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일, 연평해전 2개월 전 “체제대결 유발할 전술안 통 크고 대담하게 작성하라” ● 김정일, 연평해전 사흘 전 “이번에 해군사령부에서 영웅이 몇 명 배출돼야” ● 3호청사 ‘두뇌진’으로 구성된 태스크포스 ‘43조’의 실체 ● 김정일, 연평해전 직후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경비함에 장갑철벽을 설치해주라” ● 김정일, 2001년 12월30일 오극렬에게 “서울에서 월드컵 하는데 당 작전부는 뭘 하나” ● 북방한계선 월선하며 자극한 어선은 인민무력부 정찰국 위장선 ● 쏟아지는 파열탄, 귀청찢는 포성…승조원 몸에 박힌 파편 240개 ● “남조선이 ‘우발사태’로 모니, 우리도 해군사령부 책임으로 몹시다” ● 김정일, 2002년 7월 “연평해전은 졌으나 서해교전은 사실상 이긴 전쟁” ● 사망 함장 1년 뒤 ‘공화국 영웅’ 칭호, 해임됐다던 8전대장은 1년 만에 복직 |
1999년 6월 연평해전 직전에 발생한 해군 고속정(오른쪽)과 북한 경비정의 충돌 순간. 국방부
북한의 고위간부 자녀들은 망명을 우려해 원칙적으로 해외출장이 허가되지 않는다. 때문에 이들은 중국 등 제3국을 경유하는 대신, 함경북도 청진항에서 몰래 배를 타고 공해상으로 나가는 방식을 택했다. 공해상에 나와 있던 미 해군 잠수함을 타고 일본을 경유해 태평양을 가로질러 미 본토로 왔다는 설명이다.
이들의 망명소식은 이듬해인 2004년 11월 일본 NHK 방송을 통해 처음 보도됐다. 이때의 언론보도는 망명한 이들이 ‘수십명 규모’라고 전하거나 오세욱씨가 친위대의 일원이었다고 전하는 등, 일부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었다. 올해 41세인 오세욱씨는 탈북 당시 인민군 중좌 계급이었으며, 무기개선에 관여하는 인민무력부 장비국 등에서 근무했다. 탈북 전에도 정치범 수용소를 두 차례 다녀오는 등 ‘체제부적응 인사’로 낙인 찍혀 친위대 근무는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한다.
2004년에는 조선노동당 대외·대남부서가 집중돼 있는 3호청사 소속 과장급 간부와 책임지도원 한 사람이 중국으로 빠져 나와 곧바로 제3국으로 망명했다. 올해 57세인 이 과장급 간부는 20대이던 1970~80년대 남파되어 대학을 다니며 공작활동을 벌인 경력을 갖고 있다. 이후 북한으로 돌아간 그는 남조선문제연구소 등 전문직책을 거쳐 통일전선사업부에서 근무하다 부하직원과 함께 망명을 결심했다.
2000년대 들어 미국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전직 북한 고위관료나 핵심기관 구성원, 공훈가족 자녀 등에 대해 치밀한 망명공작을 진행하고 있다. 황장엽 전 노동당 국제담당비서가 망명한 1990년대 중반 이후 남한으로의 귀순은 이들에게 ‘메리트’를 상실한 상황. 이 때문에 탈출을 결심하는 당국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미 정보당국 등과 접촉해 이들 나라로의 망명을 택하고 있다. 미 정보당국은 장차 김정일 체제에 이상이 발생할 경우 이들을 규합해 망명정부 혹은 대체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치밀한 ‘체제전환 사전준비’인 셈이다.
최근 수년 사이 평양의 핵심 권력기관에서 일하던 간부들이 빠져 나옴에 따라, 북한의 내부상황에 대한 정보는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신동아’는 우연한 기회에 이들 중 일부와 접촉할 수 있었고 이들의 증언과 기록을 바탕으로 몇 차례의 특종보도를 했다(그러나 최근 이들의 소재나 생활이 안정되면서, 외신을 비롯한 다른 언론에 노출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들의 증언으로 2000년대 이후 벌어진 남북간의 주요사건을 둘러싼 ‘평양 내부의 움직임’이 확인되는 시점 역시 최근 2~3년 전까지 소급됐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1999년 6월15일 발발한 연평해전과 2002년 6월29일 발발한 서해교전이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둘러싼 이 비극적인 사건을 놓고, 이후 서울에서는 과연 이들 교전이 북한의 치밀한 계획에 따른 것인지 우발적인 사건인지에 대한 논쟁이 심각했다. 상당수 전문가 및 정부당국자들은 ‘우발 사건론’ 혹은 ‘군부 독자행동론’에 무게를 실었다. 김정일 위원장 본인이 그러한 취지의 발언을 남측 관계자들에게 한 적도 있다.
‘신동아’는 연평해전 7주년 및 서해교전 4주년을 앞두고, 이러한 견해의 타당성을 검증하고 그 구체적인 실체를 재확인하는 특별취재를 기획했다. 이를 위해 우리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인민무력부와 대남·대외공작을 담당하는 노동당 3호청사 등 주요기관에서 과장급 이상 간부로 재직하다가 망명한 전직 당국자들의 증언을 수집했다.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연평해전과 서해교전은 모두 김정일 위원장의 사전 특별지시에 따라 기획, 실행된 의도적인 군사행동이었다.
연평해전의 경우, 김 위원장은 ‘햇볕정책’ 이후 이완된 북한의 협상우위를 찾을 방법을 구상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이에 따라 3호청사는 DMZ(비무장지대)에서의 국지도발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정주영 현대 회장의 금강산 개발사업 등이 진행되고 있어 적절치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마지막에 착안한 것이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 언급돼 있는 서해 북방한계선의 문제였다.
이를 근거로 서해에서 해상 무력도발을 일으킨다는 3호청사의 기획안은 김 위원장의 극찬 속에 통과됐고, 해군사령부 차원에서 은밀히 실행 작업이 진행됐다. 이를 담당한 해군사령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격려할 만큼 김 위원장의 ‘특별한 관심’ 속에 준비됐다는 것. 애초에 ‘소규모 해상 교차사격’ 정도로 계획됐던 해전이 생각보다 확대되어 사실상 북한측이 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김 위원장은 군의 노고를 치하하고 서해함대 경비정의 성능개선을 직접 지시했다는 증언이다.
서해교전의 경우, 김 위원장이 5월1일 해군사령부를 직접 방문해 구성원들을 일일이 격려해가며 준비한 사건이었다. 교전이 끝난 후에도 “사실상 우리가 이긴 전쟁”이라며 치하를 아끼지 않았고, 책임을 물어 경질했다고 발표한 서해함대 8전대장은 1년 뒤 복직했다는 것이다. 두 해전의 기획, 준비, 실행, 사후점검에는 3호청사와 인민무력부 구성원들이 참여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사후점검 과정에서 교전에 투입됐던 북한 해군 병사들을 통해 당시 상황을 세밀하게 복원해 이를 김 위원장에게 보고했다.
‘신동아’는 다양한 방법으로 수집한 관련증언을 ‘로동신문’ 등 당시 북한의 공식매체에 실린 기사내용을 통해 가능한 부분까지 최대한 검증한 뒤, 이를 시간 순으로 정리했다. ‘신동아’는 서해교전 직후 출간된 2002년 8월호의 ‘6·29 서해교전은 김정일의 ‘6·15 격침작전’이었다’ 기사를 통해 남측 군 당국의 조사결과와 정보기관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건의 진상에 접근한 바 있다. 다시 한번 총력을 기울여 북측 당국자의 회고와 증언을 취재한 이 기사를 통해 ‘서해교전의 실체’를 더욱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알려진 대로 1994년부터 1998년 사이 북한에서는 300만명 이상의 주민이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이 때문에 정권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나 동요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졌다. 여기에 1998년부터 본격화된 국제사회의 인도주의 지원물자와 한국의 대북지원도 간단치 않은 문제를 야기했다. 북한 주민들에게, 반세기 이상 ‘주적(主敵)’으로 교육 받았던 미국과 한국 ‘지도자 동지’도 주지 못하는 식량을 무상으로 보내준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남한’이라고만 해도 “왜 남조선으로 부르지 않았느냐”며 정치범 수용소로 연행하던 북한체제에서, 많은 이가 한국 혹은 대한민국이라고까지 자연스럽게 부르는 지경이 됐다.
더욱이 수백만이 굶어죽는 상황에서도 김일성의 시신을 안치할 금수산기념궁전 건설에 수억달러의 돈이 투입됐다. 평양 시민들을 비롯한 주민들의 반감은 커질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남한에서 올라오는 무상지원을 ‘고맙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남한의 대북지원으로 인해 적대감이 희박해지는 북한주민들의 의식변화는 ‘체제불만’을 넘어 ‘체제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김정일은 이러한 주민 정서를 되돌리기 위해 ‘남조선은 북침의 기회를 노리는 민족의 적’이라는 실체적인 증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햇볕정책에 담긴 ‘경제지원과 교류로 한반도의 평화를 안정적으로 관리한다’는 문구에 자극을 받은 김정일은, 이후 두 차례 교전의 출발점이 되는 첫 번째 교시를 내린다. 1999년 4월3일, 조선노동당의 대외·대남전략부서가 모여 있는 모란봉구역 전승동 ‘3호청사’에 “적들이 햇볕정책을 대북정책으로 고착시키는 만큼 우리는 평화협박 전술로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고 지시한 것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 ‘우리의 총창 우(위)에 평화가 있다’는 노래를 높이 평가했다. 1996년 무렵 왕재산 경음악단에서 창작한 이 노래야말로 “선군(先軍)시대의 명곡이고 명답”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김정일은 “체제대결을 첨예하게 유발시킬 수 있는 전술안을 통이 크고 대담하게 작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평양 모란봉구역 전승동에 있는 '3호청사'의 위성사진. 대외연락부, 통일전선부, 작전부 등 북한 노동단의 대외·대남정책담당 기관들이 모여 있는 핵심권부다.
대외·대남전략과 관련한 김정일의 지시가 떨어지면 그 집행을 위해 3호청사 부서들은 산하 연락소 가운데 업무능력이 가장 뛰어난 전문직 일꾼들을 엄선해 임시조직을 발동한다. 이때 이 임시조직 명칭은 김정일이 해당 지시를 내린 날짜를 따서 결정한다. 따라서 4월3일 김정일의 ‘통큰 전술안’ 지시를 준비하는 임무를 맡은 임시조직의 이름은 ‘43조’로 결정됐다.
그러나 이미 교류정책을 진행하고 있는 남한을 상대로 예전처럼 무작정 무장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1998년 소떼를 몰고 방북한 정주영 현대 회장과의 경제교류 협의도 43조가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내기 어렵도록 제한한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현대라는 거대기업의 투자를 유도하면 한국의 많은 기업을 대북지원과 교류에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3호청사 부서들은 현대와의 사업을 대단히 중요시하고 있던 터였다.
‘현대와의 경협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인민들의 대남 적대감을 자극할 수 있는 갈등’이라는 조건은 매우 까다로운 것이었다. 이 때문에 43조는 한 달 이상 통일전선사업부 소속 초대소에 모여 고민했지만 이렇다 할 아이디어를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국가보안법 철폐나 주한미군 철수, 한미연합훈련 중지 같은 고전적인 문제는 갈등의 소재로 삼기에 너무 약했다.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 범위를 넓혀나가던 43조는 ‘갈등의 빌미’를 찾기 위해 전쟁 이후 남북간에 맺어진 합의문건들을 연구, 분석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5월 중순,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한다. 1991년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 부속합의서를 위한 협의에서 북한이 협상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제기했던 ‘서해 5개 도서 주변해역 관할권 주장’에 착안한 것이다. 이 해상 부분의 경계선은 1953년 정전(停戰)협정에서 모호하게 규정된 것으로, 영해권 싸움이 쟁점이 될 경우 이는 사실상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는 것을 의미했다.
“육상전이 아니라 해상전이다”
3호청사 두뇌진이 애초에 김정일의 지령을 받았을 때는 ‘육지에서의 무력충돌’ 범위 안에서만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남과 북 사이에 실질적으로 무장교전이 가능한 지역은 막강한 화력이 상호배치돼 있는 비무장지대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대가 제기한 육로관광 문제가 족쇄로 작용했다. 북한은 현대가 초기협상에서 제기한 육로 관광방안을 잠정적으로 불허했지만, 앞으로 남북경협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개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깊이 의식하고 있었다.
1980년대 말 ‘남북경협’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도 노동당 대남정책 부서들은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이미 원산까지 개방을 검토한 사례가 있었다. 그때 김정일은 이러한 방안을 ‘체제위협’으로 간주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바 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들어 김정일은 남북관계를 ‘조미(朝美)관계 회복까지의 과도작업’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육로를 언제 개방할지가 최대의 쟁점이 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당시의 북한으로서는 남한으로부터의 지원과 경제교류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으나, 비무장지대에서의 직접적인 위협이나 분쟁은 그 모든 문제를 단번에 위축시킬 공산이 컸다. 다시 말해 한국 기업이나 관광객을 안정적으로 끌어들이자면 육지에서 대결을 벌이는 대신 바다로 무대를 옮겨야 한다는 게 43조의 최종 결론이었던 것이다.
43조가 서해 영해권 주장에 대한 제의서를 작성해 김정일 서기실에 제출한 것은 1999년 5월말이었다. 이를 보고 받은 김정일은 3호청사 부서들이 ‘귀중한 발견’을 한 것에 대해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서해전선’이야말로 남조선의 북침도발을 명백하게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전술안이며, 놈들을 우리의 선군정치로 단단히 구속시킬 수 있는 현 시대의 가장 주동적인 명안”이라는 칭찬이 거듭됐다. 하루도 지체하지 말고 즉각 작전을 추진하라는 김정일의 지시에 3호청사 부서들은 ‘서해전선 사업’을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 그 구체적인 방향을 논의하고 관리방법을 계획했다.
우선 3호청사는 서해전선 사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려면 시일을 두고 꾸준히 수위를 높여나가는 단계적 전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북한이 연평해전 직후 ‘로동신문’ 기사 등을 통해 서해상의 남북 경계선에 대한 구체적인 제의를 내놓은 것 역시 43조가 사전에 준비한 이른바 ‘단계화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서해상 경계 문제를 남북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장기적인 카드로 만들어 나간다는 복안이었다.
장기화 전략까지 치밀하게 준비한 3호청사 부서들은 곧 인민무력부 작전국과 협의에 들어갔다. 구체적인 위치와 날짜, 작전방법과 동원할 부대 등을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북한이 연평해전 날짜를 6월15일로 정한 것에는 6월이 꽃게잡이 철이어서 영해권 갈등을 가장 첨예하게 일으킬 수 있는 시기라는 판단이 작용했다.
특히 북한 주민들의 대남 적대감을 자극하려면 북한의 어민들이 남한의 해군에게 납치되거나 사살당하는 시나리오가 가장 적절한데,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기에는 꽃게잡이 배들의 월선(越線)이 많은 6월이 적기라는 판단도 있었다. 실제로 3호청사와 인민무력부는 군사충돌의 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해 어민들이 남한 해군에 납치되게 만드는 구체적인 방안도 추가로 준비했다. 연평해전 당시 군사요원들의 지휘 하에 꽃게잡이 배들이 앞장서서 나온 것은 이러한 전술을 이용한 것이었다.
북한 해군사령관 김윤심 대장. 서해상에서 벌어진 두 차례 교전의 실질적 책임자다.
그러나 작성중인 작전계획의 구체적인 내용은 43조 기본 성원들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리명수 대장, 해군사령부 사령관 김윤심 당시 상장만이 알도록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해군사령부 작전지휘 성원들도 교전이 발생한 뒤 서해함대 사령부로부터 긴급전투상황을 전달받고 나서야 비로소 전투지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마침내 완성된 연평해전 작전계획을 김정일이 비준한 것은 6월12일이었다. 이날 김정일은 김윤심 사령관에게 따로 전화를 걸었다. 측근과 조직관리에 탁월한 김정일이지만, 집에까지 직접 전화를 거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김윤심은 원래 서해함대 사령관으로 근무하다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의 뒤를 이어 해군사령관으로 승진한 인물이었다. 김정일을 수행해 각종 공연을 다닐 정도의 측근이었다. 평양시 마람동 해군사령부 내에 위치한 김윤심 상장 저택으로 전화를 걸어온 김정일은 “이번에 해군사령부에서 영웅이 몇 명 배출돼야겠다”며 격려했다.
이 무렵 해군사령부에서는 김정일의 고무에 감동한 김윤심이 “장군님의 어뢰알이 되겠다”고 맹세했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이후 김윤심의 이 ‘어뢰알 맹세’는 육군의 ‘총폭탄 맹세’처럼 해군사령부의 충성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 그때부터 김정일은 군 행사 때마다 김윤심을 “나의 어뢰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연평해전 사망자만 24명
연평해전 다시 우리 해군 고속정의 반격을 받아 화염에 휩싸인 북한 경비정 682호. 갑판에서 병사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북한에서 경비함이라고 불리는 배는 한국의 쾌속정 크기에 해당하는 배다. 북한에서 가장 큰 배로는 1960년산(産) 옛 소련제 전함 두 척이 있다. 이를 구축함이라고 부르며 동해와 서해함대에 각각 한 대씩 배치했다. 그 다음 함선이 바로 경비함이다. 원래는 며칠씩 바다에 나가 북방한계선까지 순찰하는 임무를 담당하지만, 연료사정이 형편없는 북한의 사정상 이미 1970년대부터 북방한계선 부근에 도착하면 한 자리에 서 있는 식이다. 바다순찰이 아니라 바다보초를 서는 셈이다. 인민무력부나 총참모부 등이 김정일의 4월3일 지시 이전에는 북방한계선의 의미를 잊고 지내다시피 한 것에는 해군의 기동력 부족도 큰 원인이었다. 북방한계선 주변활동에 공백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윤심은 서해함대 지휘관들에게는 자신이 내려온 이유가 무엇인지 일절 발설하지 않았다. 대신 가장 용기 있고 젊은 함장들을 불러 면담을 진행했다. 함장은 해군사령관에게 구구절절 자신의 충성심을 피력했고, 김윤심은 면담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평양으로 돌아왔다. 임무를 맡은 함장들이 자신들의 임무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은 경계근무 순찰을 위해 출항하기 바로 전날이었다. 3호청사 요원과 당 조직지도부 군사담당 성원으로부터 ‘당적(黨的) 지시’를 받은 함장들은 그때야 비로소 해군사령관이 자신을 면담한 의미를 알 수 있었고, 자신에게 부여된 혁명과업을 피로써 수행하겠다는 일념으로 출항하게 된 것이다.
인민무력부 작전부는 교전계획이 은밀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작전을 치밀하게 구체화했다. 남한측이 함선간 무선통신을 도청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은,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해병(해군 병사)들이 비밀을 발설할 수 있는 만큼 함장의 사격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어떤 해병도 작전의 목적이나 내용을 일부조차 알 수 없도록 지시했다.
마침내 6월15일 오전, 경비함 네 척이 꽃게잡이 어선 20척을 앞세우고 북방한계선을 넘었다. 남한 해군의 고속정과 초계함 10여 척이 ‘충돌기동’을 위해 자동소총 사정거리 안까지 접근했다. 서로 밀고 당기는 함선 충돌 끝에 북한 해병 하나가 반찬으로 실은 소금에 절인 무를 남측 함정에 던졌다. 수류탄을 던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몸을 숨겼던 한국 해병들이 수치심에 분노하자, 함장은 조준사격을 준비하라고 함선 포장에게 명령했다. 남한측 해군 병사들은 순간 당황했고, 이내 북측 경비함의 25mm 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북한 어뢰정 3척도 가담했다.
그러나 화력은 남한 해군이 훨씬 강했다. 남측 초계함의 76mm 함포와 고속정의 40mm 기관포 등은 서해함대의 어뢰정 1척과 경비정 1척 등 2척을 침몰시켰고, 다른 경비정 3척도 크게 파손된 채 퇴각해야 했다. 군사기술의 차이로 인한 결정적인 패전이었다. 인명피해만도 즉시 사망자와 추가 사망자를 합쳐 24명에 달했다. 열악한 의료체계 때문에 후송 도중 사망한 병사가 많았다.
서해교전 두 달 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포 해군사령부 방문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로동신문' 2002년 5월 2일자
반면 참혹한 패전의 실상을 알고 있는 인민무력부와 해군사령부는 책임문제 때문에 서로 신경이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졌다. 특히 김윤심 해군사령관은 ‘어뢰알’이 불발탄으로 끝난 참패 때문에 잠도 편히 못 자는 지경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3호청사 부서들도 너무나 큰 손실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불안한 상황을 뜻밖의 방법으로 해결해준 것은 다름아닌 김정일이었다. 교전 이틀 후인 1999년 6월17일, 김정일에게서 “이번 전투는 참 잘됐다”는 치하가 내려온 것이었다. “싸움 그 자체보다 그 싸움이 주는 효과를 잘 이용하는 것이 당초 목적이었던 것만큼,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라며 3호청사 성원들을 격려하기까지 했다. 연평해전 3개월 후인 1999년 9월에는 김윤심을 불러 군 공훈합창단 경축공연을 함께 관람함으로써 그의 불안도 말끔히 씻어주었다. 이렇게 되자 3호청사는 3호청사대로 북방한계선에 대한 후속전략을 서둘러 추진했고, 군부는 군부대로 다음 전투 준비를 완성하기 위한 함대의 군사기술 상의 보완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군수(軍需)경제 전문가인 연형묵의 책임하에 제2경제지도위원회 기술자들과 간부들이 서해함대에 내려와 함선의 기술적인 개선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교전에 참가했던 해병들은 한결같이 남측의 함대 선진화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중에서도 방탄설비 문제가 가장 많이 제기됐다. 이를 수집한 연형묵은 이 사실을 곧바로 김정일에게 보고했고, 김정일은 이내 “경비함에 장갑철벽을 설치해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장갑철벽을 설치하면 함선이 그 중량을 못 견디기 때문에, 대신 탱크 포를 내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T-34 탱크에서 포신만 떼어내 배에 부착한 이 포는 파도가 아무리 높아도 조준점을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어 북한 경비함의 장점으로 꼽히는 무기였다. 결국 제2경제지도위원회는 2002년 서해교전 발발 때까지 아무런 대책도 세울 수 없었다(서해교전 후에야 방어설비보다는 화력을 보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소련제 다발식 고사총을 추가 설치하는 방식으로 함선을 재무장했다).
연평해전 닷새 후인 6월20일, 김정일은 기여한 해병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컬러TV와 사탕과자류 상자를 하사했다. 그리고 사망한 함장과 정치지도원에게는 영웅칭호를, 나머지 전사자들에게는 국기훈장1급을, 살아 돌아온 해병들에게는 전사영예훈장을 수여했다. 3호청사도 연평해전으로 인해 남한과의 대화전략에서 ‘북방한계선 문제’라는 강력한 무기를 갖게 됐다. 그리고 ‘군부의 입장’을 내세워 북방한계선이라는 견제카드로 전략적 필요에 따라 침범이나 교전협박을 활용할 수 있게 됐다. 남북대화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는 계기였다.
노동절에 해군사령부 찾은 까닭
오극렬 조선노동당 작전부장. 그의 장남 오세욱씨의 미국 망명 이후에도 건재한 군부실세다.
이때 김정일이 강조한 방법이 바로 “서해 경계선을 잘 이용하여 숨돌릴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이러한 의지와 결심을 신년 공동사설에 반드시 천명하라고 지시했다. 공동사설이란 매년 1월1일 한 해의 ‘당적 과업’을 제시하기 위해 내는 사설로, ‘로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 등의 매체에 함께 실린다. 2002년의 공동사설이 “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대한 인민군대의 립장은 단호하며 우리의 총대는 무자비하다. 만약 미제(美帝)와 그 추종세력들이 감히 불질을 한다면 덤벼드는 침략자들은 무주고혼(無主孤魂)이 될 것이며 적들의 침략적 아성은 그 어디에 있건 무사치 않을 것이다”라는 종전보다 훨씬 강도 높은 문장들로 쓰여진 것은 바로 김정일이 내린 이 특별지시에 따른 것이다.
2002년 새해에 들어서까지 몇 번에 걸쳐 반복된 김정일의 월드컵 관련 발언에 모든 대남공작 부서는 엄청난 긴장상태에 시달렸다. 벌써 수십년을 헤아리는 김정일의 통치 스타일에 적응이 된 당 관료들은 특유의 직감을 갖고 있었다. 정확히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를 모를 뿐, 김정일이 무언가를 구상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들 직감하고 있었다. 더욱이 연평해전의 주역 해군사령관 김윤심 상장이 4월13일자로 대장이 되자 직감은 더욱 분명해졌다.
결국 이 직감은 김정일이 국제노동자절인 5월1일에, 마땅히 가야 할 공장기업소나 농장이 아니라 해군사령부를 방문하면서 정확히 맞아떨어졌다(해군사령부는 원래 평양시 형제산구역 서포동에 있었으나, 폭격위험에 노출돼 있다며 평안남도 평성시 부근 마람동(행정구역 상으로는 평양시)의 옛 리제순 군사대학(국경경비대학) 자리로 옮겼다). 해군사령부 본부 건물에는 연평해전을 형상화한 대형 유화가 한 점 걸려 있었다. 김정일은 이날 이 그림 앞에서 “오늘의 최전선은 육지가 아니라 바다이며, 때문에 조국의 분계선은 민병이 아니라 해병들이 지키고 있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시간이 없지만, 바다에서 싸움이 붙으면 어떻게 지휘하는지 꼭 봐야겠다”며 갱도 안에 있는 작전지휘통제실로 들어갔다. 한반도 전해상을 감시하고 서해함대 및 동해함대 작전을 지휘할 수 있도록 현대화된 작전지휘통제실을 둘러본 김정일은 싸움준비를 잘해놓았으며 공군보다 더 잘돼있다고 만족스러워 했다.
김정일은 이어 통제실 안내를 담당한 지휘관에게 연평해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보라고 요구했다. 지휘관은 “적군과 아군이 똑같이 점으로만 표시되고 구분이 잘 안 되는 전광판이어서 속도가 느린 점을 아군으로 파악하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김정일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2002년 7월 11일 사곶 외항 접안시설에 정박해있는 684호(사진① 점선원 안). 2004년 2월 촬영된 같은 지역의 선박(사진②)과 비교해 보면 크게 파손된 상태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로부터 두 달 가량이 지난 6월29일, 한국과 터키의 서울월드컵 3, 4위전이 벌어지던 날 서해교전이 터졌다.
6·29 서해교전을 준비하는 작전은 6·15 연평해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미 경험이 있는 만큼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번에도 구체적인 작전내용은 참전 해병들에게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경비정이 많지 않다 보니, 연평해전 당시 남측해군의 포격에 반파된 채 돌아왔던 8전대 등산곶 기지의 684호도 선발됐다. 출항직전 극비로 전달된 사항이다 보니, 이 배의 해병들은 그날도 평시와 다름없는 수준으로 준비작업을 하고 있었다. 함선에 공급되는 디젤유를 내다팔기 위해 몰래 빼낸 해병도 있었고, 함선의 기술적인 준비도 충분치 못했다.
함장은 출항을 며칠 앞둔 밤에 비상령을 내려 디젤유를 보충하게 했고, 잠자는 기관장을 깨워 그간 방치돼 있던 고장난 보조조타를 긴급히 수리하도록 명령했다. 함선에는 기본조타가 고장났을 때 수동으로 대처할 수 있는 보조조타가 있는데, 함장은 이날 내려온 3호청사 요원과 당 조직지도부 대남공작 담당 과장, 인민무력부 작전국에서 나온 장성과 함께 이 모든 결함을 점검한 것이다. 탄약도 평시와 다르게 가득 채우도록 지시했다. 이를 보면 서해교전은 6월29일이 아니라 이미 한참 전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해군사령부는 남한 해군의 근무경계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우선 고기잡이 배들을 내보내 일부러 서해 경계선을 침범하게 했다. 이들 어선에는 평범한 어민들 대신, 어민으로 위장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성원들이 타고 있었다. 연전연승하는 월드컵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정찰 자료들은 “남조선 해병들에게서 심리적 공백이 역력해 보인다”는 보고를 쏟아냈다.
6월20일 경부터는 도발수위를 더 높여 어선이 아니라 함선으로 북방한계선을 넘었다. 남측 해군의 반응을 타진하기 위한 수법이었다. 그리고 하루 전날인 28일에는 과감히 두 대를 침투시켰다. 그러나남측 해군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남측 함선들이 단호한 대응자세를 보이면 교전 자체를 며칠간 연기하며 기회를 본다는 것이 애초의 계획이었다.
이렇듯 경고방송 수준의 반응이 이어지자, 김정일의 명령을 받고 영웅심리에 들떠 등산곶 기지에서 출항한 함선 684호와 육도에서 출발한 388호는 6월29일 아침 더욱 격렬하게 남측 함선들과 기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오전 10시30분 경에는 684호가 85mm 탱크포를 정확히 조준해 남측 함선에 발포했다.
이 첫 번째 포탄은 남측 고속정에 명중했고, 탱크의 장갑판도 뚫을 수 있는 포탄인지라 여지없이 고속정의 조타실을 찢었다. 해병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이내 남측 함선도 불을 뿜으며 반격에 나섰다. 인근에 있던 남측 함정들이 힘을 보태자 684호의 85mm와 37mm 함포, 소련제 고사총 등 대부분의 화력이 순식간에 제 구실을 하기 어렵게 됐다. 그 와중에 상대편 저격수의 총에 맞은 함장이 즉사하고, 대신 보위지도위원이 지휘를 맡았다. 기본조타가 부서져 나가자 684호는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 올랐고 총소리로 사방이 가득한 배 위에서는 옆에 선 전우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옆 사람을 부르려면 철모를 후려쳐야 돌아볼 지경이었다. 파열탄의 파편이 시커멓게 쏟아져내렸다. 남측 함선들이 속속 도착해 684호를 향해 불을 뿜었다. 몇 대나 몰려왔는지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병사들은 공포에 질렸고, 결국 684호의 후미에서 큰 불꽃이 솟아올랐다. 보위지도위원은 퇴각을 명령하고 보조조타를 이용해 북으로 기수를 돌렸다. 뒤에서 대기하던 육도의 388호가 예인선을 걸었다. 전투개시 30분이 지난 11시 무렵, 드디어 포격이 멈췄다. 이들에게는 수리시설이 있는 사곶 기지로 들어오라는 무선지시가 떨어졌다.
“6·15는 졌지만 6·29는 이겼다”
경비함들이 귀환한 직후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작전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온 3호청사 요원들이었다. 귀환한 해병들은 거의 다 중상을 입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되지 않았다. 연평해전 때보다 희생자수는 훨씬 적었지만 해병들의 공포는 더욱 컸다. 사곶 기지로 겨우 돌아온 부상 해병들은 헬기에 실려 평양시 대동강구역 문흥동에 위치한 조선인민군 제11호병원으로 긴급후송됐고, 이후 외부와 철저히 차단돼 치료를 받았다. 어떤 해병은 몸에 박힌 파편의 숫자가 240개에 달했다. 당시 전투상황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상처였다.
대부분의 해병은 아직 전투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경황이 없었다. 3호청사 성원들은 업무특성상 작전전개상황이나 군사기술적인 문제보다 상대편 사상자 숫자에 관심이 많았다. 어떤 해병은 자기가 쏴 죽인 놈만 10명이 된다고 했고, 또 어떤 해병은 모두 합쳐 100명쯤 죽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남한 언론은 벌써 ‘사망 4명, 실종 1명, 부상 19명’이라는 자기측 피해상황을 보도하고 있었다. 이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던 3호청사 성원들이 “똑바로 말하라”고 으름장을 놓자 그때야 해병들의 입에서 진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군사적으로는, 남한 해군은 전투준비 명령이 떨어지면 일단 갑판 밑으로 사라지는데 북한 해군은 반대로 갑판 위로 올라와야 하기 때문에 피해가 더욱 컸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래서 파열탄이 우박처럼 떨어지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남한 함선의 이동속도가 너무 빨라 전투 주도권을 쥐기 어려웠다는 분석도 있었다. 해병들은 남한 병사들이 입은 방탄조끼를 부러워했다. “솜옷이라도 입으면 그나마 파편을 일부라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해병들의 요구에 따라 그 후 인민무력부는 8전대 전체 해병에게 두터운 목화 솜이 들어간 옷을 지급했다.
이후 보고과정에서 해병들은, 기본조타가 고장이 나서 보조조타로 돌아왔다며 사전에 함선을 면밀히 점검해 방치돼 있던 조타를 수리한 함장을 추켜세웠다. 또한 총알과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데 기관포 사수가 자기의 철갑모를 보위지도위원에게 벗어주더라는 ‘감동적인’ 이야기도 쏟아냈다. 그동안 당 차원에서 군인들을 상대로 진행해오던 이른바 ‘총폭탄 교양효과’가 입증된 사례였다. 또 해병들은 목숨을 내놓고 싸운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영웅이 되고 싶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지난번 연평해전 때는 컬러TV를 줬다는데 이번에도 주게 될지 조용히 묻기도 했다.
3호청사는 1999년 6월30일 서해교전 결과 보고서와 함께 남한 언론 및 국민정서를 파악하고 분석한 보고서를 김정일 서기실에 제출했다. 보고서는 “남조선 정부가 주도적으로 이번 교전을 ‘우발적 사태’로 몰아가는 만큼, 우리도 해군사령부 책임론으로 정세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보고서는 곧바로 김정일의 재가를 받았고, 이후 착착 실행됐다. 서해교전에서 사망해 돌아오지 못한 함장에 대한 영웅칭호는 1년이 넘어서야 발표했다. 또 해군사령부 차원에서 진행한 일이라 내막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서해함대 예하 8전대장을 해임하는 ‘쇼’를 연출하기도 했다.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군사간부 강연회에서는 “해군사령부가 독자적으로 이번 교전을 진행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비공개 자리에서 “6·15가 사실상 우리가 진 전쟁이었다면, 6·29는 사실상 우리가 이긴 전쟁”이라며 해군사령부를 치하했다. 서해교전 다음날에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조명록 차수를 비롯한 군의 최고수뇌부를 줄줄이 부상자들이 입원해 있는 조선인민군 제11호병원으로 병문안 보내기도 했다. 해임됐다던 8전대장 또한 1년 후 복직해 해군사령부 부학장으로 임명됐다.
서해교전 참전자들에게는 연평해전 전사자들보다 더 높은 국가훈장을 수여했다. 전사한 함장의 딸들은 현재 모두 만경대혁명열사유자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함장 본인은 서해함대의 상징으로, ‘공화국의 영웅남아’로 널리 선전되어 죽어서도 존경 받는 인물이 되었다.
북핵과 NLL의 공통점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0년대 김일성은 동유럽국가들을 상대로 서울에 가지 말라고 회유, 협박했고, 김정일은 1987년 KAL기 폭파테러 사건을 벌였다. 북한 경제를 급격히 몰락시킨 1989년 세계 제13차 청년학생축전도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고 능가해보겠다는 의도로 김정일이 국고를 털어가며 추진한 것이었다. 이렇듯 남한에서 진행되는 세계적인 행사에 대해 김정일은 항상 열등감을 느꼈다. 3호청사의 대외·대남공작부서들이 정상회담 이후 남북경제교류가 활성화되던 시기에 다시 서해교전을 준비한 첫 번째 이유는 이러한 김정일의 개인심리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연평해전 이후 남한 정부가 보인 무원칙적인 대응도 영향을 미쳤다. 3호청사의 두뇌진은 당초 계획보다 크게 번진 연평해전 결과를 분석하면서 반드시 후폭풍이 있을 거라 예상하고 그에 대처하기 위한 나름의 전술안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어떠한 응징도 가해오지 않았다. 이러한 대응이 김정일의 서해교전 결심에 촉매제로 작용했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두 차례에 걸친 서해상에서의 교전은 김정일의 직접 지시에 따라 노동당 관료들과 인민무력부, 해군 지휘관들이 치밀하게 준비, 진행한 작전이었다. 연평해전이 준비될 때만 해도 대외적인 효과보다는 주민들의 대남 적개심 강화라는 대내효과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두 차례 교전을 통해 북방한계선 문제는 북한 대남부서가 활용할 수 있는 강력한 협상카드로 확실하게 자리잡았다. 서해전선을 이용하여 바다에서는 위협을 가하고 육로를 통해서는 지원을 받아내는 식이다.
현재도 김정일은 통전부의 아태평화위원회를 내세워 경제협력과 대화를 끊임없이 진행하는 수법으로 육지에서 안정권을 구축하고, 바다에서는 “우리가 언제든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북방한계선 문제를 자위권 차원에서 계속 강조하라고 반복해서 지시한다. 등뒤의 손으로는 칼을 쥔 채 남북대화를 추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국제정치에서의 북핵 카드와 한반도 정치에서의 북방한계선 카드는 사실상 같은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꼼꼼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판단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남한 정부와 북한 전문가라는 이들은 계속 “우발적인 사건”이라거나 “해군사령부의 단독결정”이라고 말한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