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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훈 시인의 작가 열전

‘그림자’ 씻고 열정에서 포용으로…전경린

“이 세상을 내 뱃속으로 지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원재훈 시인 whonjh@empal.com

‘그림자’ 씻고 열정에서 포용으로…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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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애소설을 가장 잘 쓰는 작가’ 전경린의 새 장편소설 ‘엄마의 집’은 그의 이전 작품세계와는 달라졌다. 처녀의식을 간직한 채 모성을 깨달은 그를 닮았다. 그래서일까. 최근 딸과 함께 인도를 여행하며 ‘영혼의 씻김’을 경험했다는 전경린(全鏡潾·46)은 전보다 훨씬 밝고 건강하고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그림자’ 씻고 열정에서 포용으로…전경린
경기도 파주 헤이리 예술인마을에는 큰 나무가 있다. 이 마을의 수백년 지킴이인데 그 모양이 기괴하게 휘어 있고, 혹덩어리 같은 큰 옹이가 가는 줄기에 붙어 있다. 나무 기둥은 썩어들어가 텅 비어 흡사 동굴 같다.

한때 그 안에 들어가서 놀곤 했다. 거기서 밖을 보면 동굴 속에서 세상을 보는 것 같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이 나무 동굴 안에서 무심히 지나갔다. 지금 와서 보니 이 나무 동굴은 부서진 건축물을 보수하듯 시멘트로 메워졌다. 오늘 만나기로 한 전경린에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내 기억 속의 한 장소가 봉인되었다. 그 나무 아래 벤치가 있어 그 후로도 가끔 머리가 복잡하면 여기에서 와서 쉬었다 가곤 했다. 이 나무 아래에서 나는 맹꽁이처럼 천천히 움직인다.

이곳은 나와 인연이 깊다. 헤이리 마을이 개발되기 전인 2000년부터 인근 마을인 통일동산에 둥지를 틀고 산 적이 있다. 그때 가끔 찾은 이곳엔 숲과 습지가 있고, 수리부엉이와 철새들과 청설모와 아이들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그 흔적이 많이 지워졌다. 이것이 사람들의 힘이다. 자연이 사라진 자리에 인공 건축물들이 아름답게 지어져 있다.

이곳 풍경을 사진으로 찍기 위해 돌아다니곤 했더랬다. 그때 딸아이가 사진장비를 들어주곤 했다. 대여섯 살 난 작은 아이가 사진 받침대를 낑낑대면서 들어 나른다. 아빠가 힘들까봐 그런다는 말을 듣고 감동해서, 살기 위해 겪어야 하는 굴욕적인 감정들이 눈 녹듯 녹았다. 그 모습이 지금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다. 그때 유치원생이던 딸아이를 수리부엉이가 잡아채갈까봐 하늘을 경계하곤 했다. 딸아이는 노란색 옷을 좋아해 하늘에서 보면 병아리처럼 보였을 것이다. 노란 옷을 입기 좋아하던 딸아이가 이제 중학생이고 숙녀가 되어간다. 이젠 수리부엉이 대신 더 무서운 세상 걱정을 해야 한다. 머나먼 하늘보다는 가까운 거리와 어두운 골목길을 사람 사는 일이 이렇다.

그런 시절이 바로 어제 같은데 이제 헤이리 마을은 파주 출판도시와 더불어 예술인들의 터전이 되었다. 이곳에서 머물던 나무의 영혼들은 나와 내 딸이 같이 머물던 시절의 이야기를 다 품고 있을 것이다.



수년 전 늦가을쯤이었던 것 같다. 마을 당나무 아래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쌍무지개가 떠올랐다. 내 손을 잡고 있던 딸아이는 무지개를 보면서 탄성을 지르곤 침묵했다. 딸아이의 눈동자에 쌍무지개가 들어갔다. 그 얼굴을 보고 나는 딸아이를 신뢰할 수 있었다. 어린 딸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응시하고 반응하는 모습을 영원히 잃지 않기를 기도했다. 나 역시 말없이 쌍무지개를 바라보았다. 그 무지개는 나와 딸아이의 보이지 않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불타는 검은 그림자의 음영

오후 3시. 헤이리 마을에 있는 방송인 황인용씨의 음악실 ‘카메라타’에서 소설가 전경린을 만나기로 한 나는 일부러 1시간 정도 먼저 와 오랜만에 이 마을을 산책했다. 그때 무지개가 걸려 있던 자리를 마을 당나무에서 다시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여전한데 내가 변한 것 같다.

음악실 카메라타를 배경으로 젊은 여자들이 사진을 찍는다. 일요일 오후의 헤이리 마을은 철새들이 날아든 습지처럼 부산스러웠다. 모두들 잠시 날개를 접고 쉬기 위해 이곳으로 날아든 철새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깃털을 가진 새들이 종종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전경린을 기다리는 시간은 풍요로웠고, 그 풍요로움은 모성이거나 여성성에 가까웠다. 나는 남성의 거칠고 황량함에 지쳐 이 세상이 빨리 풍만한 여성성을 획득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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