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생 남 돕길 좋아하는 한국인 청년과 일본인 처녀가 사랑을 했다. 아버지는 동네 거지들을 데려다 먹이고 입혔고, 어머니는 고아들의 콧물받이 눈물받이가 됐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 노인들을 돌본다. 한국에서 32년간 2995명의 고아를 길러내고도 임종 무렵 ‘우메보시’를 찾던 일본인 어머니를 잊을 수가 없어서다.
빗방울? 그건 사랑이다. 신념이다. 아니 사랑과 신념을 모아 강과 바다로 흘러가게 만드는 소셜워커(사회사업가)의 정열이다. 정열이 모이면 하나의 활성화된 에너지가 된다. 그 에너지는 응축되면 절로 폭발하는 성질이 있다.
그 폭발이 사회사업가 윤기로 하여금 일본에 재일(在日)한국인을 위한 노인홈을 만들게 했다. 오사카에 하나, 지진 참사가 있었던 고베에 하나. 지금은 교토에 또 하나 노인홈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름은 ‘고향의 집’. 고향의 집에서 노인들은 입모아 아리랑을 부르고 동요 ‘고향땅’을 부르고 온돌방에 잠자고 김치찌개를 끓여 먹는다. 앞으로 일본에 ‘고향의 집’을 7개 더 지어 10개를 채우는 것이 윤 이사장의 꿈이다. 또 일본 아닌 땅에도 ‘고향의 집’ 10개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 윤 이사장의 판단이다.
“한국의 사회사업가를 세계가 부르고 있어요. 해외동포가 700만 아닙니까. 3만명에 1명씩이라고 해도 250명은 해외에 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북한에도 동북아에도 사회사업전문가가 들어가야 해요. 일본의 노인홈에 늘 ‘죽고 싶다’고 하는 한국 할머니가 계셨어요. 일본 사회복지사는 ‘저 노인이 자살 충동을 느끼나보다’ 하면서 긴장했는데,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복지사가 와서는 ‘할머니, 정 죽고 싶으면 내가 그만 죽여줄까?’ 하고는 둘이 깔깔 웃는단 말이에요. 같은 언어를 쓰는 복지사가 아니면 그런 정서가 어떻게 통할 수 있겠어요?”
그는 기적을 이루는 사람이다. 기어코 꿈을 이룰 것이다. 물론 윤 이사장 자신을 위한 꿈은 아니다. 평생을 이국에서 보내고 낯선 땅에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이들, 그들 모두를 위한 것이다. 설령 ‘고향의 집’에 들어가서 임종하지 않더라도 한국인 전용 노인홈이 거기 있다는 것 자체가 어르신들을 안심시킨다. 불현듯 조국땅이 몸살 나게 그리우면, 뜨끈뜨끈한 온돌방에 엉덩이를 지지지 못해 눈물이 날 정도면, 김치와 된장이 못 견디게 먹고 싶어지면, 우리말로 푸근한 잡담과 수다가 떨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면 바로 거기 ‘고향의 집’으로 달려갈 수 있다는 현실, 그 자체가 어르신들을 어루만지고 달래는 위로이고 치료이고 보험이고 ‘빽’이다.
‘움직이는 청구서’
그가 맨처음 세운 오사카 한국인 노인홈은 한 해에 입소 희망자가 400명씩 줄을 선다. 그런데 20명밖에 자리가 비지 않는다. 한국인 고령자들은 “고향의 집 들어가기가 도쿄대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들 한다. 재일 한국인이 70만이고 그중 9만이 노인이다. 자식이 있어도 나이 들면 외로워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고향이 그리워지는 것도 같다. 이제와 한국이나 북한으로 돌아갈 처지도 아니다.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의 아까운 시간을 다다미방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일본 복지사들 손에 맡겨둬야 하나. 전쟁 전엔 강제노역으로, 전후(戰後)에는 일본의 재건 현장에서 뼈 빠지게 일만 해온 그들을? 친절하고 정직하고 예의바르다는 일본인들은 도대체 뭣들 하나. 그게 윤 이사장의 문제의식이었다.
사회사업가로 태어나 사회사업가로 잔뼈가 굵은 윤 이사장에게 사회적 ‘니즈(needs)’가 생겨나면 그건 곧바로 행동으로 연결된다. 호소하고 뜻을 모아 동참할 사람들을 찾아나선다. 발 벗고 달려가고 글을 쓰고 강연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기적은 일어난다. 물방울이 강이 되는 것이다.
“난 ‘움직이는 청구서’예요. 많이는 말고 벽돌 한 장씩만 도와달라고 말하지요. 365분의 1만 할애해달라고, 1년에 하루만 노인홈에 나와 봉사해달라고 부탁해요. 한 사람이 많이 기부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조금씩 하는 기부가 훨씬 큰 의미가 있습니다. 복지시민이 있어야 복지국가가 되는 겁니다.”
그의 말은 사회복지에 관한 교과서였다. 나는 짧은 시간에 복지의 정의와 현황과 역사와 의미를 모조리 훑은 기분이었다. 처음 그가 일본에 사는 한국인 노령자에게 뜨거운 관심을 갖게 된 건 신문에 난 기사 때문이었다. ‘통일일보’라는 교포신문에 실린, 아이치현에 살던 재일교포 노인이 사후 13일 만에 발견됐다는 기사였다. 어떤 교포노인은 화재 속에서 구출됐으나 홀로 투병하다 끝내 사망했고 유족이 없어 복지사업소가 유골을 보관하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곳이 정글도 아니고 무인도도 아닌데 한 사람의 죽음이 13일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다니 말이 되는가. 재일교포 노인들은 결국 정치의 피해자들이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국회에서 “전후처리는 끝났다”고 간단하게 말했지만, 홀로 외롭게 살다 죽어 방치되는 사체가 있는데 끝은 무슨 끝인가. 가엾고 애달프고 분하고 서러워서 윤 이사장은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숱하게 문을 두드리고 다녔다. 예상외로 온정의 손길은 넘쳐났다. “일본엔 기독교인 숫자가 적어서 안 될 거다” “일본인은 성정이 냉정해서 안 될 거다” “땅 한 평 없는 주제에 무슨 허무맹랑한 시도냐”고들 했지만 가볍게 이겨냈다.
일본 내 한국인 노인홈을 지은 공로로 윤 이사장은 6월1일 삼성그룹이 주는 호암상(사회봉사부문)을 받았다. 그의 업적이 노인홈만은 아니다. 그는 평생을 소셜워커로서 살아왔다. 아니 대를 이어 그렇게 살고 있다. 80년 전 목포에 맨 처음 공생원이란 고아원을 연 부친 윤치호씨에 이어 그가 했고, 이제 하나 있는 딸 윤록씨도 목포 공생원을 맡아 3대가 사회사업가의 길을 걷는 중이다.
그는 요즘 한 달에 일주일 정도만 한국에 머문다. 나머지 3주는 일본에서 지낸다. 1970년대, 공생원을 나가는 친구들에게 일자리를 얻게 할 목적으로 그가 만든 ‘한남동 청소년직업학교’에서 윤기 이사장을 만났다. 낯빛이 밝고 눈매가 따스한 초로의 신사가 손을 내민다. 손이 크고 억세다. 손아귀 힘이 강하다. 키는 작지만 몸이 야물고 날쌔 보인다. 웃음이 특별히 환하다.
그가 쏟아내는 이야기는 고비마다 날 감동시켰다. 주책없이 눈물이 핑그르르 돌아 윤기 원장과 나는 동시에 얼굴 비벼대기를 여러 번 반복해야 했다.
그는 목포에서 태어났다. 목포 공생원이 그의 집이었다. 고아들과 똑같이 자랐다. 목포중·고교를 나와 중앙신학대 사회사업학과를 졸업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마흔까지 여기서 살았으니 친구도 추억도 정서도 취향도 모조리 한국인이다. 지금도 무심코 입을 열면 불쑥 튀어나오는 건 목포중학교 교가다. ‘백두산 뻗친 줄기 유달에 닿고 오천년 넋을 받은 겨레의 아들….’
그러나 그의 국적은 한국이 아니다. 그는 일본인이다. 아버지는 한국인 윤치호, 어머니는 일본인 다우치 시즈코였다. 부친의 성(姓)을 취하는 국적법에 따르면 그는 한국인이라야 마땅할 테지만, 무남독녀인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가 그 집의 데릴사위로 입적했다. 물론 그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속속들이 한국적 정체성을 가졌지만 국적은 일본인이라는 사실, 그게 윤기 이사장을 언제나 괴롭혔다. 어려서는 ‘쪽발이’라고 놀림받았고, 일본에 가면 당연히 말도 문화도 서투르고 어색한 이방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국인과 일본인이라는 알량한 가름을 뛰어넘기로 했다. 나는 한국인이고 동시에 일본인이다! 그래, 나는 코스모폴리탄이다! 한국과 일본을 잇는 다리를 놓는 데 나만큼 적임자가 또 있느냐? 그게 내 몫의 일이다. 그게 일본인이면서 한국인인 나의 운명이다!
‘사랑의 묵시록’
“내 평생의 테마는 크게 두 가지였어요. 첫 번째는 복지, 두 번째는 한일 간의 숙명적인 문제를 푸는 데 앞장서자는 것!”
그의 인생 테마를 말하기 전에 먼저 그의 부모 얘기를 해야 한다. 아버지 윤치호씨는 목포의 ‘거지대장’이었다. 다리 밑 거지들을 줄줄이 끌고 다닌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기독교 전도사로 거리에서 전도를 하다 거지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오는 바람에 절로 고아원을 운영하게 됐다. 사랑으로 보살피고 희망을 주려 노력하고 배불리 먹여도 고아들의 얼굴은 늘 어두웠다. 그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면 얼굴이 펴지지 않을까, 음악선생을 구하면 아이들에게 웃음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1928년 공생원을 설립한 윤치호 전도사는 생각했다(‘공생원’의 ‘공생’은 글자 그대로 ‘더불어 함께 산다’는 뜻이다).
목포여고 영어교사에게 피아노 칠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영국 에든버러 대학을 나온 그 인텔리는 자신의 제자인 얌전한 일본 처녀 하나를 소개했다. 아버지는 조선총독부 목포부 관리, 어머니는 조산원으로 일하는 일본인 부부의 외동딸이었다. 공생원에 와서 수백명의 고아를 만난 처녀는 피아노만 치는 게 아니라 아이들 코 닦아주고 세수시키고 이 닦아주고 밥을 먹였다. 제집에 있는 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나와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거지대장 윤치호에게 그 처녀는 하늘이 내려준 사람이었다.
둘은 뜻이 맞았고 서로 사랑했다. 예나 지금이나 주변에선 그런 처녀더러 ‘돌았다’고 했다. 총독부 관리가 아버지였으니 딸의 ‘미친 짓’을 말리고 싶은 아버지는 공생원을 도시계획에 걸렸다며 철거해 버렸다. 그러나 둘은 1939년 기어이 결혼한다. 어렵게 결혼이야 했지만 시대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두 젊은이의 삶이 평화로울 리 만무했다.
1945년 드디어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은 독립을 이룬다. 아내는 울고 남편은 웃었을까? 그럴 리 없다. 남편 성을 따라 이름을 윤학자로 고쳤던 윤기 이사장의 어머니, 그녀는 해방 이듬해 홀로 된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둘 사이엔 이미 아이가 둘이나 생겨 있었다. 작은아이 기는 밤마다 아버지를 찾으며 울어댔다. 1년 만에 그녀는 아이 둘을 데리고 남편과 고아들이 기다리는 목포로 돌아온다.
“누나는 지금도 가끔씩 날 원망해요. ‘그때 네가 그렇게 울지만 않았으면 우린 그냥 일본에서 잘 살았을 텐데…’ 하면서.”
해방의 감격 속에 아버지는 친일파로 몰렸고, 6·25 때는 인민재판을 받았고, 국군이 들어왔을 때는 스파이 혐의로 경찰에 끌려갔다. 그리고 1951년 광주도청에 가서 고아들의 식량을 구하겠다며 나간 후 행방불명이 되어버렸다. 공생원만 어머니의 손에 남겨졌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버지가 돌아와 “공생원은?” 하고 물을까봐 목포를 떠날 수 없었고, 공생원 고아들을 돌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임종하는 그날까지 어머니는 공생원과 고아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일했다. 그동안의 우여곡절이야 이루 말도 못한다.
이 이야기는 아무래도 영화 스토리 같다. 로망과 휴먼과 멜로와 역사가 고루고루 섞였으니 시나리오로 만들기에 안성맞춤이겠다. 아닌게아니라 윤학자 여사의 삶은 1960년대 ‘사랑의 묵시록’이란 제목으로 김수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다. 한남동 직업학교 윤기 교장의 방에 그 영화의 낡은 포스터가 붙어 있다. 옆방엔 ‘나는 거지대장의 아들이다’라고 써있는 커다란 편액도 걸려 있다.
재일교포 노인들의 식사를 돕는 윤기 이사장(맨 오른쪽).
어머니 윤학자 여사는 한복을 좋아하고 김치가 없으면 밥이 안 넘어가는, 한국인보다 더한 한국인이었다. 일곱 살에 한국에 와서 야마테 소학교(지금의 유달초등학교)와 목포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결혼 후에 국적을 일본으로 바꾸긴 했지만)과 결혼해 한국 고아들을 키우며 평생 한국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임종 무렵 아들 기가 지켜보는 데서 사그러져가는 기운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메보시가 다베타이(우메보시가 먹고 싶구나)….”
임종의 순간 제나라 말로 간절하게 되뇌는 제 나라 음식! 태어난 나라란, 고향이란, 어려서 먹고 자란 음식이란 그런 것이었다.
임종 당시 어머니의 그 나지막한 말이 윤 이사장을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 일본에선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죽어가고 있을 것인가. 그들은 죽어가면서 “김치가 먹고 싶다”라고 말하겠지!
그는 오사카에 사무실을 얻었다. 목포의 공생원과 직업학교 운영은 일단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로 했다. 재일교포 노인들에게 김치를 먹여주는 게 자신의 임무이고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반(半)일본인에 반(半)한국인인 그의 태생적 조건이, 어머니의 안타까운 죽음이 그를 일본으로 떼밀었다.
어머니의 장례는 1968년 목포 시민장(葬)으로 치렀다. 개항 이후 처음으로 치러지는 시민장이었고 더구나 외국인의 장례였다. 공생원 고아들이 모두 어머니를 부르며 울었고 장례에 참석한 각계의 귀빈들도 울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이렇게 썼다
“…남편이 행방불명되자 윤 여사는 40명의 고아들과 네 자녀를 혼잣손으로 길러야 했다. 다행히 미국 선교사 니콜슨씨의 도움으로 젖소 30마리를 들여와 고아들에게 젖을 먹이고 운영비에 보탤 수 있었다. 일본에 공생원 후원회가 생겨 400만여 원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윤 여사가 32년간 길러낸 고아는 2995명, 그녀가 세상을 떠날 당시 공생원엔 158명의 갓난아기와 212명의 고아가 있었다. 갑자기 졸도한 윤 여사의 병명은 조기 노쇠….”
어머니의 장례에 참석한 가나야마 마사히데 일본대사에게 장남 기는 당돌하게 제안한다. “일본의 잘못을 사과하세요. 한국은 국교 정상화 이전인 1963년에 이미 일본 여자인 우리 어머니에게 문화훈장을 줬어요. 대사님이 일본의 사과를 목포시민에게 전하세요.”
가나야마 대사는 멋진 사람이었다. 그날 한 일본 여인의 시민장에서 그는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면서 시민들을 향해 절을 한다. 가나야마 대사는 윤 이사장의 한국인 노인홈 건립을 적극적으로 돕는 후원자가 됐다.
26세에 고아원 운영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그는 어쩔 수 없이 목포 공생원을 맡았다. 26세의 총각, 갑자기 수백명 고아를 맡을 순 없다고 펄쩍 뛰었지만, 빚투성이 공생원을 떠안을 사람은 없었다. 그간 빚을 내서 아이들의 식생활을 해결할 정도로 공생원 운영은 엉망이었다.
“망할 때는 그저 장남일 뿐이었잖아요. 사회사업을 전공하긴 했지만 굳이 원장의 아들이 맡을 필요는 없었는데…. 보통사람 월급이 5000원 정도 할 때인데, 320명 아이들의 생활비만 38만원 넘게 들어가고 거기다 이자가 50만원이 넘게 나가는 살림이더라고요.”
젊은 원장은 채권자들을 불러모아 담판을 벌인다.
“빚을 얻어 고아원을 운영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자, 어머니를 믿고 돈을 빌려준 고마우신 여러분, 여러분도 이 고아원을 이렇게 키워놓은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 열 분이서 각자 아이 30명씩 데리고 가십시오. 못 데려가시겠거든 앞으로 이자는 받지 마십시오. 원금은 제가 형편 닿는 대로 어떻게든 갚을 테니.”
용기도 필요했지만 진실한 태도가 채권자들에게 먹혔다. 3년 뒤에 그는 약속대로 빚을 다 갚는다. 각계의 온정을 얻었고 다양한 프로그램도 만들었고 일본 도시와 결연도 맺었고 후원회도 결성했다.
이 무렵 그는 공생원 아이들로 ‘수선화 합창단’을 만든다. 그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 순회 공연도 다녔다. 사연을 적어 보냈더니 일본항공이 초청장을 보내준 것이다. 그는 감동을 자아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합창단을 데리고 일본의 박애사란 아동복지시설에 들렀을 때 거기서 일하던 한 일본 여성을 만난다. 아내였다. 둘은 윗대 부모가 그랬듯 한눈에 반했고 결혼한다. 1972년이었다. 결혼축의금과 아내의 지참금으로 부부는 목포 앞바다 고하도에 국유지 9만평을 불하받는다. 그리고 공생원 마당에다 결혼기념으로 히말리야 시다 딱 100그루를 심는다.
“원장님도 노후대비 하세요”
“사회복지법에는 18세가 되면 고아원을 나가게 돼 있어요. 공생원을 나간 아이들이 돌아와서 신세타령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보증서 줄 사람이 없어 취직도 못하겠다, 잠잘 곳도 없다, 이렇게 키워서 내다버릴 바엔 어려서 죽게 두지 키우기는 왜 키웠냐’고 원망들을 해요. 복지에서 자립만큼 중요한 건 없거든요. 도와주는 게 아니라 자립할 수 있게 만들어줘야 진정한 복지인데…”
문제가 있으면 풀어내는 것이 그의 특기! 그 후 공생원은 서울특별시의 직업훈련사업을 위탁받는다. 그리고 사회에 나가는 아이들에게 기술 한 가지씩을 들려보낼 수 있게 됐다. 직업훈련원은 곳간차에서 특급열차로 옮겨 타는 티켓이었다.
“직업훈련원은 행복으로 가는 철길이었어요. 전에 아버지도 대중 엿방과 나사렛 목공소를 운영했고 어머니도 목포조선소와 제주목장을 만들어 고아들과 더불어 자립해보려고 발버둥을 치지 않은 건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실패했지요. 시대보다 한걸음 앞서가야 하는데 열 걸음 앞서갔으니 실패할 수밖에요. 나는 공생원 아이들에게 늘 ‘당당하게 세금 내고 사는 시민이 돼라’고 말했어요. 훈련원을 거쳐 나간 소녀들이 미장원도 개업하고 양장점도 개업하고 그래요. 자립을 하고나면 대화 내용이 달라지죠. 남을 걱정할 줄 알게 되거든요. ‘원장님도 마냥 이렇게 사실 게 아니라 인제 노후를 대비하셔야지요.’ 와, 그런 소리까지 해요. 아이들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정말 그보다 더 기쁠 순 없었지요.”
훈련원이 자리를 잡자 그는 미련 없이 원장직을 버린다. 그리고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으로 간다고 하면 아내가 좋아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후미에(한국명 윤문지. 그녀는 윤기씨와의 만남과 결혼생활을 기록한 휴먼 다큐멘터리로 일본 ‘요미우리신문’ 공모에 당선했다)는 정든 공생원과 아이들을 떠날 수 없다고 외려 반대를 해요. 그게 벌써 20년 전 일입니다.”
공생복지재단 도쿄사무소를 개설하고 ‘마음의 가족 운동’을 펼친다. 마음의 가족이란 도시화, 핵가족화, 산업화, 기계화에 밀려 정든 고향, 따뜻한 가정, 남을 생각하는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린 현대인을 위해 마음의 가족이라는 끈을 이어가는 일이다. 가정의 따스함을 모르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외로운 노후를 보내는 노인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는 사랑 운동이다. ‘고향의 집’ 건립도 크게 보면 그 마음의 가족 운동의 일환임은 물론이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학문
“현대인은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돼야 하거든요. 전에는 공동체가 있어 역할을 분담했는데 지금은 그게 없어져버렸잖아요. 일본이 아무리 경제대국이라고 해도 노숙자가 3만이고 자살하는 사람이 3만이라는 건 뭔가 사회제도에 구멍이 뚫렸다는 뜻이거든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연결고리가 끊어져버렸어요. 생활보호시설에 들어갈 정도로 가난하지 않고 정신병원에 갈 정도로 비정상은 아니고 노인홈에 갈 정도로 늙지는 않은 사람들, 그러나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제도와 제도의 그 고리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고리를 연결해줄 사람이 바로 사회복지사입니다.”
사회복지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학문이라고 그는 확실히 믿는다.
“내가 처음 사회복지를 공부한다고 할 때는 그것도 학문이냐고 골리던 친구들이 요즘은 자식들에게 사회복지를 공부시키겠다며 내게 묻는다니까요.”
윤 이사장은 지금 행복하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는 ‘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을까’ 자문하곤 했다. 그게 습관이 됐다. 대답은 늘 같았다. ‘뭘 두려워하느냐, 네 뒤엔 하느님이 계시지 않으냐?’ 돈을 만지는 일이니 때로 오해도 따랐다. 억울해하는 그에게 아버지는 말하셨다. ‘하느님이 다 알고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냐.’
“호암상은 부모님이 받으실 걸 제가 대신 받은 겁니다. 지금도 우리는 중대한 결정을 앞에 두면 아버지, 어머니와 셋이 함께 대화하곤 하지요”
2년 후엔 공생원 80주년을 기념해 목포에다 자그맣게 한국복지역사관을 만들 계획도 세워뒀다.
|
그는 기억력이 정말 좋다. 옛날 노래들을 잘도 불러댄다.
“‘낯이 설어 설인가, 서러워서 설인가. 우리나라 설날이다. 일어서는 날이다.’ 이 노래 가사 정말 좋지요? 공생원을 나간 아이들은 설이 돼도 갈 데가 없어요. 그래서 해마다 한 500명씩 공생원에 모여 놀았는데 그날 부르려고 내가 윤석중 선생께 부탁해서 만든 노래예요. 정월초하루의 노래! 이런 건 복지 교과서에도 없는 거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