이크로크레디트(소액자금 대부) 기금 4만달러를 전달하러 왔다. 김규회가정의학과의 김규회 원장과 의료봉사대는 고려인 다수가 앓고 있는 당뇨병을 치료하러 왔다. 동북아평화연대를 통해 고려인 정착을 후원하는 회원들도 현장을 둘러보러 왔다. 차에서 내린 한 회원이 허리를 펴면서 한마디 던진다.
“아이고…강남 아줌마 한 트럭 실어와서 보여주면 엄청 좋아하겠네.”
농사의 씨앗, 사람의 씨앗
외지인이 연해주 땅에 서면 일단 두 가지에 놀란다. 하나는 광활함이요, 또 하나는 예상외로 기름진 흙이다. 땅 좁고 사람 많은 한국에서 온 사람에겐 이런 땅이 비어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연해주에서 3년째 고려인 정착을 지원하는 동북아평화연대 김현동 사무처장이 지평선 끝을 가리키며 말한다.
“러시아 사람들이 보기엔 몹쓸 땅이지만, 한국 농민들이 보기엔 온통 씨 뿌릴 땅이죠.”
1863년, 기근을 피하기 위해 조선인 13가구가 두만강을 건너 이곳에 와 씨를 뿌렸다. 이때부터 한인의 연해주 농사가 시작됐다. 조선왕조의 금지령에도 1867년까지 999명의 한인이 삶의 터전을 찾아 연해주로 흘러들었다.
1907년 이후엔 독립운동가들이 들어와 ‘사람의 씨’를 뿌렸다. 고종의 헤이그 특사 이상설 선생,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와 단지(斷指)혈맹 단원들이 연해주를 근거로 운동가를 양성했다. 이들이 유라시아 고려인의 시조다.
지금도 북한 주민들은 이 땅의 ‘기회’를 부러워하며 국경을 넘으려 한다. 그런데도 탈북자 수는 늘지 않는다. 김 처장은 “중국과 맞닿은 두만강은 폭이 좁지만, 러시아쪽 강폭은 수백m에 달한다”며 “운 좋게 강을 건너도 넓은 평원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러시아 경찰에 잡혀 탈북자 수용소로 압송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항공권과 여권이 있는 남한 사람에게 연해주는 활짝 열려 있다. 인천공항에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공항까지 비행기로 2시간20분,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차를 타고 2시간만 달리면 우수리스크의 평원에 도착한다. 다 합쳐봐야 서울에서 부산까지 새마을호를 타고 가는 시간과 비슷하다. 항공료(90만원)가 비싸다면 배편(30만원)을 택해도 된다. 속초항에서 배로 17시간, 육로로 2시간 도합 19시간 만에 연해주에 도착한다.
강제이주 때 어린이 60% 사망
연해주에 발을 디딘 순간, 눈앞에 별천지가 펼쳐진다. 이곳은 사람보다 땅을 빌리는 게 더 쌀 만큼 땅이 넓다. 러시아 인부의 하루 일당이 우리 돈으로 1만원 안팎인데, 땅 1㏊(3000여 평)를 1년 빌리는 데엔 고작 1000원이다. 매입가는 1㏊에 300만∼400만원.
땅이 어찌나 흔한지 집이나 건물, 시설을 사면 거기에 딸린 토지 소유권까지 넘어온다. 연해주 우수리스크 고려인 정착촌의 집 한 채 값이 150만원 안팎인데, 600여 평의 텃밭까지 딸려 있다.
베트남, 몽골, 카자흐스탄까지 휩쓴 한국인의 부동산 열풍이 어째서 브릭스(BRICs)의 한 곳인 연해주에는 미치지 않은 걸까. 그간 연해주에 진출했던 한국 기업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왜 고려인은 대여섯 달치 봉급만 모으면 살 수 있는 집 한 채 제대로 못 구하고 한국 시민단체들의 도움을 받는 걸까.
방문 첫날 우정마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정마을은 원래 대한주택건설협회가 고려인 정착 주택 1000여 채를 짓기로 했다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중단된 곳이다. 현재 33채가 지어진 마을엔 고려인 26가구, 러시아인 5가구, 한국인 2가구가 살고 있다. 한국인 가구 중 한 채에는 3년째 고려인 정착을 돕고 있는 김현동 처장 부부가 산다. 다른 한 채는 ‘솔빈센터’라는 이름으로 고려인 지원 사무국 겸 외부인 숙소로 쓰인다. 마을사람들은 한국에서 온 손님들에게 삼겹살을 대접하며 인사를 건넸다.
“즈드라스트부이쩨, 마야 유이고르(안녕하세요, 저는 유이고르입니다).”
“마야 밀랴. 라뜨 봐스 비지쯔(저는 밀랴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 마을의 40∼50대 고려인은 한국인 앞에서 한국말을 쓰지 않았다.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유창하게 구사하진 못한다. 오히려 자녀들이 한국어에 더 능숙하다. 유이고르(42)씨의 장녀 유릴리야(22)씨는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 일행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때마다 통역을 자처했다. 차녀 유인나(20)씨도 부모보다 한국어를 잘하는 눈치다.
고려인 청년세대는 학교와 텔레비전에서 한국말을 배웠다. 러시아 극동에도 한류 열풍이 불고 있는 덕분이다. 이 지역의 가장 큰 대학으로 꼽히는 우수리스크 사범대학에선 가장 똑똑한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운다. 한국어 전공자는 영어를 부전공으로 배운다.
중국의 조선족과 달리 러시아의 고려인이 한국어를 잊게 된 데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연해주의 고려인은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탄압을 받았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중심으로 항일세력이 활약하던 1920년 4월, 일본군이 신한촌을 습격해 한인 수백명을 사살하고 3000여 명을 체포했다. 1937년 9월엔 한인 18만여 명이 시베리아열차 화물칸에 실려 강제이주를 당했다. ‘한인 중에 일본군 첩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스탈린 정권이 한인 전체를 중앙아시아로 내몬 것이다. 당시 밀폐된 화물차에 전염병이 돌아 어린아이 10명 중 6명이 죽었다는 끔찍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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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사회연대은행 위원장(왼쪽)이 연해주 고려인에게 기금을 전달하고 있다.
그후 7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한국말을 기억하던 강제이주 1세대는 점차 사라졌다. 중앙아시아에서 태어난 2세들은 험난한 환경에서 살아남느라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에 흩어져 살던 강제이주 2세들은 1993년 러시아 연방 최고회의가 고려인 강제이주와 관련, 명예회복 조치를 내리자 고향인 러시아와 한인 친척들을 찾아 연해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아온 연해주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황량한 벌판과 망가진 주택, 무너진 사회 인프라뿐이었다. 가진 자산을 모두 팔아 러시아행 비행기에 오른 고려인은 무일푼으로 연고도 없이 다시 생활터전을 일궈야 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할 수 있을까. 김 처장은 “고려인들이 한국어에 서투른 게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한다. 언어가 진입장벽이 돼 한국의 사기꾼이나 투기꾼이 고려인을 착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가 동북아평화연대 옌볜 사무소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옌볜엔 한국인 사기꾼이 제일 먼저 들어갔지만, 연해주엔 NGO(시민단체)가 제일 먼저 들어왔습니다. 한국말이 옌볜에선 통해도 연해주에선 통하지 않거든요.”
러시아에서 언어의 벽은 예상보다 높다. 심지어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에서 입국신고서를 쓰려는데 온통 러시아어로 씌어 있었다. 러시아어는 모양과 철자가 영어와 판이하다. 뜻을 알아채기가 어렵다. 한자 문화권이 아니라 한자를 통한 필담도 불가능하다.
또한 정보의 벽도 높고, 체제의 벽도 높다. 한국인 사기꾼이 작정하고 러시아어 능통자를 데려와도 러시아쪽 인맥이 없으면 오히려 사기당하기가 쉽다. 부동산 투기꾼도 발붙일 자리가 없다. 러시아에서는 자국민이나 자국법인만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다. 외국인이 살 수 있는 건 주택과 건물뿐이다. 건물에 딸린 1ha 이하의 토지는 그냥 주지만, 그 이상의 토지에 대해선 최대 49년까지 임차권만 준다.
그렇더라도 건물가격이 올라가면 돈을 벌 수 있을 텐데, 왜 투기 바람이 일지 않은 걸까. 연해주 부동산 가격은 그동안 꽤 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건물이나 연해주 일부 토지 중엔 브릭스 투자 열풍과 경기 상승세를 타고 두 배 가까이 오른 곳도 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렇게 오를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대부분 확신하지 못한다. 주(駐)블라디보스토크 영사관의 전대완 총영사는 “투자를 결정하기 전에 먼저 인구 유입 여부를 보라”고 조언한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테크노크라트 등 핵심인사들이 유럽으로 옮겨가면서 극동 반구에서만 러시아인 100만명이 빠져나갔다”고 전했다.
연해주의 인구구조를 보자. 땅은 한국보다 1.67배 넓지만, 겨우 215만명이 살고 있다. 이중 러시아인이 85.5%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우크라이나인(9.5%), 타타르인(1.1%)이 많다. 고려인은 1만8000명으로 인구의 0.5%를 차지한다. 2004년 이 지역의 총생산은 50억달러로 전년보다 106%가 성장했다. 실업률과 물가상승률은 각각 10% 안팎.
중국의 ‘무자비한’ 진출
인구나 실업률을 보면 연해주 투자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실업률이 높으면 소비가 활발하지 않아 기업의 활동성이 떨어진다. 이렇게 되면 주택이나 건물가격도 잘 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전대완 총영사는 “한국 정부와 기업이 하루 빨리 연해주에 진출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에너지산업의 성장과 식량자원의 확보에 있어서 연해주는 매력적인 투자처이기 때문이다. 연해주엔 주석, 텅스텐, 아연, 비소, 형석, 붕소 등 30여 종류의 자원이 200여 개의 대규모 매장지에 묻혀 있다.
원유도 상당량이 묻혀 있다. 러시아 정부가 추진 중인 동(東)시베리아 송유관이 완공되면 연해주 연안을 통해 2012년까지 연간 2000만t 규모의 원유가 공급된다. 한국의 정유화학, 항만터미널 기술이 빛을 발할 터전이 생기는 셈이다.
연해주의 넓고 기름진 땅은 한반도의 식량 공급원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이미 쌀 등 일부 곡물을 제외하고는 순수입 국가로 돌아선 지 오래다. 유엔 등 국제기구들은 50년 뒤 세계 인구가 100억을 넘을 것으로 전망한다. 식량 문제는 더 심각해질 것이다. 이런 까닭에 연해주 농경지엔 중국뿐 아니라 뉴질랜드, 호주 등 지구 반대편 나라들도 속속 진출하고 있다.
게다가 이 지역에는 커다란 변화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연결과 러시아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다. 시베리아 철도가 한반도의 고속철과 연결되면 고려인 정착촌이 들어선 우수리스크 근교는 유라시아 최고의 교통 요충지가 된다. 또한 러시아는 지난 6월초 호주와 WTO 가입을 위한 쌍무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을 제외하고 유럽연합(EU), 중국, 일본 등 주요국과도 협정을 끝냈다. 러시아 정부 목표대로라면 올해 말, 늦어도 2008년까지는 WTO 가입 절차를 마칠 것으로 관측된다.
러시아에서 가장 성공한 한인 기업인으로 꼽히는 박발렌틴 아르 홀딩그룹 회장은 러시아의 WTO 가입 전후에 소유와 세금제도 등에서 대대적인 변혁이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카자흐스탄 등 다른 옛 소련 국가들처럼 외국인에게 토지 소유를 허용하고 중국처럼 기업 행위에 대한 세금 혜택을 제공할 것이라는 예상이다(상자 인터뷰 기사 참조).
이처럼 연해주를 둘러싼 전망이 밝아질수록 연해주의 활동가들은 마음이 조급해진다. 중국 자본이 옛 영토를 찾아 연해주로 물밀 듯 넘어오고 있기 때문. 연해주는 1860년 체결된 베이징 조약에 따라 청나라에서 러시아로 넘어간 땅이다. 김 처장은 과거 한국의 고합그룹이 확보했던 ‘알토란’ 같은 토지가 중국인의 손으로 넘어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최근 중국인들이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시베리아 1번 도로가 만나는 땅을 사들이거나 임차권을 확보하고 있어요. 원래 러시아 토지법은 중국, 북한, 몽골 등 국경 인접 국가엔 접경지역의 토지 임대를 제한합니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현지에 법인을 세우거나 현지인과 결혼하면서 이곳 토지를 매입하고 있습니다. 알짜배기 땅이라는 걸 알아본 거지요.”
우정마을 근처 또다른 고려인 정착촌인 그레모바의 일부 농경지도 중국 자본으로 넘어갔다. 이 땅은 원래 고합그룹과 러시아의 합작법인 ‘프림코’ 소유였지만, 고합그룹이 외환위기 때 쓰러지면서 시나브로 팔려 나가고 있다. 현재 이 땅은 고합그룹의 주채권은행인 우리은행이 관리하고 있다.
“손 짚으면 대순진리회 땅”
이 대목에서 새로운 의문이 떠오른다. 고합그룹이야 재정 악화로 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지만 LG그룹, 새마을운동중앙회 등 1997년 전후에 연해주 농업 진출을 꾀했던 곳들은 왜 사업을 포기했을까. 혹 연해주 영농이 돈만 까먹는 사업이었던 것은 아닐까.
연해주 농업전문가들은 대순진리회와 유니베라(전 남양알로에)의 경우를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든다. 대순진리회는 ‘식량난에 대비하라’는 교리에 따라 2000년 ‘아그로상생’이란 현지 법인을 세워 연해주에 진출한 이후 빠르게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지금까지 인수했거나 인수를 추진하는 토지만 해도 13만ha(4억평). 서울 면적의 두 배가 넘는다. 연해주 사람들이 요새 “손 짚으면 대진(대순진리회의 준말) 땅”이라고 농담할 정도다.
대순진리회의 아그로상생은 옛 소련도 실패한 집단영농사업에서 성공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넓고 편평한 연해주 땅은 대형 콤바인과 트랙터 등의 농기계와 관개시설이 필요하다. 옛 소련은 이러한 시설을 갖추지 못해 드넓은 땅을 포기했던 것이다.
아그로상생은 기계와 설비를 대대적으로 들여놨다. 트랙터 185대, 콤바인 64대, 트럭은 89대에 달한다. 2만t짜리 곡물창고 두 곳을 인수하고 4000t 이하 곡물창고도 6개나 갖췄다. 이곳에서 일하는 영농 인원만 해도 730명이 넘는다. 곡물 생산과 고용이 늘어나자 아그로상생 농장이 자리잡은 아누친스키군(郡)은 “아그로상생이 영농에 투자할 경우 100% 투자를 보장하겠다”고 나섰다.
유니베라는 연해주에 650만평 규모의 특용작물 농장을 만들어 고부가가치 식물을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식물은 건강기능식품과 화장품으로 가공돼 러시아, 유럽, 중국, 일본, 미국 등 15개국에 판매될 예정이다. 아그로상생과 유니베라의 전례를 보며 연해주의 전문가들은 집단농장과 고부가가치 작물 재배의 가치를 깨달았다.
헤이그 특사 이상설 선생을 기리는 추모비.
발해의 땅, 다민족의 터전
한 사람이 간 길을 다른 사람이 밟으면서, 길은 더욱 단단해진다. 동북아평화연대가 부지런히 오간 곳으로 인연이 계속 이어진다. 충북 괴산에서 농사를 짓던 장민석(51)씨는 ‘아름다운 가게’가 벌인 ‘고려인에게 자전거 보내기’ 사업에 참여했다가 연해주와 인연이 닿았다. 몇 차례 연해주를 오가다가 장씨는 지난 5월 막내아들 하연이와 함께 연해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는 농업지원센터장을 맡아 연해주에 자연농법을 전파할 예정이다.
인터넷쇼핑몰 인터파크는 연해주 고려인 마을에서 생산한 청국장을 판매할 수 있도록 쇼핑몰에 자리를 내줬다. 자연콩 청국장 판로가 열림으로써 연해주 고려인 농가에 고부가가치 사업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현재 청국장은 고려인 각 가정에서 생산되고 있지만, 7월 중순 이후엔 우정마을 초입에 있는 청국장 공장에서 공동 생산될 예정이다.
자연농법 전수도, 청국장 생산판매도 고려인 마을엔 희소식이다. 특히 자연농법 효과는 현지 농사꾼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신통방통’하다. 우정마을에 정착한 한국인 주인영씨는 성인 남자 머리만한 상추 잎을 들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씨를 자연농법으로 키웠더니 이렇게 컸어요. 원래는 손바닥만한데, 올 2월에 괴산의 자연농업연구소에서 딱 일주일 배워와 적용했더니 쑥쑥 자랐어요. 맛도 좋네요.”
그런데 이 농법을 전파한 조한규 자연농업연구소장이 연해주의 활동가들에게 신신당부하는 말이 있다. “자연농법을 독점하지 말 것, 러시아 이웃들과 나눌 것”이다.
“사람 마음은 다 비슷합니다. 내 농장에서 자라는 건 손바닥만한데 고려인 농장에서 자라는 게 큼지막하면 시기심이 생겨나죠. 자연농법은 나눈다고 해서 줄어드는 게 아니에요. 부지런히 배우고 일하면 다 함께 많이 얻게 되는 거니까요.”
동북아평화연대 황광석 국장은 연해주의 고려인 정착 프로젝트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연해주가 예전에 발해 땅이었으니까, 한민족이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논리는 위험합니다. 러시아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민감합니다. 러시아가 남한, 북한과 손잡으려 하는 건 중국의 진출을 견제하려는 의미가 큽니다. 연해주를 러시아와 한인 등 소수민족이 상생(相生)하는 땅으로 만들려는 것이지요.”
그는 발해가 한민족, 말갈족 등 다민족이 섞여 형성된 국가임을 강조했다. 에너지와 식량 안보의 위기 속에 동북아의 보고(寶庫)로 떠오른 연해주, 그 연해주에서 큰 사업의 꿈을 펼치고자 하는 사업가의 비즈니스 모델은 오히려 과거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다민족 상생의 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