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병구 교수는 ‘인공장기에 미친 사람’으로 불린다. 1984년 기계식 인공심장 프로젝트를 맡은 이래 다양한 인공장기를 개발하며 세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자기 돈은 물론 친가와 처가 재산까지 인공장기 발에 털어넣은 일화는 이미 ‘신화’가 된 지 오래. 하지만 세계적 지명도를 가진 그에게 국내 언론은 무심했다. 늘 황우석 박사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인공장기는 바이오 장기와 기계식 장기로 나뉘는데, 한국의 기계식 인공장기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꼽힌다. 많은 인재가 연구에 매진하고 있고 임상 적용이나 정부의 지원도 활발하게 이뤄지는 편이다. 이들은 황 박사를 비롯, 인간배아 줄기세포를 위시한 일련의 바이오 인공장기 연구자들이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도 앞에 나서지 않고 묵묵히 연구실을 지켜왔다.
국내 기계식 인공장기 분야의 1인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연구자들은 주저 없이 서울대 의대 의공학교실 민병구(閔丙九·64) 교수를 꼽는다. 민 박사는 국내 최초로 인공신장과 인공심장을 개발해 의공학도 사이에선 ‘인공장기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인공장기 개발 연혁(표 참조)을 살펴보면 ‘한국에도 이런 과학자가 있나’ 하는 탄성이 흘러나온다. 그는 황우석 박사와 함께 정부로부터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지정됐지만, 그의 이름은 좀체 신문 지면을 장식하지 못했다.
의대 교수가 된 기계공학도
5월2일, 민 교수를 만나기 위해 철쭉꽃이 한창인 서울대 병원을 찾았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말하는 게 쑥스럽다며 한사코 만남을 사양했던 터라 깐깐한 선비의 이미지를 상상했지만, 연구실로 들어서니 초롱초롱한 눈매의 노교수가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따뜻한 녹차를 권하면서 “평생 연구실에서만 지낸 내 얘기가 뭐 재미있다고…” 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의공학을 처음 접한 것은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후 2년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1968년 미국 유학을 갔을 때였죠. 전공분야를 정하려 하는데, 당시 미국에선 의공학 연구가 막 시작되던 참이었어요.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욕심에 의공학을 택했는데 이렇게 미쳐버릴 줄은 몰랐죠.”
미국 럿거스 대학 의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민 교수는 뉴욕의 마운트사이나 의대 병원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미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한 병원. 2년간의 연구원 생활을 마친 그는 모교인 럿거스 대학에서 러브콜을 받고 조교수를 맡아 연구를 이어갔다. 그러던 1979년, 미국생활을 급거 정리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그해 서울대 의대는 선진 의료장비들을 들여와 국내 의료 수준을 한 단계 높이려 시도했다. 그런데 어렵게 도입한 최신 의료장비들을 조직적으로 연구, 관리할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더욱이 국내 최초로 의대 안에 의공학과를 설치했는데, 당장 교수직을 맡을 사람을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수소문한 끝에 민 교수를 찾아내 그에게 SOS를 요청했다. 민 교수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조국의 부름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시 쓰는 과학자
그가 미국에서 시작한 인공심장 연구는 한국에서도 계속됐다. 의공학과 주임교수직과 인공심장 개발자 노릇을 겸하기가 만만치 않았지만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1984년 본격적으로 ‘한국형 완전 인공심장 프로젝트’에 돌입한 그는 3년 만에 한국형 완전 인공심장을 완성해 미국 특허를 받았다. 이후 그는 국제적으로도 시선이 집중된 연구 성과들을 부지런히 발표한다. 연일 휘파람을 불며 승전고를 울리던 나날이었다.
민 교수의 얘기를 듣던 중 그의 책상 위 진한 흑색 표지의 두꺼운 전공 서적들 사이에 있는 ‘수상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크림색 표지에 단아한 글씨체로 씌인 민 교수의 시집이었다. 제목은 ‘안개 속의 화살’. 필자가 “언제 시를 다 쓰셨느냐”며 놀라워하자 “연구 과정에서 겪는 갈등과 좌절을 일기처럼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간 것인데, 제자들이 강권하는 바람에 책으로 내게 됐다”며 무안해했다. 시집은 2002년 그의 환갑을 기념해 출간됐다.
‘인공심장 달다 / 피를 다 토하고 죽은 어미 양 / 그 뱃속에서 불현듯 나타난 아기 양 / …… / 수많은 칼질도 참아내고 / 끝까지 버티던 그 모습 / 몸속의 피는 다 빠져나가면서도 / 아기 양에게 온전한 피를 끝까지 보내었구나 / 바깥 구경 한번 못하고 / 허연 살과 뼈만 남은 / 어미 뱃속에 다시 휘감겨 / 되돌아 가는구나’ (‘아기 양의 죽음’ 중)
민 교수는 1994년 세계 최초로 ‘완전 인공심장’을 양에 이식하는 쾌거를 이룩했지만, 그 한 건의 성공을 위해 10여 년 동안 숱한 동물이 죽어 나갔다. 그는 생명에 대한 연민과 인간적 갈등을 그냥 마음에 담아두지 못했다. 그래서 써내려간 시는 그런 연민과 갈등의 씻김굿이었다.
이후 인공심장은 수차례의 동물실험을 통해 만족할 만한 성과를 냈다. 그러나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인공심장 연구가 본격화한 것은 2001년이다. 그는 그해 체내 이식형 양(兩)심실 보조 인공심장인 ‘애니하트’의 체내 이식에 성공했다. 세계 최초의 일이었다.
최초로 애니하트를 이식받은 사람은 말기 심부전 환자 홍모(48)씨로, 이식을 받은 후 12일간 생존했다. 집도한 의사는 고려대 흉부외과 선경 교수. 그전까지 환자에게 이식된 인공심장은 심장의 좌심실 기능만 대체했지만, 애니하트는 세계 최초로 좌우심실 기능을 모두 대체할 수 있는 인공심장이었다. 이 수술의 성공으로 민 교수의 연구는 다시 한 번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외국서만 알아주는 한국형 인공심장
환자의 심장을 떼어낸 후 인공심장을 이식하던 기존의 방법과는 달리, 애니하트는 환자의 심장을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이식됐다. 수술 후 원래의 심장이 건강해지면 인공심장을 제거하고 자기 심장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 자기 심장을 완전히 제거한 후 인공심장을 이식하면 기계 고장으로 인공심장이 정지할 경우 곧장 사망할 우려가 있었다. 반면 애니하트는 설사 기계가 멈추더라도 환자가 자신의 심장으로 4∼5주 동안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안전성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한 셈이다.
“두 개의 심장을 가슴속에 담겠다고 결단을 내려준 환자의 용기 덕분이었습니다. 세상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연구를 그분 때문에 할 수 있었죠. 인공심장 이식 후 환자의 혈류량도 증가하고 그에 따라 심장, 폐, 신장 등도 서서히 좋아졌지만, 결국 고질이던 간이 기능을 잃어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이 기회에 그분과 가족에게 새삼 감사를 드립니다.”
2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100여 명의 연구원이 밤낮없이 매달리던 연구가 막 열매를 맺으려는 순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터진 것이다. 그러나 환자의 사망원인은 심장 질환이 아니라 간 질환이었기에 민 교수는 오히려 앞으로 더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심장 이외의 장기가 건강한 환자에게 애니하트를 이식하면 생존 일수를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수술이 끝난 직후 말도 잘 못하는 환자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닙니까.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다시 찾은 생명의 날, 왜 하필 그런 노래를 불렀을까요? 끝까지 삶을 포기하기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같기도 하고….”
그러나 일각에선 다른 면에 초점을 맞췄다. 인공심장을 이식받은 환자가 12일 만에 사망한 것에 대해 여기저기서 회의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후 한국형 인공심장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안전성이 검증된 분리형 인공심장을 두고 인체에 적용된 사례가 없는 일체형 인공심장을 굳이 이식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1984 | 한국형 완전 인공심장 프로젝트 시작 |
1987 | 한국형 완전 인공심장 미국 특허(9068449) |
1991 | 한국형 체외형 좌심실 보조장치 프로젝트 시작 |
1994 | 세계 최초 완전 인공심장 양(羊) 이식 성공 |
1996 | 한국 최초 체외형 좌심실 보조장치 임상적용(서울대 병원) |
1997 | 미국 Cleveland Clinical Foundation과 공동연구 시작 |
1999 | 한국형 완전 인공심장 동물실험 장기생존 기록 (7일, Cleveland Clinical Foundation) |
1999 | 고려대 병원, 제주대 병원과 공동연구 시작 |
2000 | 한국 두 번째 체외형 좌심실 보조장치 임상적용(고려대 병원) |
2001 | 세계 최초 이식형 양(兩)심실 보조장치 임상적용(고려대 병원) |
2001 | 이식형 양심실 보조장치 동물실험 장기생존 기록(35일, 고려대 병원) |
2001 | 뉴하트바이오 주식회사(www.newheartbio.com) 설립 |
2003 | 세계 최초 박동성 심폐보조기 임상적용(중국 상하이 창하이병원) |
2003 | 세계 최초 박동성 심폐보조기 국내 임상적용 (순천향대 부천병원, 고려대 안암병원) |
2005 | 한국 박동성 심폐보조기 해외 임상적용 (중국 상하이 창하이병원, 베이징 안전병원) |
2005 | 한국 박동성 인공심폐기 관련 논문 해외 유명 학회지에 발표 (네덜란드 마스트릭트 대학병원) |
2006 | 의료기기 최고가로 중국 수출 시작(대당 5만달러) 400명의 한국, 중국 환자에게 박동성 인공심폐기 적용수술 성공 30명의 응급환자에게 박동성 인공심폐기 적용, 12명 소생(서울대 병원, 순천향대 병원, 고려대 병원, 영남대 병원, 경북대 병원, 세종병원 등) |
오히려 외국에서 제대로 된 평가가 나왔다. 하버드 대학은 학내 저널을 통해 한국형 인공심장을 미국의 그것과 비교한 뒤 한국형에 더 높은 점수를 주기도 했다. 한국형은 자기 심장을 그대로 살려두기 때문에 자기 심장의 치료 가능성을 남겨둔다는 이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내의 반응은 여전히 냉랭하기만 했다.
이런 논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연구에 매진한 민 교수는 인체이식 성공 3년 후인 2004년, 세계 최초의 체외 박동형 인공심폐기 ‘T-PLS’를 개발했다. 이번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청으로부터 정식 의료기기 허가를 받는 것이 문제였다. 허가를 받아야 각 병원 응급실에서 인공장기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고려대 안암병원과 순천향대 부천병원이 임상실험에 나서줬다. 이에 따라 40명의 심장마비 환자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임상실험이 실시됐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임상실험을 통해 T-PLS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확인한 식약청은 정식 허가를 내주기도 전인 2004년 2월, 응급의료센터로 지정된 종합병원 응급실과 구급차에서 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전례 없는 조치였다.
T-PLS는 다리를 통해 연결할 수 있기 때문에 1분 1초를 다투는 응급상황에 신속하게 사용할 수 있고, 심폐의 박동을 그대로 유지해주기에 심장과 폐가 전혀 제 기능을 못해도 다른 기관이나 생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게 장점. T-PLS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병원 중 하나인 순천향대 부천병원은 T-PLS 도입 이후 응급실 환자 생존율이 3%에서 40% 이상으로 올라갔다. T-PLS가 없었다면 죽었을 사람들이 소생한 것이다.
T-PLS의 이런 장점들이 논문을 통해 알려졌지만 국내에선 체외 박동형 인공심폐기가 그리 널리 쓰이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건강보험이 적용돼 환자의 본인부담금이 25만원으로 크게 줄었으나 현재 이 장비를 갖춘 곳은 서울대 병원, 영남대 병원, 경북대 병원, 순천향대 부천병원, 부천 세종병원 등 전국에서 15개 종합병원뿐이다.
T-PLS는 응급실 환자 외에도 다양한 환자들에게 활용되고 있다. 순천향대 부천병원 원용순 교수는 바이러스성 심근염(심장근육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질환)에 걸려 심장이 멈춰버린 환자에게 T-PLS를 적용해 목숨을 구해낸 일도 있다. 바이러스성 심근염은 항바이러스제제만 제대로 쓰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질환. 하지만 바이러스가 죽고 나서 심근염이 완치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문제였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부위인 심장이 멈춰버리면 ‘백약이 무효’이기 때문. 의료진은 이 환자에게 T-PLS를 연결해 심장기능을 보조하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항바이러스 치료제를 투여함으로써 죽어가던 심장을 열흘 만에 살려낼 수 있었다. 영남대 병원에서도 폐렴 악화로 폐 기능이 멈춘 소아환자에게 이 방식을 사용, 폐 기능을 유지하면서 폐렴을 완치시킨 사례가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국내 병원들이 이 기계를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실제 임상에서 예상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민 교수에게 물어봤다. 그에게서 돌아온 답변은 단호하다 못해 분에 차 있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조류 인플루엔자 치료 가능성
그는 T-PLS 사업화를 맡은 ㈜뉴하트바이오를 통해 중국의 심장전문 병원에 이미 여러 대를 수출했다는 사실을 그 증거로 들었다. 중국의 심장수술 횟수는 연 6만건으로 우리보다 5배가량 많고, 의료진 대부분이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엘리트 의사들로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더구나 중국 정부는 외국 의료장비에 허가를 내주는 데 매우 신중하다. 이런 장벽을 넘어서 수출이 시작됐고, 사용 결과 좋은 반응을 얻어 주문이 늘고 있다는 것. 그는 “유럽의 병원들에서도 임상시험을 해보고 싶다는 문의가 빗발치는데, 유독 국내 의료진만 국산 장비에 대한 선입관 때문에 마음을 열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민 교수는 T-PLS가 온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AI(조류 인플루엔자) 치료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AI 환자의 대부분은 폐에 염증이 생겨 물과 피가 폐 안에 들어와 죽음에 이른다. 이를 폐혈증이라고 하는데, 의학자들이 AI를 ‘사람을 익사시키는 질환’이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폐혈증으로 폐가 제 기능을 못하더라도 T-PLS로 환자의 생명을 유지시키면서 폐혈증 치료제를 써 망가진 폐의 기능을 회복시키면 환자를 살릴 수 있다는 게 민 교수의 논리다.
그는 “꼭 AI가 아니더라도 폐혈증은 사망률이 50%에 달하는 난치병이라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며 “이미 서울대 병원이 T-PLS를 이용한 폐혈증 치료를 위해 임상시험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그는 T-PLS를 이용한 AI 치료에 대해 “의료계에 제안하는 것일 뿐 검증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절대 확대해석을 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래도 ‘과학은 조그만 상상에서 출발한다’는 말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휴대 가능한 꿈의 투석기
미국 유학시절 이후 민 교수의 행보를 살펴보면 그의 관심이 여러 인공장기 분야 중에서도 오직 인공심장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2004년에는 돌연 휴대형 인공신장기를 개발했다고 발표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세계 최초의 체내 이식형 양심실 보조 인공심장 ‘애니하트’에 대해 설명하는 민병구 박사.
그후 민 교수 스스로 선택한 과제는 가정에서 혈액투석이 가능한 인공신장기(투석기) 개발이었다.
“젊은 시절을 지식과 연구에 대한 갈망으로 보냈다면, 노년기에 접어들고 나서는 내가 가진 지식과 기술로 환자들에게 널리 도움을 주고 싶어졌어요. 그러다 보니 병을 낫게 하는 것뿐 아니라 환자의 삶의 질까지 고민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혈액 투석은 환자 삶의 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므로 반드시 개선돼야 할 치료법이죠.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삼아 성과를 내면 보람이 클 것이라고 봤습니다.”
이틀에 한 번씩 병원에서 장시간 투석치료를 받는 것은 입원을 안 했을 뿐이지, 환자에겐 사회생활에서 격리되는 것과 다름없는 고통을 안겨준다. 또한 투석 환자들은 병원에 올 때 대부분 가족을 동반하기에 이는 환자 개인이 아니라 가정 전체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민 교수는 이런 점에 착안, 집에 두고 쓸 수 있는 이동식 투석기를 개발하기로 마음먹고 연구에 착수했다.
“먼저 가정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두고 쓰다가 필요한 경우 휴대도 할 수 있으려면 투석기의 부피를 획기적으로 줄여야 했지요. 연구를 통해 본체 무게를 25kg 정도로 줄이고 투석에 필요한 증류수의 양도 120ℓ에서 10ℓ전후로 대폭 줄였습니다. 의료 전문가가 아닌 환자나 그 가족들이 손쉽게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조작법도 간소화했습니다.”
휴대형 투석기를 어렵사리 개발해냈지만 이를 보급하려면 기나긴 검증과정이 필요했다. 제주대 수의학과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동물실험을 위해 매주 서울과 제주도를 오가야 했다. 동물실험의 성과는 충분했다. 식약청의 허가만 떨어지면 곧바로 상용화 단계에 들어갈 수준에 도달했다. 그의 1단계 목표는 중소 규모의 병원에 휴대형 투석기를 설치해 환자가 종합병원까지 나오는 수고를 더는 것이고, 다음 단계는 가정에 투석기를 설치해 환자가 원하는 시간에 언제든 투석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전 재산 쏟아부은 사연
휴대용 투석기를 환자들의 손에 쥐어주려면 식약청 허가가 나올 때까지 1~2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민 교수는 “연구자에겐 바로 이때가 가장 어려운 시련의 시기”라고 말한다. 연구하는 동안 비용을 대주던 정부도 막상 연구 결과물이 상품화를 앞두게 되면 일단 발을 빼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기 때문.
국내 기계식 인공장기 연구진은 이미 세계적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어 연구활동에는 큰 어려움이 없는 게 사실. 하지만 정부 지원금의 대부분이 연구단계에만 쏠려 있어 동물실험이나 정식 허가, 제품화 단계에 필요한 비용은 턱없이 부족하다. 민 교수 또한 애써 개발한 장비들을 사장시키지 않기 위해 비용을 직접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재산뿐 아니라 처가를 비롯한 일가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에게까지 호소해 비용을 마련했다.
“가족은 언제나 내가 하는 일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지하고 격려해준 최고의 응원군입니다. 저는 아내가 반대하는데도 재산을 모두 내 일에 쏟아붓는 간 큰 남편은 못 됩니다. 저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지요. 친구나 친척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허튼 일에 투자하라는 게 아니고, 젊어서부터 내가 연구하는 모습을 보아온 사람들이라 흔쾌히 도움을 준 것 같아요.”
민병구 박사가 개발한 휴대용 인공신장기(투석기).
연구결과물을 상품화하는 데 어려움이 컸던 만큼 ‘황우석 파동’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를 바라보는 민 교수의 심정은 착잡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 사태가 황 박사의 개인 비리라기보다 줄기세포에 대한 지나친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연구는 연구 자체로만 봐야 하는데, 실험실에서 바로 치료제가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언론이 부풀린 데서 문제가 불거졌다는 것. 그는 “‘네이처’나 ‘사이언스’지에 논문이 실렸다고 뉴스로 대서특필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며 “어떤 연구물도 현실에 적용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희망과 확신의 화살
“황 박사도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니 끊임없이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을 겁니다. 그런 부담이 계속 쌓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실수를 저지른 것 아닐까요.”
황 박사에 대한 질문이 부담스러운지 그는 극히 말을 아꼈다. 하지만 기계식 인공장기에 제대로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현실로 주제를 옮기자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발표한 투자 기준을 봐도 신약이나 바이오 산업보다 의료기기나 인공장기 분야에 더 높은 점수를 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기계식 인공장기 시장에 투자하겠다고 나서는 기업이 하나도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삼성경제연구소는 2003년 발표한 ‘산업판도를 바꿀 미래기술’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10대 미래기술을 선정, 발표하면서 그중 하나로 인공장기를 꼽았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인공신장기를 포함한 국내 인공장기 시장 규모도 크게 확대될 전망이다. 민 교수는 3시간이 넘는 인터뷰를 끝내면서 “기계식 인공장기들이 지금은 비록 가려져 있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정당한 평가를 얻어 한국 경제에 막대한 부가가치를 안겨줄 효자산업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안개 속으로 / 아주 힘차게 / 보이지 않는 표적을 향하여 / 이른 새벽에 / 화살을 날려보낸다 / 나의 마음을 담아서 / 또 다른 일에서처럼 / 표적이 있을 곳을 향하여 / 희뿌연 아침 안개 위의 / 허공을 보면서 / 그래도, 혹시나 / 딱 하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민 교수의 시 ‘안개 속의 화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