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마도 여행에 동반자로 삼으면 좋을 책들.
대마도가 ‘뜬’ 까닭은…
부산에서 대마도까지 최단거리는 49.5km. 맑은 날이면 바다를 사이에 두고 부산 시내가 보인다는 이 섬에서 한국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스펀지’는 이런 재밌는 사실도 알려줬다. 대마도에서는 ‘친구’라는 한국말을 대마도 사투리로 안다. 대마도 사람들은 한국어를 배운 뒤에야 비로소 ‘친구’가 한국말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밖에 지게는 대마도에서도 ‘지게’, 바지는 ‘바찌’, 빨리빨리는 ‘파리파리’라고 한다. 어쩌다 비슷해진 것이 아니라 뿌리가 같은 말이다.
요즘 대마도는 한국인 관광객 모시기에 분주하다. 1999년 부산-대마도 직항노선이 개설된 뒤 관광객이 꾸준히 늘어 요즘은 전체 관광객의 90%가 한국인이라고 한다. 서울역에서 오전 6시에 출발하는 KTX를 타고 8시40분에 부산역에 내려 다시 택시로 5분 거리인 부산 국제여객터미널로 가서 10시30분 출항하는 페리를 타고 대마도 히타카쓰 항에 도착하니 딱 점심시간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깝다. 그래서 대마도에 처음 온 한국인은 “이렇게 가까운 대마도가 왜 일본땅이냐?”며 조상 탓을 한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하다. 일본열도를 축소해놓은 듯 남북으로 길게 뻗은 이 섬을 여행하다 보면 물리적인 거리뿐 아니라 심리적인 거리도 점점 짧아진다. 곳곳에 배어 있는 한국의 흔적 때문이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대마도와 한국의 역사적 교류 현장을 둘러보는 것이다. 상고시대부터 이 섬은 대륙의 문화가 일본열도로 전달되는 중간 기착지였다고 한다. 이곳에 남아 있는 신라불상, 고려불상, 범종, 박제상 순국비, 조선역관사비, 최익현 선생 순국비, 덕혜옹주 결혼기념비가 그 징표다. 그래서 대마도행 동반자로 ‘통신사를 따라 일본 에도시대를 가다’(정장식 지음, 고즈윈)를 골랐다.
‘통신사를 따라 일본 에도시대를 가다’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패권을 잡은 뒤 열두 차례 파견된 조선통신사의 궤적을 좇는다. 7년 전쟁의 통한을 생각하면 비록 적의 우두머리가 바뀌었다 해도 우호적인 교류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당시 조선에는 피로인(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을 가리키는 말) 쇄환(刷還)이라는 명분과, 성능이 우수한 일본 조총을 구입하는 실리가 있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초기 왜국이 자랑하는 ‘뎃포(鐵砲, 조총)’에 ‘무뎃뽀(無鐵砲)’로 덤벼들었다가 그 위력 앞에 맥없이 무너진 뼈아픈 경험을 한 바 있다.
지정학적으로 조선과 일본의 중간, 아니 조선쪽에 좀더 가까운 지점에 있던 대마도는 끊임없이 양국의 눈치를 보며 생존을 도모해야 했다. 대마도는 농토가 섬 전체의 1%밖에 되지 않아 가까운 조선에 의존하지 않고는 먹고 살기가 어려웠다. 이런 관계 때문에 조선과 일본 간에 전쟁이 일어나기를 원치 않았던 대마도주는 임진왜란 직전 히데요시의 침략 의도를 조선에 알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 이끄는 제1군에 참여하여 조선 침략의 선봉이 됐다.
박쥐 같은 신세의 대마도로선 왜란 후 조선과 일본의 국교 재개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국교 재개의 조건으로 “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내라”는 조선의 요구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받아들일 것 같지 않자 대마도는 국서를 위조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라며 조선에 보내는 대담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만큼 다급했던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