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15일, 박석안 전 서울시 주택국장이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의 양재동 사옥 증축 인허가 문제로 검찰조사를 받던 중 자살했다. 이날 오전 그는 여섯 번째 참고인 조사를 받을 예정이었다. 전날 박 전 국장과 함께 술자리를 가진 그의 절친한 후배 K씨가, 검찰조사 과정에 대해 박 전 국장이 장시간 털어놓은 이야기와 내비친 심경을 담은 글을 ‘신동아’에 보내왔다. 박 전 국장의 자녀들은 “‘K삼촌’은 유족의 뜻을 대표해 이 글을 쓴 것”이라며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담았다”고 밝혔다.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하기 위해, 원고 말미에는 이에 대한 대검찰청 관계자의 공식 반론도 정리해 소개한다.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와 고인이 남긴 유서.
발견된 유서는 전날인 5월14일 새벽에 가족 몰래 써서 서랍에 넣어둔 것이었다. 새벽 5시30분에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청계산 만경대로 가는 길을 물었고, 8시30분쯤에는 가까운 이 두세 사람과 통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아침 9시, 만경대 바위 꼭대기에 앉아 고민했다고 했다.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까, 깔끔하게 죽으면 다행이지만 불구의 몸으로 살아남으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는 것이었다.
그 시각, 이상한 예감이 든 부인이 남편의 후배들에게 “어디 있는지 찾아봐달라”고 부탁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청계산에 가셨다는 걸 알고 부리나케 달려가면서 계속 전화를 해댔다. 뛰어내릴까 말까를 세 시간 동안 고민하던 박 국장은 한참이나 문자 메시지를 날린 10시30분이 되어서야 겨우 전화를 받았다. 내려가자고, 가서 소주나 한잔 하면서 훌훌 털어버리자고 겨우 설득해서 내려온 것은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그는 만경대 바위 위에서 “그동안 고마웠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내내 울었다”고 했다. 청계산장에서 소주를 마시는 내내, 오후에 자리를 옮겨 반포의 조그마한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는 내내, 그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정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생하며 자라온 지난날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러고는 거듭해서 검찰청에서 당한 모욕에 분노하며 치를 떨었다. 탁자를 치며 분통을 터뜨리던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집에 가겠다고 재촉하는 박 국장을 집까지 모셔다가 부인에게 부탁하고 돌아선 것이 오후 6시였다. 찜찜한 기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푹 자고 나서 다음날 아침 조사받으러 가시겠거니 생각했다. 나중에 부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족은 이미 낮에 서랍 속에 들어 있던 유언장을 발견해 읽은 터였다. 아들은 “가족들은 아버지의 결백을 알고 있으니 절대로 다른 마음 먹지 말라”고 울면서 간청했다. 술을 꽤 많이 마신 박 국장은 7시쯤 이내 잠이 들었다가 새벽 1시쯤에 깨어났던 모양이다. 13층 아파트의 베란다에 서서 동이 틀 때까지 줄담배를 피우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혹시나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할까 싶어 같이 뜬눈으로 밤을 새운 부인에게, 박 국장은 “잘 다녀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새벽 5시에 샤워를 하고 유난히도 공들여 머리를 말리고는, 6시30분쯤 출근했다가 검찰로 가겠다고 가족들을 안심시켰다는 것이다. 예정돼 있던 대검찰청 출두시각은 9시30분이었다. 그 전에 은퇴 후 소일 삼아 나가던 사무실에 들러 서류를 챙긴 후 가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는 사무실로 가지 않았다.
그가 간 곳은 경기도 광주 퇴촌에 있는 모친의 산소였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지만, 묘소에 공들여 절을 올린 그는 근처에 있는 광통교 다리 위에 차를 세운 후 혼자서 난간에 올라섰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강물로 뛰어내렸을 것이다. 오전 10시, 대검찰청에 나가 앉아 있어야 했을 그 시각에, 팔당호 기슭으로 떠내려온 그의 시신이 발견됐다. 천추의 한이 된 문제의 검정색 뉴그랜저 승용차는 광통교 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
‘진술번복’의 실체
박석안 국장이 왜 검찰의 조사를 받았는지는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 자세히 알려진 그대로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의 양재동 사옥 증축결정이 나던 2004년 봄 당시 서울시 주택국장이던 그는, 인허가 과정에서 이 회사로부터 특혜나 뇌물을 받은 것이 있는지를 조사받기 위해 검찰에 소환됐다. 수사를 담당한 곳이 바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였다.
후에 검찰에서도 언론에 이야기했지만, 그는 이 사건의 주요 피의자가 아닌 참고인이었고 뚜렷한 근거나 물증, 혐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가 지난해 산 자동차가 현대차에서 나온 뉴그랜저이고, 공식시가에 비해 700여만원 싸게 샀다는 것이 유일한 화근이었다. 그 때문에 검찰조사를 다섯 차례 받았다. 그 가운데 두 차례는 장시간에 걸친 강도높은 조사였다. 5월11일과 12일이었다.
뒤에 검찰은 박 국장의 진술이 바뀌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조사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차를 산 자금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따져 묻는 수사관들에게, 박 국장이 첫날에는 “예금계좌에서 인출해서 샀다”고 했다가 두 번째 조사에서는 “처남에게 빌렸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처남은 “돈을 빌려준 것이 아니라 차를 사준 것”이라고 했다더라는 게 ‘진술번복’의 내용이다.
애초에 박 국장은 그 차를 정기적금을 깨서 사려고 했다고 가족들은 설명한다. 실제로 적금을 깨려고 준비했는데, 처남이 “매형 퇴직선물로 제가 사드리겠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저러한 사정으로 검찰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말이 엉킨 것뿐이었다. 게다가 차를 산 시점은 이미 현대차 사옥 증축 허가결정이 난 지 1년도 더 된 후였고, 고인의 퇴직이 코앞으로 닥친 때였다.
그러나 검찰은 이 문제를 가지고 그를 다섯 차례 소환했다. 고인은 죽기 전에 자기가 얼마나 심한 모욕을 당했는지 말하며 몇 차례에 걸쳐 울분을 토했다. 삿대질과 막말은 기본이었다고 했다. 자술서의 친필을 보고는 ‘그 머리로 어떻게 부이사관이 됐느냐’ ‘글씨가 왜 이렇게 졸필이냐, 그런 글씨로 어떻게 대학을 나오고 주택국장 같은 자리까지 올랐느냐’ ‘인사청탁이나 빽으로 진급한 것 아니냐’….
인간적인 모욕도 모욕이지만, 정말 고인이 힘들어한 것은 수사과정에서 수사관들이 했던 말도 안 되는 폭언이었다. ‘구속시켜 처남과 한방에 넣어주겠다’느니 ‘두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느니 하는 말들이었다. 고인은 “나와 처남을 어떻게든 엮어서 수갑 채운 장면을 TV에 내보내고 싶어하는 것”이라며 담당수사관 ○○○과 △△△가 정말 두렵다고 했다. 목요일과 금요일에 연달아 아침부터 밤까지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나왔음에도 주말을 지나 바로 월요일 아침 9시30분까지 출두하라는 말이 그렇게 끔찍하고 고통스럽다는 이야기였다.
“두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
고인의 처남은 공대 교수다. 몇 년 전 위암으로 수술을 받아서 지금도 몸이 아주 가냘프다. 누가 봐도 건강이 좋은 상태가 아님을 한눈에 알 정도다. 처남도 검찰에 불려가 ‘매형의 차 값을 대신 내준 이유가 무엇인지’ 강도 높은 추궁을 당했다. 조사를 받은 처남은 집에 오자마자 실신하고 말았다. 오죽하면 고인의 부인이 “그 사람이 죽지 않았으면 동생이 죽을 판이었다”고 했을까. 고인은 “왜 네가 이런 고생을 당해야 하느냐. 차라리 내가 죽고 말겠다”며 처남과 실랑이를 벌였다.
혹자는 ‘아무리 심한 말을 들었기로서니 자살을 한단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인은 평생토록 우직하게 공무원 생활만 한 사람이다. 험한 말, 거친 대접에는 전혀 면역이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제까지 건설관련 공무원들이 수뢰혐의로 수갑을 찬 채 TV화면에 비친 장면을 여러 차례 보았다. 그중에는 결국 무죄가 선고된 이도 적지 않았지만, 한번 그렇게 망신을 당하면 판결과는 상관없이 인생과 가정이 망가지는 것도 보았다. 자기가 아무리 떳떳하다 한들, 수사 과정에서 혐의가 언론에 공개되고 손가락질을 받는 순간 끝 아니냐는 것이었다. 죽기 전날, 술에 취한 그가 울먹이며 말한 것이 바로 그런 내용이었다. 2004년 자살한 안상영 전 부산시장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는 것이었다.
“못 배길까봐 두렵고 무섭다”
“못 배길까봐 두렵고 무섭다….”
만경대 바위에서 내려온 그가 넋두리처럼 했던 말이다. 검찰이 사건을 어떻게 만들어갈지 알 수가 없어 두렵다는 것이었다. 자기가 잘못한 게 있어 못 배길까 걱정스럽다는 게 아니라, 한마디라도 잘못 말한 것이 이용당해 다른 누군가에게 불똥이 튈까 무섭다는 것이었다. “적금 깨서 샀다”는 한마디에 처남까지 줄줄이 끌려들어온 판이었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 고통스럽다는 것이었다. 유서에서 그가 ‘변호사가 아무리 유능하고 사법부가 공정하다 해도 대검 중수부를 이길 수가 없을 것 같다’고 쓴 것은 그런 이유였다.
검찰은 이미 고인과 주변의 계좌와 금융거래, 재산명세를 샅샅이 훑어본 뒤였다. 그나마 의심스러운 부분이 그랜저 승용차 딱 하나였다. 사실상 아무것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본인은 물론이고 처남까지 검찰에 불려 들어왔을뿐더러, 처남의 업무상 거래계좌까지 추적하고 추궁해가는 지경이었다.
게다가 비록 익명으로 처리했다지만, 그 모든 내용은 실시간으로 언론에 흘러나가 활자화됐다.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처남과 매형이 엄청난 비리를 저지른 것으로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상황에서 ‘구속시켜 처남과 한방에 넣어주겠다’ ‘두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말이, 혈기 왕성한 두 젊은 수사관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평생을 샌님처럼 살아온, 예순두 살의 은퇴한 공무원에게 얼마나 공포스러웠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내가 고인을 처음 만난 것은 1983년 봄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서울 연희동에서 한 중소기업 사옥을 설계하고 감리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공사현장에 민원이 생겨 불려간 곳이 서대문구 건축과였고, 당시 건축과장이 바로 고인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서대문구 건축과장은 그가 사무관에 진급한 후 처음 발령받은 자리였다.
그는 나를 세워놓고 한 시간이나 무섭게 호통을 쳤다. 공사현장의 난잡함과 안일한 공사관리로 부근 주민들이 갖가지 피해를 보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감리자를 행정조치할 수밖에 없다는 꾸중도 들었다. 이후 나는 3개월 동안 현장에 상주하면서 민원피해를 보수했다. 준공검사 신청을 하자 고인은 직접 현장에 나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참 고생 많았다. 앞으로도 꼼꼼한 업무 당부 드린다”고 했다. 그게 첫 인연이었고, 그 후로 20여 년을 형제처럼 지냈다.
그의 꼼꼼한 일처리는 정평이 나 있었다. 이후 양천구 건축과장, 건설안전본부 건축지도과 건축계획계장을 거쳐 서기관으로 진급한 후에는 성북구청 도시정비국장, 강남구청 도시관리국장, 건설안전본부 건축부장, 서울시 건축지도과장을 지냈다. 모두 서울이 급속도로 재정비되던 1980~90년대의 일이었고, 무수히 많은 건축사업이 그의 손을 거쳤다.
서울에서도 유난히 불량주택 재개발이 많았던 성북구청 도시정비국장으로 일하던 무렵에는,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재개발 민원에 대해 일일이 현장을 직접 찾아가 민원인들을 면담하곤 했다. 강남구청 도시관리국장으로 일할 무렵에는 삼성동 현대아이파크와 도곡동 삼성타워팰리스 같은 초대형 사업으로 발생한 주변 주민들의 민원을 직접 처리했다. 그 과정에서 민원인들에 의해 창고에 세 시간이나 감금당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깨끗이 해결하고 준공처리를 해낸 주인공이었다. 동(棟)간 간격이 답답하고 비좁은 옛날식 판상형 아파트 대신, 건폐율을 낮추고 층고를 올려 지상공간의 개방감과 조경을 확보한 요즘의 아파트 건축 흐름은 상당부분 그의 공이다.
건축관련 업무가 까다롭고 잡음이 생기기 쉬운 분야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엄청난 자본과 시간, 노력이 투입되는 만큼 서울의 주요 건축사업과 관련해서는 크고 작은 의혹과 사건들이 터져 나오기 일쑤다. 그러나 그는 맡은 모든 일을 깔끔하게 처리했고, 건축직 공무원의 꽃이라는 서울시 주택국장이 됐다. 고시를 보지 않은 건축과 7급 출신의 고인이 조금이라도 원칙에 어긋나는 일에 손을 댔다면 그 자리까지 이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주택국장으로 정년을 맞이한 최초의 서울시 직원이었다.
서울시장과 내무장관, 국무총리,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그는 실력 있는 공무원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상이 전혀 아깝지 않은 공직자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이 바로 그의 동료들이었다. 장례를 치르던 사흘 내내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상가에 들러 밤을 새운 서울시 공무원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미 은퇴한, 게다가 세상을 떠난 이의 빈소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조문객이 많았다. 간부들 중 누구 하나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전임국장 한 사람은 장례식장에서 분을 주체 못해 폭음을 하고 화장실에서 벽을 주먹으로 치며 “왜 그걸 못 견디고 죽느냐”고 울부짖었다.
5월17일, 영구차는 그가 일했던 서울시청 앞에 들러 노제(路祭)를 지냈다. 서울시 공무원 300여 명이 나와서 떠나는 그를 배웅했다. 이날 서울시 직장협의회는 “정치논리와 권력의 칼이 약한 자를 위협하며 양심의 자유를 침탈하는 오늘 선배님은 이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 남은 생애의 부와 지위와 명예, 그리고 목숨까지 지불했다”는 고별사를 낭독했다.
“안 했다고만 하면 안 한 것인가”
박 국장이 세상을 뜬 이튿날, TV를 틀었더니 ‘검찰, “강압수사 없었다”’는 뉴스 자막이 흘러간다. 중수부 고위관계자가 기자들에게 “수사1과 사무실에서 조사했으므로 폭언이나 강압수사를 할 형편이 아니었다”고 말했다고 했다. 유서에 왜 그렇게 썼는지 알 수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인격모독을 안 했다는데, 누가 했다고 하면 우리가 한 것이냐”고 말했다는 기사도 보았다. 그렇다면 뒤집어서, 고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압박을 느꼈다는데 수사관들이 안 했다고 하면 그냥 안 한 것인가. 왜 제대로 된 감찰이나 진상조사는 할 생각도 하지 않고, 하루 만에 “자체조사를 다 했다”며 “그런 일 없다”고만 말하는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고인이 선임했던 변호사도 마찬가지다. “고인에게서 검찰에서 폭언을 듣거나 위협을 받았다는 얘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며 “그런 얘기를 들었다면 내가 가만히 있었겠느냐”고 이야기한 것을 언론을 통해 들었다. 법무부 고위공무원 출신인 변호사는 적지 않은 수임료를 받았지만 실제 검찰 조사과정에선 단 한 번도 고인과 동행한 적이 없다.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그것도 변호사라는 사람이 그렇듯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고인은 죽기 전날에도 이렇게 말했다.
“그 양반이 명색이 검찰의 대선배인데, 내가 이렇게 위협을 느낀다고 이야기하면 어떻게 하겠나. 검찰에 가서 잘 달래가며 이야기하면 다행이지만, 십중팔구는 검찰총장이나 부장에게 바로 전화를 걸 게 분명하다. 그렇게 위에서 말이 내려오면 말단에서는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고, 오히려 더 엉뚱한 방향으로 두 배 세 배 괴롭힘을 당하지 않겠나.”
그 때문에 고인은 차라리 자신의 후배들에게 일선 검사 중에 아는 사람이 없는지 묻고 다녔다고 한다. 변호사가 고인에게 충분히 신뢰를 주었다면 그런 상황이 생겼을 리 없지 않은가.
검찰과 싸우려는 게 아니다. 백번을 양보해, 원래 수사란 그런 식으로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비전문가인 내가 생각하기에도 육하원칙에 의해서 차근차근 정황과 단서를 캐 들어가는 것이 옳은 것 아닌가 싶은 것이다. 고인은 ‘피의자’가 아니라 ‘참고인’일 뿐이었다. 왜 본인도 아니고 처남이 용역을 받은 걸 가지고 그걸 의뢰한 사람까지 다 추적하고 불필요한 사람까지 소환해대는가. 무고한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소리 없이 뒤져보다가 결정적인 단서가 나오면 ‘이 돈이 이렇게 흘러 들어갔지 않느냐’고 근거를 들이대며 냉정히 추궁하면 되는 것 아닌가.
‘우리는 바쁘다, 빨리 인정해라, 빨리 윗선을 대라’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과연 수사인가. 그런 식의 모욕만 주지 않았다면 사람이 투신하는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 고인은 술자리에서 몇 차례나 두 수사관의 이름을 들먹이며 치를 떨고, 눈물을 흘렸다. 고인의 지인들을 통해 서울시 공무원 전체가 그들의 이름을 알 정도다. 단지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나서서 소리 높여 말하지 못할 뿐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말을 믿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폭행, 폭언, 강압은 없었다고, 공개된 사무실에서 조사를 했는데 무슨 강압수사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주먹질, 발길질을 한 적이 없고 고문을 한 것도 아니며 잠 안 재워가며 밤샘수사를 한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냐고 확신할지도 모르겠다.
장례식장도 찾지 않는 ‘무신경’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그들의 이러한 ‘무신경’이다. 자신의 말 한마디가, “협조하지 않으면…”으로 시작하는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대검 중수부’라는 위세에 위압감을 느끼는 평범한 시민에게 얼마나 큰 압박으로 다가오는지 이해할 생각조차 없는 그들의 무신경 말이다. 수사편의와 빠른 진행을 위해서라면 무고한 사람인지 아닌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일단 을러대고 보는 그 무신경 말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고인의 장례식장에 검찰 관계자는 단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 흔한 화환 하나 보낸 것이 없다. 어찌 됐건 사람이 죽었는데, “당신들 때문”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존경받던 공무원이 자살했는데, 사과는커녕 아무도 찾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들의 그 무신경이 나는 가장 끔찍스럽다.
고인을 화장한 벽제의 서울시립 승화원은 바로 그가 건설안전본부에서 근무할 때 건립을 주관했던 건물이다. 예산 문제로 화장건물에서 냉방시설이 빠져 있자 “유족들을 생각해야 한다”며 끈기 있게 건의해 결국 냉방시설을 추가했던 사람도 그다. 정년을 마치고 여생을 평화롭게 생활할 꿈에 부풀어 있던 그로서는 이렇게 빨리 이곳에 오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승화원에서 돌아가는 에어컨을 보는 순간 나는 밀려오는 허무함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그 허무함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인데, 밉보여 좋을 것 없지 않느냐”며 만류하는 주변 사람들을 뿌리치고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런 글 하나로 검찰이 바뀌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일 것이다. 그저 그를 못내 그리워하는 한 사람으로서 고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리는 것만으로 족할 듯하다. 안상영, 남상국, 정몽헌, 박태영, 그리고 박석안. 검찰이 조금이라도 바뀔 여지가 있었다면, 이 사람들이 이렇듯 줄줄이 세상을 등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인의 죽음이 너무나, 정말 너무나도 아깝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는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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