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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31

평양 명기(名妓) 강명화 정사(情死) 사건

“살아서는 내외가 되고 죽어서는 연리지 되어…”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평양 명기(名妓) 강명화 정사(情死)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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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명기(名妓) 강명화 정사(情死) 사건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힌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로 강명화와 장병천을 꼽은 ‘동아일보’ 1936년 4월24일자 기사.

1907년 ‘확실이를 시골에서 기르면 속절없이 농민의 아내가 되겠다’고 염려한 윤씨는 평양 시내로 이주했다. 이주 후에도 강기덕은 가정을 돌보지 않은 채 제멋대로 돌아다녔고, 윤씨가 음식장사와 삯바느질을 해서 근근이 네 식구를 먹여 살렸다.

윤씨는 확실이라도 시집을 잘 보내 호강하며 살게 해주고 싶었으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고심한 끝에 가난뱅이에게 시집보내 자기처럼 살게 하느니 차라리 기생을 만드는 게 낫겠다고 결심한 윤씨는 일곱 살배기 어린 딸을 데리고 산호주라는 늙은 기생을 찾아갔다. 산호주는 확실이를 기안(妓案)에 입적시키고 춤과 노래를 가르쳤다. 확실이는 총명하고 영특해 다른 아이들이 열흘 배울 것을 2~3일이면 깨우쳤다.

1917년, 확실이가 기안에 이름을 올린 지 어느덧 10여 년이 흘렀다. 확실이는 평양 일대에서 미모면 미모, 가무면 가무, 모든 면에서 최고의 기생으로 성장했다. 하루는 확실이가 모친에게 말했다.

“어머니, 고기도 바다에서 놀아야 용이 되기가 쉽다고 사람도 큰 번화가에 가야 장래 희망도 있을 것이니 우리 서울로 올라가서 새로운 생활을 하여봅시다.”

윤씨는 남편을 평양에 남겨둔 채 확실이와 도선이 남매를 데리고 짐을 꾸려 서울로 이주했다. 크게 되려면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지만, 아는 사람이라곤 평양에서 함께 기생 노릇을 하던 김옥련뿐이었다. 확실이 가족은 아무런 기별도 없이 종로청년회관 뒤편 김옥련의 집으로 찾아갔다. 김옥련은 친구를 반갑게 맞으며 아랫방을 내주었다. 확실이는 김옥련의 주선으로 다동 대정권번(券番·기생조합)에 들어가 ‘명화’란 기명을 얻었다. 강명화의 미모와 가무 실력은 대정권번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그 후 명화의 이름이 화류계에 널리 퍼져 어느 모꼬지든지 한곳 빠짐없이 불려 다녔고, 어느 놀음놀이든지 명화가 없으면 흥미가 없다는 평판이 자자했다. ‘강명화’ ‘강명화’ 하는 소리가 오입쟁이 사회에 점점 높아가며 놀음판에 강명화를 부르려면 며칠 전에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치솟았다. 어제는 요릿집에서 밤을 새우고, 오늘은 동대문 밖 정자에서 해를 보내다가, 틈을 타서 집으로 돌아와 눈을 조금 붙이려면 대문밖에서 “명화 있나” 소리가 들리기 일쑤였다. 명화 집 대문 밖에는 일류 가는 부랑자떼가 줄줄이 늘어섰다. (1935년 영창서관에서 펴낸 ‘절세미인 강명화전’ 중 에서)


서울 화류계 최고 기생으로 몇 달을 보내자 은행통장에 수천원의 저금이 생겼다. 강명화는 전동에 깨끗한 집을 얻고, 평양에 남겨둔 아버지 강기덕도 서울로 불러 잡화상을 차려주었다. 서울에 올라올 때는 어린애 베개만한 괴나리봇짐 하나 달랑 메고 왔지만, 전동 집으로 이사할 때는 리어카로 십여 차례 실어 날라야 할 만큼 세간이 불어났다.

“얘 명화야, 돈벌이도 중요하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니 어미 보기에 뼈가 저리고 살이 아프다. 무리하다가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냐.”

윤씨가 측은한 마음에 쉬엄쉬엄 하라고 당부하면, 강명화가 도리어 어머니를 위로했다.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게을러서야 어디 돈 벌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저를 어여삐 여겨 마음먹고 부르는 손님을 한시라도 괄시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한번 흘러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 법. 제 몸이 아무리 괴롭다 하더라도 이런 때 돈을 벌어서 늙으신 부모님을 봉양하고 도선이 교육도 시켜놓아야 우리집 장래가 걱정 없지요.”

아무리 수입이 많아도 기생은 웃음을 파는 천한 직업이었다. 강명화는 영웅호걸까지는 안 바라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반듯한 남편을 만나 기생 노릇을 그만두고 싶었다. 혹시 손님 중에 쓸 만한 남편감이 없나 눈여겨 살펴보았지만 기생을 찾는 손님들이란 죄다 부랑자 아니면 타락자였다. 돈 많은 한량들이 인연을 맺자고 졸라도 강명화는 차갑게 거절했다.

1919년 늦봄, 며칠 동안 비가 내리다 오랜만에 화창하게 날이 갠 일요일 오후였다. 강명화는 요릿집의 부름도 거절하고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 한강으로 산보를 갔다. 서울생활 3년 동안 집안 형편은 몰라보게 나아졌지만, 마음은 늘 허전했다. 여자 나이 열아홉이면 남편 사랑받고 자식 재롱 보며 살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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