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틀, 전쟁의 문화사’<br>존 린 지음/이내주ㆍ박일송 옮김/청어람미디어/780쪽/2만8000원
그런데 군대나 전쟁의 다양한 면모를 알아야 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오늘도 수십만의 젊은이가 군복을 입고 있으며, 한때 군복을 입었던 사람까지 합치면 군대와 관련있는 사람의 수는 기하급수로 불어난다. 우리 역사는 지난 세기 전반기 내내 크고 작은 전쟁이 그치지 않았고 현재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병력이 밀집해 있는 동북아에서 살고 있다. 싫든 좋든 우리는 군대와 전쟁을 도외시할 수 없다.
군대와 전쟁의 참모습을 알려면 맨 먼저 군대와 전쟁의 과거를 알아야 한다. 역사는 지식의 바탕이다. 우리는 군대와 전쟁의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잘 모른다. 일단 군관계 기관에 소속된 연구자들을 빼면 군사사를 전공하는 학자가 거의 없다. 그러니 군사사 지식이 일반인 사이에 스며들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이 전쟁사에 흥미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오락·연예 사이트에 버금갈 정도로 조회 수가 많은 사이트가 군사 관련 사이트이며, 그런 사이트에는 꼭 전쟁사 게시판이 있고 누리꾼들이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관심이 협소한 전투사에 한정되는 바람에 전쟁과 군대를 넓고 깊은 맥락에서 인식하려는 노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 아쉽다.
전쟁의 중요한 요소, ‘관념’
군대와 전쟁의 다양한 속성을 설명해주는 역사서가 필요한 이유다. 다행히 최근 들어 윌리엄 맥닐, 존 키건, 리처드 오버리, 안토니 비버, 빅터 핸슨 등 서구에서 인정받은 학자들의 뛰어난 군사사 저술이 속속 우리말로 옮겨져 소개되었고, 그 책들이 출판시장에서 그런대로 팔리고 있다. 군사사를 역사학의 당당한 분과 학문으로 곧추세우려고 애쓰는 국내 연구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는 듯하다.
이런 가운데 이름난 역사학 교수이며 미국 군사사학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존 린(John Lynn)의 탁월한 저작이 우리말로 옮겨져 선을 보였다. 군사사 연구가 얼마나 심오할 수 있는지 한 수 가르쳐주겠다는 양 나온 이 책의 제목은 ‘배틀, 전쟁의 문화사’다. 이 책의 고찰대상은, 시기적으론 기원전 7~6세기부터 21세기 벽두에 일어난 9·11테러까지이고, 공간적으론 유럽에서 중동과 인도를 거쳐 중국과 드넓은 태평양에 이른다.
린처럼 탁월한 학자에게도 동서고금을 종횡무진 오가며 전쟁의 양상을 구명하는 작업은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근대 초 유럽의 군사사 연구로 입지를 굳힌 저자가 “공간적으로는 전세계, 시간적으로는 인류의 역사 전반에 걸쳐서 광범위한 사례들”을 다루는 위험한 모험에 나선 목적은 전쟁에서 ‘관념’이라는 요소가 중요하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함이었다.
린은 ‘배틀, 전쟁의 문화사’ 각 장 첫머리를 역사의 마디마디에 아로새겨진 이름난 전투에 관한 묘사와 서술로 장식한다. 그 목적은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싸움터의 극적 긴장과 묘한 짜릿함을 전하기보다는 전쟁의 수행 방식과 군대의 효율성은 무기나 기술의 수준보다는 군인의 정신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있다.
린에 따르면 전쟁의 양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이란, 군인이라면 불을 뿜는 기관총 앞에서도 ‘닛폰도(刀)’를 빼어 들고 ‘반자이(만세)’를 외치며 돌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대일본제국 육군의 무사도식 정신력이 아니라 전투를 벌이는 군인의 사고방식과 가치 체계다. 전쟁이 수행되는 양식은 무기나 기술이 아니라 전투를 벌이는 군인이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방식에 따라 정해지는 현상이 역사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국군의 승리를 위하여
예를 들어보자. 18세기에 프랑스 군인은 화려한 군복을 입고 기하학적 대형을 이루어 전투를 치렀는데, 이런 양상은 당대의 미적·사상적 취향이 반영된 것이었다. 횡대로 늘어서서 일제사격을 하는 당시의 전쟁 방식도 계몽주의 사상의 산물이며 평민 병사를 하찮게 여기는 귀족 장교의 가치관이 드러난 것이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숙적인 프랑스와 독일은 1940년에 똑같이 탱크를 보유한 현대군으로써 맞붙었다. 프랑스 육군의 치욕스러운 패배와 독일 육군의 빛나는 승리는 탱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시각 차에서 결정됐다. 프랑스는 탱크를 보병 부대 지원 용도로 간주하고 탱크 부대를 잘게 쪼개 전선에 분산 배치한 반면, 독일은 탱크를 전략 무기로 보고 탱크를 한데 모아 독자적인 탱크 부대를 조직해 적의 전선을 신속하게 꿰뚫도록 했던 것.
이렇듯 군인의 머리에 든 사고방식과 개념, 그의 몸에 밴 가치체계와 관습이 전쟁의 진행과 결과에 중요하다면, 한국과 미국의 군대는 흡사한 무기 체계와 편제를 지녔지만 전투 방식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결론은 현대식 무기와 편제를 갖추고도 이스라엘군에 번번이 패한 이집트군이 1967년에 자국의 관습과 군사문화에 맞는 전략과 전술을 구사해서 10월 전쟁에서 처음으로 승리의 기쁨을 맛보았다는 린의 설명으로 더욱 분명해진다.
린이 맞다면, 대한민국 국군의 승리는 앞선 나라의 군사 교리를 그대로 따르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군인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면밀한 연구 대상으로 삼을 때 보장될 것이다. 야전 교범만큼이나 인문사회 서적이 우리나라 군인에게 필요할 듯싶다.
풍부한 지식을 동원해서 기술 못지않게 문화가 전쟁의 수행 방식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는 명제를 입증한 ‘배틀, 전쟁의 문화사’는 저자 존 린이 뛰어난 싸움꾼임을 보여준다. 그는 군사사 학계의 거목 빅터 핸슨에게 정면 공격을 가한다. 핸슨은 서구 문화권의 군대가 천하무적이 된 까닭은 속임수나 외교에 기대며 결전을 회피하는 습성을 가진 다른 문화권의 군대와 달리 죽음을 각오하고 정면 대결을 벌이는 전통에 익숙하기 때문인데, 이런 전통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시민군에 있다고 주장한다. 유럽이 오늘날 세계의 패권을 거머쥘 지배자가 될 운명이 수천년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니!
유럽중심주의와 정면 대결
필자는 이런 주장이 담긴 핸슨의 저서 ‘살육과 문명’을 읽다가 책장마다 배어 있는 지독한 유럽중심주의와 오리엔탈리즘에 시쳇말로 ‘짜증 제대로’ 받았던 적이 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에 쳐들어온 페르시아군을 마라톤 벌판에서 섬멸한 아테네의 중무장 밀집보병 부대와 아예 페르시아의 심장부로 들어가 제국을 점령한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군대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핸슨이 옳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던 기억이 난다. 그 ‘불안감’이 ‘배틀, 전쟁의 문화사’를 읽으면서 사라졌다.
린은 고대의 전쟁 수행 방식을 살펴본 뒤, 같은 아시아에 속하나 중국과 인도의 전투 방식이 꽤 달랐으며 정면 대결로 결전을 추구하는 전통이 중국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비유럽 문화권의 군대는 죄다 속임수와 외교에 치중해 결전을 피했다는 핸슨의 명제를 밑동부터 흔들어버린 셈이다. 매우 호전적인 클라우제비츠보다는 덜 살벌하고 섬세한 언어를 구사하는 손자(孫子)를 더 좋아한다는 린의 고백은 슬쩍 내비친 속내인데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유럽 중심주의와 맞싸우는 린은 근대 인도로 초점을 옮겨 영국에 고용된 인도인 용병 부대인 세포이가 발휘한 놀라운 전투력은 그들이 받은 영국식 훈련과 무기가 아니라 인도 고유의 가치관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며 통념에 도전한다.
하지만 독자는 1945년 8월에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미국의 결정은 황인종을 경멸하는 인종주의적 편견이 아니라 오로지 군사적 고려사항에 입각해 내려졌다는 린의 주장을 미국을 감싸안으려는 애국심의 발로가 아닐까 의심하며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