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이도 A급의 어려운 코스로 이뤄진 터키 안탈리아 골프장은 거의 모든 홀에 워터해저드가 있는데다, 조금만 빗나가면 공이 숲으로 떨어지고 깊은 벙커에서 허우적거리기 일쑤다. 하지만 국내 골프장에선 좀체 맛볼 수 없는 다이내믹함과 스릴이 짜릿한 긴장을 더한다.
우리와는 혈맹관계이기도 한 터키는 그동안 이렇다 할 교류가 없었지만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방문 이후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3·4위전을 치른 데다, 한국의 이을용이 터키 프로축구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어 친숙하게 느껴지는 나라다.
12시간에 걸친 비행 끝에 골프클럽을 메고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 내리니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공항을 아무리 둘러봐도 골프채를 운반하는 카트나 어깨에 골프클럽을 멘 관광객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세관원조차 의아한 눈길로 쳐다봤다.
현지 가이드로부터 터키 골프장 현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구 1000만이 넘는 국제도시 이스탄불에 골프장이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고위층과 대기업 임원, 무역업자 등을 제외하고는 골프를 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대신 세계적인 휴양도시인 안탈리아에 세계 명문급 코스가 10여 개 있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느긋하게 관광이나 하라”는 여행사 사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스탄불 시내에서 동서 방향으로 꾸불꾸불 휘어진 국도를 따라 2시간을 달려 산 계곡에 있는 클라시스(Klassis) 골프장에 도착했다. ‘골프 칼럼니스트’라는 명함을 내미니 특별할인을 해주어 미화 25달러를 내고 라운드를 시작했다.
키가 크고 미남인 남자 캐디는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하며 악수를 청했다. 필자의 손에서 근력을 느꼈던지 “핸디캡이 얼마냐”고 물어왔다. “핸디캡 6”이라고 말하자 “좋은 스코어를 기대한다”면서 1번 티로 안내했다.
이스탄불 유일의 골프장
티잉 그라운드에서 내려다본 코스는 산악 코스로 우리나라 계곡과 비슷했는데 플레이를 해보니 무척 어려웠다. 업 다운이 심하고 페어웨이가 보이지 않는 블라인드 홀이 대부분이며 그린도 작은 편이라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심한 내리막경사와 오르막경사가 교차하고 바람까지 심하게 불어 거리측정이 어렵다 보니 클럽 선택에 혼선이 와 그린에 못 미치거나 오버하기 일쑤였다.
퍼트도 제주도 그린처럼 브레이크를 읽기 어려웠고 잔디도 길어 투 퍼트로 마무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캐디가 친절하게 코스 공략법과 그린 주변 상황을 알려준 덕분에 라운드를 마칠 수 있었다. 이런 난코스에서는 반드시 스코어카드를 기재해야 한다. 그래야 그날의 경기내용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고, 이를 토대로 샷과 퍼트를 분석하며 반성의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스코어카드를 정리해보니 90타였다. OB 3개, 해저드 2개, 스리퍼트 4개로 평소보다 12타 이상을 더 친 셈이다. 필자의 시무룩한 표정을 읽은 캐디는 “이 코스는 매우 어려워 대부분의 골퍼들이 수모를 당하고 돌아가는 코스”라고 위로해줬다.
이곳 캐디나 종업원들은 대부분 한국어를 제법 구사할 줄 안다. 이용자 대부분이 한국 교민이거나 상사 주재원, 관광객이어서 업무상 필수적인데다 터키에서 방영되는 한국 드라마가 재미있어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기 때문이라고 했다. 캐디는 “한국 골퍼들은 대부분 골프광이라서 일몰 후 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라운드를 즐기고, 캐디들에게 선심도 잘 써 인기”라고 귀띔했다.
밀짚모자를 뒤집어놓은 형상의 벙커. 턱이 높고 러프가 심하다.
이튿날은 버스를 타고 광활한 평야를 가로질러 터키의 수도 앙카라를 거쳐 버섯바위와 지하 도시로 유명한 카파도키아와 온천지대로 널리 알려진 파묵칼레를 관광하고 지중해 최대 휴양도시인 안탈리아의 해안절벽에 있는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터키의 소아시아 반도 남서쪽 지중해를 바라보는 인구 60만의 소도시 안탈리아는 해양성 기후로 인해 유럽인들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겨울철에는 유럽 전역에서 매일 다섯 대 이상의 전세기가 관광객을 싣고 와 도시 전체가 유럽인 일색이 된다.
잔잔한 안탈리아 앞바다의 해안선을 따라 수백개의 세계 유명 호텔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보며 이 도시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호텔 발코니에서 내려다본 지중해는 파도도 없이 고요하다. 가끔 소형 유람선이 바다 위에 긴 꼬리 같은 흔적을 남기고 항해할 뿐이다.
낙하지점에 숨은 벙커
해가 뜨기 무섭게 터키 제일의 골프장인 안탈리아 골프장(Antalya Golf Club)으로 향했다.
소나무숲 속에 자리잡은 안탈리아 골프장에 도착해 150달러에 해당하는 그린피를 유로화로 지급했다. 터키는 요즘 유로화가 강세여서 달러 대신 유로화를 받고 있다고 한다. 클럽하우스의 모든 시설은 미국의 초일류호텔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고급스러웠으며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캐디를 배정받고 독일관광객 3명과 함께 라운드를 시작했다.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앳된 얼굴의 캐디는 프로골퍼 지망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는데 “한국으로 골프 유학을 가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언니들처럼 세계적인 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안탈리아 골프장은 총 36홀로서 술탄코스(Sultan Course) 18홀과 파샤코스(Pasha Course) 18홀이 있다. 파샤코스는 워터해저드가 비교적 적은 전장 5731m의 평탄한 코스이고, 술탄코스는 파72에 6411m의 긴 전장에 거의 모든 홀이 워터해저드로 중무장한 데다 페어웨이 양편엔 소나무숲이 이어져 있다. 2003년에 데이비드 존스가 설계한 난이도 A급 코스로 해마다 9월에 터키 오픈이 열린다.
술탄코스는 첫 홀에서 넓은 녹색 평원 위에 펄럭이는 깃발만 보면 쉬운 코스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얕보았다가는 큰코다친다. 이렇게 난도가 높은 코스에서는 드라이버 대신 3번 우드로 티샷을 하는 것이 좋다. 거리를 내려고 힘을 주면 공은 슬라이스나 훅이 나 숲 쪽으로 가고, 이렇게 되면 장애물에 가려 그린을 직접 공략할 수 없기 때문이다.
219m 파3인 6번 홀 또한 그린 주변이 소나무숲인데다 연못이 있어 조금만 빗나가면 스리온도 어려워진다. 처음부터 150m 지점에 레이 업 티샷을 하고 거기에서 숏 어프로치를 하는 것이 좋다. 한국에서처럼 매홀 레귤레이션 온을 시도하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다. 420m인 4번 홀, 393m인 15번 홀, 404m인 18번 홀은 아마추어 골퍼들은 투온은커녕 스리온 하기도 어려운 긴 코스다.
술탄코스의 하이라이트는 433m 파5의 12번 홀이다. 세컨드 샷 낙하지점에 보이지 않게 모자 벙커가 설치되어 있어 공이 이곳에 떨어지면 곤욕을 치러야 한다. 밀짚모자를 뒤집어놓은 형상의 이 벙커는 턱이 높고 러프가 심해 로프트가 큰 피칭이나 샌드웨지 클럽으로 공을 정확하게 타격해 페어웨이로 올려놓지 않으면 3∼4타 추가는 다반사다.
터키 최대 회교사원인 블루모스크. 터키는 인구의 98%가 회교도다.
해안에서만 서식하는 특유의 버뮤다 잔디로 인해 아이언 샷도 어려웠지만 잔디에 딱 붙은 공을 3, 4번 페어웨이 우드로 치기는 정말 어려웠다. 어프로치 샷은 토핑이 나거나 뒤땅을 치기 일쑤였다. 또한 그린 주위 러프에 파묻힌 공은 거리 맞추기 칩샷보다는 안전하게 탈출해 그린 온 시키는 게 상책이었다.
코란 독경 소리에 마음 가다듬고
이처럼 술탄코스는 클럽하우스에서 코스 전체를 내려다볼 때와는 판이하다. 습지와 워터해저드, 보이지 않는 작은 언듀레이션과 경사도가 살아 숨쉬는, 절묘하게 설계된 코스였다.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18홀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지만 성적은 역시 좋지 않았다. 캐디는 “나는 매일 1000개 이상의 공을 치고 2시간씩 퍼트 연습을 해도 공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데, 주말 골퍼가 그만하면 잘 치는 것”이라고 격려했다. 한술 더 떠 “자세는 엉성한데 공이 똑바로 나가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고도 했다.
터키에서의 골프는 혹독한 경험이었다. 그나마 위로가 된 것이 있다면 오후 5시에 인근 회교사원에서 흘러나오는 코란 독경 소리, 저녁노을 빛을 머금은 코스 주변의 무슬림식 건물들, 그리고 이 지방에서만 서식한다는 화관조가 떼를 지어 녹색 잔디 위를 날아다니는 목가적 풍경의 아름다움이었다. 또한 비록 스코어는 좋지 않았지만 대신 우리나라에서는 맛볼 수 없는 다이내믹함과 스릴이 있어 흥미로웠다.
여행사 사장의 충고대로 터키의 역사 여행이나 할 걸 하는 후회도 했지만 그래도 이역에서의 실패 체험이 골프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고 위로해본다. 한국에서만 우쭐대던 우물 안의 개구리가 터키 신천지 골프장에서 세상은 넓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인식하는 좋은 기회였다. ‘항상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마호메트의 말은 인간사나 골프에서나 통용되는 진리인 것을 다시 한 번 가슴속 깊이 새기게 되었다.
안탈리아의 밤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이 빛나고 있었다. 저 별들의 별자리가 먼 옛날 실크로드 낙타상인들과 군인들의 나침반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