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들려준 한국의 기적 같은 경제발전 드라마는 내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1961년 1인당 국민소득이 82달러에 불과했던 나라가 1995년 소득 1만달러 시대에 접어들기까지의 스토리, ‘Korean Way’를 고집한 박정희 대통령의 굳은 의지와 리더십, 거대 재벌과 철강업체 포스코의 탄생 등 장 교수가 쏟아낸 한국 경제 얘기들은 충격적이었다.
국민의 돈은 주인 없는 돈?
그 길로 나는 도서관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책을 뒤지기 시작했고, 그의 말이 모두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한국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1년 뒤. 한강의 기적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이 소중한 운명을 나는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하준이 전한 성공 스토리가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서울 강남 테헤란로의 최신식 빌딩 앞에서, 기흥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나는 한국인의 자부심과 야망을 피부로 느끼면서 한국이 갈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음을 직감했다.
다시 1년 뒤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기 위해 또 한국을 찾았다. 한국에서 벌인 여러 프로젝트는 한국이 어떻게 하면 더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1997년 말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대선 주자들은 한결같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확언했지만 결국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말았다.
그 후 몇 달이 지났을까. 나는 한국 모델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당시 부도 위기에 몰린 한 대형 은행에서 컨설팅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중, 은행의 대출 관행에 대해 조사하게 됐다. 담당 부장은 “잘 모르겠으니 한번 알아보겠다”고만 대답했다. 모르겠다는 그의 말에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뒤늦게 안 것은 그 은행의 가장 큰 고객이던 3대 재벌 중 한 기업에 나간 대출액수가 은행 전체 자본금보다 많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다시 대출 과정에 대해 물어봤지만 역시 돌아온 대답은 모호했다. 알고 보니 대출을 결정하는 데 있어 재무 건전성이나 기업의 경쟁력은 문제가 아니었다. 해당 기업의 매출규모와 정부와의 유착 관계가 관건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점은 정부가 출자한 은행이었음에도 아무런 규제나 기준, 감시도 없이 국민의 돈을 아무렇게나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됐는가. 재벌 그룹의 평균 부채비율은 500%에 달했다. 수출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환율 변동에 대한 대책은 없어 환율이 급격하게 움직이면 번 돈을 속절없이 까먹어야 했다.
한국에서 체험한 한국의 개발 모델에는 몇 가지 중대한 결점이 있었다. 정부가 시장에 너무 깊숙이 개입했으며 재벌은 세력이 너무 커져 이미 ‘대마불사’가 됐다는 점이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힘을 갖게 된 노동자는 부의 재분배를 요구하며 임금을 꾸준히 높였다. 그 결과 임금상승률이 노동 생산성을 앞질렀고 생산성은 계속 악화됐다. 한국 모델은 현재를 가능케 한 과거의 모델이지 결코 미래를 제시하는 지속가능한 모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