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맨해튼’ 테헤란로에서 세계적 건축회사 KPF와 SOM의 초고층건물 설계전쟁이 뜨겁다. 개성 있는 디자인과 축적된 기술로 우리 건축수준을 한단계 높인 두 회사의 경쟁을 보며 어느 건축물이 테헤란로의 ‘랜드마크’가 될지에 건축인뿐 아니라 일반인의 시선도 쏠리고 있다.
그러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주택 200만호 건설’의 여파를 타고 테헤란로 구간도 차츰 개발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엔 경기 호황 속에 포스코, 현대그룹 등 대기업 본사건물이 들어서고, 2000년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를 대비해 국제회의와 전시를 위한 대규모시설이 경쟁적으로 착공되기 시작했다.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맞아 사업을 중단하거나 사업계획을 변경해야 하는 최악의 국면에 처하기도 했지만, 2000년대 들어 경제가 안정되면서 중단됐던 건설공사가 마무리되거나 새로 건물이 착공되는 등 테헤란로는 또다시 활기를 찾았다. 이제는 어느 외국 도시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도심가로(都心街路) 경관을 갖추게 됐다.
최근 스타타워, GS강남타워, 동부금융센터, 강남교보빌딩, 한솔빌딩, 현대산업개발 본사사옥, 메리츠타워 등 대규모 업무용 빌딩과 도곡동 타워팰리스를 비롯한 초고층 주상복합건물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테헤란로 일대의 스카이라인은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고 있다.
상전벽해, 테헤란로 스카이라인
평소 건축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 테헤란로 건축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새로 지은 건물들이 기존의 건물들과 비교해 높이와 연면적 등 규모는 물론이고 외관상으로도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물을 디자인한 설계자가 누구인지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다. 새로운 건물의 설계자가 대부분 외국의 유명 건축가나 설계회사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세간의 이목이 더욱 집중됐다.
일반인 사이에 건물의 설계자를 실명으로 거론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비전문가가 특정 건물의 설계자를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새로운 건물이 준공되어 언론에 보도되더라도 건물주나 시공회사의 이름은 나오지만 건축가를 실명으로 부각시키는 사례를 찾기 어려웠다.
이는 건축설계 분야 종사자들의 불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전문가를 적절하게 대접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관습에도 원인이 있다. 경주 불국사를 보더라도 설계를 담당한 사람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고 건설책임자인 관리(김대성)의 이름과 직책만이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건축가 개인이나 건축설계회사를 실명으로 거론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명예를 갖게 하는 동시에 작품에 대한 평가와 그에 따른 사회적인 책임도 함께 지도록 한다는 뜻이다.
실명보다 익명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옥석(玉石)을 구분하는 기준이 불분명하고 책임소재가 모호해져 건축수준의 지속적인 발전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반면 일반적으로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일수록 건물주나 시공자 등 여타의 관련자보다 건축가의 이름을 분명하게 밝힌다. 필자는 외국여행을 하면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눈길을 끄는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의 이름을 택시기사나 행인으로부터 듣게 되어 깜짝 놀라곤 했다.
테헤란로 일대를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 비유하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구 1000만이 넘는 거대 도시의 중심업무지구(Central Business District)로서 현대사회의 특징인 문화와 상업의 기능을 고루 갖췄고 고층빌딩 숲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뉴욕은 세계 도처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함께 비비고 살아서 ‘용광로(Melting Pot)’라고도 부르지만 ‘마천루의 도시’라고도 한다. ‘마천루(摩天樓, Skyscraper)’는 ‘하늘을 문질러대며 흠집을 내는 건축물’이라는 의미로 19세기 말부터 미국의 대도시에 등장하기 시작한 고층건물을 지칭하는 단어다. 우리나라에서도 통용되고 있지만 원래는 일본인이 한자로 풀어 만든 신조어로 추측된다.
맨해튼에는 유명한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있고, 9·11테러로 붕괴됐지만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도 있었다. 102층 높이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건설하는 데 14개월이 채 소요되지 않았다거나, 1930년대 초반에 전세계를 휩쓴 대공황기에 건설되어 준공 후 10년 가까이 비어 있어서 별명이 ‘엠프티(Empty)스테이트빌딩’이었으며, 비행기가 충돌했어도 끄떡없었고, ‘킹콩’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같은 100편이 넘는 영화의 배경이 됐으며, 요즘도 뉴욕을 찾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최상층에 있는 전망대를 방문한다는 등 이 건물과 관련된 화제는 뉴요커들에겐 전설이 됐다.
외국 건축가들의 작품전시장
인구면에서 손꼽히는 국제도시인 서울의 테헤란로에는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과 견줄 만한 랜드마크 건물이 없었다. 빌딩의 꼭대기마다 ‘곤돌라’라고 하는 청소용 장비가 설치되어 있어서 “마치 함포를 갖춘 전함(Warship)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 같다”고 어느 외국인이 빈정댈 때에도 딱히 할말은 없었다.
1980년대 이후 대기업들은 그룹 내에 건축사 사무소를 직접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를 교두보 삼아 사주(社主)의 취향에 부응하는 ‘건축의 명품’을 장만하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했고, 서소문 중앙일보사옥과 광화문 교보빌딩 등의 설계에 외국 건축가가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호황을 맞고 있었으나 미국은 불경기의 늪에 빠져 있는 형편이어서 유명, 무명의 미국 건축가들이 한국의 건축설계시장에 진출하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최근 자유무역협정(FTA) 바람이 불면서 국제적으로 시장을 개방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는데, 건축부문도 예외가 아니다. 내국인뿐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문호가 개방된 국제설계경기를 통해 주요 프로젝트의 설계자를 선정하는 것이 일반화됐다.
한국의 경제1번지라고 할 만한 테헤란로 일대는 요즘 대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외국 설계회사에 건축 디자인 용역을 발주하고 있다. 그 결과 외국 건축가의 작품 전시장으로 자리잡아가는 단계에 이르렀다. 앞으로 테헤란로를 지배하게 될 건축가를 미리 점쳐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테헤란로 일대 주요 건물의 디자인에 관여한 외국 건축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초동 삼성그룹빌딩 : KPF(미국) ▲강남교보빌딩 : Mario Botta(스위스) ▲메리츠타워 : Keating · Kang(미국) ▲푸르덴셜생명빌딩 : KPF(미국) ▲한솔빌딩 : HOK(미국) ▲포스틸사옥 : KPF(미국) ▲스타타워 : Kevin Rouche(미국)▲ GS강남타워 : SOM(미국) ▲타워팰리스Ⅲ : SOM(미국) ▲동부금융센터 : KPF(미국) ▲한국무역센터타워 : NIkken Sekei(일본)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 : Charles Cober(미국) ▲ASEM 컨벤션센터 : SOM(미국) ▲COEX 인터컨티넨털호텔 : SOM(미국) ▲ASEM 타워 : SOM(미국) ▲현대산업개발 본사빌딩 : Daniel Libeskind(미국) ▲잠실 롯데월드 : Kurokawa Kisho(일본) ▲잠실롯데월드Ⅱ : SOM(미국)
미국의 설계회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KPF와 SOM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고층건물의 역사는 엘리베이터가 발명된 19세기 말부터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이며, 주로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미국의 대도시에서 출발점을 찾을 수 있다. 20세기 말까지 고층건물의 건설과 관련한 기술이 미국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개발됐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미국의 건축설계회사가 경험이 가장 많은 것은 당연하다.
KPF는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우리나라 건축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진은 KPF가 설계한 건물들. 왼쪽부터 포스틸, 동부금융센터, 푸르덴셜생명 빌딩. KPF
아직까지 한국의 설계시장에서 절대강자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당분간 국내 설계회사는 물론 외국계 설계회사 간에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성과에 비춰볼 때 KPF와 SOM 가운데 한 회사가 이 지역의 선두주자로 부상할 개연성이 매우 높다.
건축설계 분야에서는 과거에 수행한 작품에 대한 평가가 마케팅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외국 건축가가 한국시장에서 성공하느냐 여부는 자신들이 가진 노하우를 건물 디자인에 얼마나 구체적으로 반영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디자인 과정에서 건축주를 설득해 자신들의 아이디어가 원안대로 채택되도록 유도하는 것, 그리고 국내 파트너 건축사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이뤄 이를 실시설계에 충실하게 반영하는 것이 성패의 관건이 된다.
현행법에 따르면 건설교통부 장관이 면허를 내준 국내 건축사가 설립한 건축사사무소를 통해서만 건축허가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외국 건축가가 관여해 건물을 디자인하는 경우라도 국내 건축사사무소와 협력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경우 설계에 관한 법적인 책임은 전적으로 국내 건축사에게 돌아간다.
SOM은 초고층 건물을 많이 설계한 경험과 기술력으로 설계시장을 선도해왔다. 사진은 SOM이 설계한 건물들. 왼쪽부터 GS강남타워, 타워팰리스 Ⅲ, 코엑스 인터컨티넨탈호텔.SOM
KPF와 SOM은 우리나라에 진출한 외국계 설계회사 가운데 가장 치열하게 경합을 벌이고 있고 한국의 건축설계시장을 주도하는 쌍두마차로서 부동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두 회사는 모두 설립자인 세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회사명을 사용하고 있으며, 개인이 아닌 파트너십을 통해 운영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디자인 면에서는 매우 다른 성향을 드러낸다. KPF의 독창적인 디자인 능력이 ‘창’이라고 하면 SOM의 경험과 기술력은 ‘방패’가 될 것이어서 이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한판승부를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두 회사는 공히, 개인이 운영하는 아틀리에가 아닌 대규모 설계조직(Colla-borative Design Firm)의 형태여서 디자인의 독창성 유지와 조직관리 면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승부를 가르는 관건이 될 것이다.
KPF는 현재 회장을 맡고 있는 유진 콘(Kohn)을 중심으로 윌리엄 피더슨, 셸던 폭스 등이 1976년에 설립한 회사로 미국 뉴욕 본사 외에 영국 런던과 중국 상하이에 지점을 두고 있다. 직원은 약 400명 규모다. 직원들은 전세계 43개국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고 30개국 이상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이 회사는 창립 당시부터 ‘차별화된 우수한 디자인’과 ‘지속가능한 도시건축’을 일관되게 추구해왔다. 확고한 건축철학을 바탕으로 조형성과 개성을 강조하는 작품에 비중을 두며, 그동안 200회 이상 건축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적으로 성가가 높다.
상하이에 건설 중인 국제금융센터타워는 492m, 101층 높이로 초고층 건축설계 분야에서 KPF가 SOM의 아성에 도전하는 야심작으로 꼽힌다. KPF가 설계해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수도 아부다비에 삼성건설이 건설 중인 ADIA본부빌딩은 이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초고층 오피스빌딩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 부산 수영만에 100층 규모의 초고층건물을 계획했으나 건축주인 대우그룹의 몰락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최근에 인천 송도신도시개발계획 등의 초대형 프로젝트, 삼성그룹의 로댕미술관과 같이 예술성이 풍부한 소규모 건물의 디자인을 맡기도 했다. 서초동 강남역 근처에 삼성강남타운(43층, 43층, 32층 3개동) 건물이 한창 공사 중에 있어 테헤란로의 새로운 명물 탄생이 기대된다.
SOM은 루이스 스키드모어, 너새니얼 오윙스가 1936년에 설립한 회사로 전세계에서 초고층건물을 가장 많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랜 경험과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건물을 디자인한다. 미국 시카고에 본사를 두고 뉴욕, 샌프란시스코, 워싱턴DC, LA 등 미국 내 5개 사무소와 런던, 홍콩, 상하이에 해외지사를 운영하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시어즈타워(109층)와 100층의 초고층 주상복합건물인 존행콕센터 등을 포함해 미국 내 초고층건축을 다수 설계했다. 또한 중국의 발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상하이 푸둥지역의 진마오빌딩을 설계했으며, UAE의 최대 상업도시인 두바이에 건설 중인 세계 최고 높이의 버즈두바이타워, 9·11테러로 붕괴된 ‘세계무역센터(WTC)’ 자리에 건축하는 새 건물(프리덤타워)의 설계를 맡고 있다.
SOM은 1961년에 미국건축가협회(AIA)가 최초로 건축설계회사에 수여한 ‘우수디자인상’을 받은 회사로, 1996년에 두 번째로 이 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은 800회 이상의 건축상을 받은 데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규모 설계회사로서 40여 개 나라에서 1만건 이상의 건축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1970년대에 여의도 LG트윈타워 설계를 통해 일찍이 한국과 인연을 맺은 이래 GS강남타워, 삼성동 ASEM컨벤션센터, 경기도 일산의 한국국제전시장(KINTEX) 마스터플랜 등 대형 프로젝트를 맡았다.
테헤란로 랜드마크는 제2롯데월드?
서울 강남의 뱅뱅사거리에 있는 푸르덴셜보험빌딩은 1998년에 완공됐으며 KPF가 한국에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한 건축물이다. 원래 동부그룹이 사옥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설했지만 외환위기 상황에서 몇 차례 건물주가 바뀌었다. 부정형의 모퉁이 대지의 특성을 살려 원통형의 매스를 중심으로 곡면으로 처리한 유리벽(Glass Curtain Wall)이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상자형 건물이 주류를 이루던 우리나라 오피스빌딩 디자인에 일대 혁신을 일으키며 이후 다른 건물의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2002년에 준공된 35층 규모의 동부금융센터의 조각 같은 외관은 건축주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이며, 입구 부분의 유리벽은 한국 전통 식탁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건축허가 당시 심의과정에서 외관상 불안감을 야기한다는 이유로 디자인의 변경을 요구받기도 했으나 준공 후인 2003년에 뉴욕시 건축상과 서울시 건축상을 수상했다.
인근에 있는 25층 규모의 포스틸 본사빌딩은 외환위기 때 중단됐다가 공사를 재개, 2004년에 준공됐다. 강판을 생산하는 회사에 걸맞게 강재의 특성과 기하학적인 이미지를 표현했다. 서울사랑시민상과 건축문화대상, 강구조 건축상을 받았다. 동부금융센터와 비교해 디자인상의 차별성과 일관성을 감상할 수 있어 KPF 디자인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국무역협회가 주관하고 SOM이 사업타당성 검토와 마스터플랜 및 건축설계 과정에 참여한 ‘ASEM 및 무역센터 확충사업’은 20세기를 마감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아시아와 유럽 32개국 국가수반이 참석한 2000년 ASEM을 계기로 기존의 무역센터를 확장해 건설한 것으로 4만평의 국제수준 컨벤션센터 및 전시장, 7만평의 오피스타워, 800실 규모의 특급호텔과 지하쇼핑몰(코엑스몰)의 기능을 수용하는 복합건축물로 서울 지하철 2호선 삼성역과 직접 연결된다.
GS강남타워는 33층, 4만8000평 규모로 국제회의장과 연회장을 갖춘 초고층 복합 업무시설로 디자인 의도는 수직성과 역동성을 강조해 소유기업의 지속적인 성장을 표현한 것이다. SOM은 이 건물의 설계에서 에너지 사용 고효율화를 추구해 1996년 미국 냉동공기조화공학회(ASHRAE)로부터 ‘우수기술상’을 받았다.
73층으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타워팰리스Ⅲ는 1990년대 중반 삼성그룹이 111층의 초고층 오피스빌딩으로 계획했으나 교통혼잡을 우려한 인근 주민의 반대로 건설을 포기했다가 외환위기 이후 대규모 주상복합단지로 개발한 것이다. 2005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최근 전국적으로 확대된 국내 초고층주상복합건축 시장의 붐을 조성하는 모델이 됐다.
롯데그룹이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잠실 제2롯데월드 초고층타워의 설계는 112층, 555m 높이로 계획 중이며 미국회사인 RTKL을 거쳐 SOM에 맡겨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계획안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아직까지 서울공항과 관련된 건축허가상의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고 있으나, 앞으로 이 건물이 완성된다면 새로운 랜드마크로 부각될 것이 틀림없다.
‘건축은 사회의 거울’이라고 한다. 건축은 한 시대의 정신을 나타내며 그 사회의 풍조를 여과 없이 반영한다. 그래서 건축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의 모습을 닮아 태어난다. 사회가 정신적으로 건강한 시기에 지어진 건물은 내용이 충실하며, 사치가 만연하던 시대에 건축한 건물은 겉치레만 요란할 뿐이다.
건축은 인간의 생활을 담는 그릇이며 건축설계의 수준은 건축주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건축주가 건축을 이해하는 정도와 건축을 대하는 진정성이 그 건물의 수준을 정한다. 건물을 지으려는 목적과 건축을 통해 얻으려는 기대치에 따라 결과는 판이해질 수가 있다. 외국에 가보면 아름다운 도시가 많은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며 제대로 된 건물이 없다는 비판을 받는 책임은 무기력한 한국의 건축사와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명제를 통해 테헤란로의 상황을 정리해보면, 테헤란로는 지리적으로 업무의 효율성과 광고효과 등 경제적인 면에서 큰 잠재력과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고 있어 대기업 본사 건물이 집중적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들 기업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걸맞은 명품(名品) 수준의 건축을 요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 기업이 입주한 건물에 대한 평가를 통해 그 기업이 지향하는 바를 가늠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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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제품에 만족하지 못하면 외국산 제품에 눈을 돌리게 마련이다. 다만 굳이 명품을 장만하려 할 때 쓰임새와 무관하게 브랜드의 지명도만을 기준으로 상품을 구매하는 것과 명성만 듣고 건축가를 선정하는 것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외국 건축가가 한국의 설계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구태여 막을 이유는 없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건축수준을 향상시키고 국내의 건축가는 물론이고 건축주에게도 자극제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건물의 외관뿐 아니라 내용면에서 건축의 본질에 대한 우리 사회의 안목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