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호

재산분쟁 전문 박 철 판사가 들려주는 ‘따뜻한 법’ 이야기

“‘사랑’이라는 단어 지우고 판결하면 삶의 진실 놓칠 수 있어”

  • 이은영│신동아 객원기자 donga4587@hanmail.net│

    입력2009-01-07 16: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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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득력 있는 감동의 판결문 잘 쓰는 판사
    • 우리 국민 리걸 마인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 예상치 못한 사건 대비해 법의 뒷문 만들어둬야
    • 법 해석과 집행은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으로
    • ‘어머니 친권 박탈해달라’고 탄원서 제출한 딸
    • 불효했다고 증여취소소송 내는 부모
    • 현실과 동떨어진 법적 규제 많아
    • 벌금 10만원 낼래, 구류 30일 살래?
    재산분쟁 전문 박 철 판사가 들려주는 ‘따뜻한 법’ 이야기

    1959년 대구 출생 <br>서울대 법대 졸업, 제24회 사법시험 합격 <br>서울민사지방법원, 서울형사지방법원, 대구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 <br>현재 서울고등법원 민사10부 부장판사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검색어로 ‘박철 판사’를 치면 ‘아름다운 판결문’이라는 말이 주르르 화면을 장식한다. 양측의 첨예한 대립구도로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법정에서 박철(52) 판사는 판결문 한 줄에도 구구절절 아름다운 표현을 쓰기로 정평이 나 있다.

    법원가에서 아름다운 판결문의 계보로는 민문기 전 대법관, 이영모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 권성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 김용호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꼽힌다. 특히 권성 전 재판관은 풍부한 역사지식과 한학을 곁들인 판결문을 쓰기로 유명했는데,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해 내란목적 살인 등의 이유로 사형과 무기징역을 각각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는 항소심 판결문에서 “자고로 항장(降將)은 불살(不殺)이라 하였으니 공화(共和)를 위하여 감일등(減一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적어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권성 전 재판관의 판결문이 다소 현학적이라면, 박철 판사의 판결문은 설득력 있는 감동의 글로 통한다. ‘판결문’ 하면 문장은 길고 논리는 복잡하고 어휘는 전문적이어서 당사자조차 어렵고 지루하다고 하소연하는데, 박 판사의 판결문은 쉬운 어휘와 합리적이면서도 감성적인 문체가 특징이다. 재판 당사자들 사이에선 이른바 ‘설득의 판결문’으로 통한다.

    박 판사는 “법은 사법부와 사회의 의사소통 창구 노릇을 해야 한다”면서 ‘법학자는 진리를 추구하지만 법률가는 설득력에 관심을 둔다’는 미국의 마셜 전 대법원장 말을 인용했다. 판결문이 설득력을 잃을 경우 판결은 국민의 귀에 마치 외국어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왕의 아들, 거지의 아들



    기자는 박 판사를 만나기 위해 2008년 12월1일, 서울고등법원 민사10부 부장판사실을 찾았다. 170cm가 안 되는 작은 키에 수더분한 인상. 경상도 억양이 짙게 밴 말투는 차분했지만, 듣는 이가 속이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하지만 할 말은 끝까지 하고야 마는 끈질긴 스타일이었다.

    박 판사는 “법을 제대로 알아야 판결을 신뢰할 수 있다”면서 “우리나라 국민의 리걸 마인드(legal mind·법의식 수준)가 선진국에 비해 매우 낮고 가까운 일본에 비해서도 현저하게 낮다”고 걱정했다.

    “국민이 법과 법의 논리를 제대로 알 때, 그리고 판사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제대로 이해할 때 법원 판결에 대한 신뢰가 높아집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바로 우리나라 국민의 리걸 마인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건 달리 표현하면 ‘내가 성공하면 운수대통, 남이 하면 불법’이라는 말이거든요.”

    “길을 가다가 아들이 ‘경찰아저씨들이 왜 음주운전을 단속하는 거예요’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박 판사)

    “음주운전은 위험한 일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치거나 죽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경찰이 음주운전을 못하게 하는 거라고 말할 것 같아요.”(기자)

    박 판사는 “법률가라면 제 1감(感)으로 떠올리는 답이 ‘법에 음주운전을 금지하고 처벌하는 규정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 깊은 뜻을 설명하지 못하는 너무 간단한 대답인데요.

    “법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법률가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법률가라는 존재는 ‘왜’라는 질문에 대해 근본적인 답을 하지 않고 명령이나 금지의 근거만 말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법률가의 답은 근원적인 답입니다. 이런 질문을 함께 던져보면 알 수 있습니다. ‘흡연은 자신과 타인의 건강을 해치는데 왜 경찰관은 흡연자를 단속하지 않습니까?’ 답변이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법률가는 동일한 논리에 따라 쉽고 간단하게 답할 수 있습니다. ‘법률이 흡연을 금지하고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이에요. 논리와 사유방식에 큰 차이가 날 겁니다. 법률가와 대화하면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이유일 겁니다. (웃음)”

    ▼ 너무 딱딱한 답이네요.

    “법이 추구하는 합리성이에요. 모든 사안을 동일하게 풀어가기 위해 원칙을 만든 거죠. 법학에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가 절대 있을 수 없어요. 경제학자도 법대교수와 대화하기 어렵다고 해요. 경제학적 합리성은 보편적인 것이지만 법적 합리성은 법률가가 되기 전에는 접하기 힘들거든요. 경제적 합리성이나 정치적 합리성보다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을 거예요. 법이 추구하는 정의의 관념이 무엇인가.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면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고 할 수 있어요. 쉬운 예로 왕의 아들과 거지의 아들이 똑같이 도둑질을 했을 때 누구나 달리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재판에서 같은 결론을 내리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법학은 법적 판단을 할 때 고려해야 할 점을 정하고 그 밖의 사정은 참작하지 않도록 한 겁니다.”

    재산분쟁 전문 박 철 판사가 들려주는 ‘따뜻한 법’ 이야기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면허취소와 면허정지의 차이

    ▼ 현실적으로 왕의 아들과 거지의 아들에 대해 똑같은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겠네요.

    “뚜렷한 증거가 없다면 이런저런 이상한 논리를 갖다 대 왕의 아들은 잘못이 없는 쪽으로, 거지의 아들은 잘못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게 될 겁니다. 법률가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죠. ‘왕의 아들이냐 거지의 아들이냐’가 결론에 영향을 미쳐선 안 되죠. 하지만 실제로 그걸 완전히 무시하고 판결하기가 힘듭니다. 사건에는 다양한 사정이 얽혀 있거든요. 그래서 법은 가장 설득력 있는 사고방식을 추구해야 해요.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가 왜 눈을 가리고 오른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는지 아세요? 정의와 불의의 판정에 필요한 공평성을 상징하는 거예요. 부자인지 가난뱅이인지, 백인인지 흑인인지, 내국인인지 외국인인지 등 눈에 보이는 것들 때문에 판단을 흐리지 말고 저울로 달듯이 공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신상을 볼 때면 저는 이런 생각을 하곤 해요. 여신조차 눈을 가려야만 공정한 판단이 가능하다면, 보통 사람인 나로서는 얼마나 힘든 일인가.”

    ▼ 왕의 아들과 거지의 아들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다는 건 ‘무전유죄 유전무죄(無錢有罪有錢無罪 )’의 의미인가요.

    “무전유죄 유전무죄란 말에는 절대로 찬성하지 않아요. 다만 이런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형사재판에서 형량을 정할 때 재범의 위험성이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거든요. 통상적으로 안정된 가정과 직장을 가진 피고인은 재범의 위험성이 적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마치 무전유죄 유전무죄처럼 보일 거예요. 또 같은 처벌이라고 하더라도 고통의 정도가 달라질 수도 있어요. 왕의 아들과 거지의 아들에게 각각 벌금 100만원의 형을 선고하면 왕의 아들은 그다지 큰 고통을 받지 않지만 거지의 아들은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경우에도 무전유죄 유전무죄처럼 보일 것 같습니다.

    저는 법의 논리가 아닌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나 온정으로 차등적 대우를 일반화하는 데에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다만 관념화된 추상적 인간을 보는 게 아니라 현실세계에 사는 구체적 인간의 삶을 본다면 때로 차등을 인정하는 것이 법이 추구하는 목적에 더 부합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벌금 액수를 정할 때 피고의 경제적 형편을 고려해야 한다는 거죠.

    또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음주운전자에 대한 운전면허 취소건입니다. 중산층 이상의 시민에게 음주운전에 따른 운전면허 취소는 크거나 작은 불편을 의미할 뿐입니다. (하지만) 개인택시 운전사에게 운전면허 취소는 불편을 넘어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비번인 날 음주운전을 했다가 운전면허가 취소되어 가장 큰 재산인 개인택시 운송사업면허까지 취소되고 직업을 잃으면 경제파탄과 가정파탄에까지 이를 수 있어요. 음주운전은 분명히 잘못한 일이지만 경제파탄과 가정파탄에 이르게 할 정도의 잘못일까.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아요. 운전면허 취소로 감내하기 어려운 피해가 생긴다면 면허취소가 아니라 면허정지로 두 번째 기회를 주자는 겁니다.”

    박 판사는 “세상에는 예상하지 못한 온갖 일이 일어나는 걸 감안해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뒷문(back door)을 만들어둬야 한다”고 했다.

    “가끔 그 뒷문으로 빠져나가서는 안 될 사람이 빠져나가는 경우도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뒷문을 완전히 막아버리면 언젠가 그 뒷문을 이용해야 할 사람까지도 이용하지 못하게 될 수 있어요. 저는 뒷문을 만들되 아주 작게 만드는 정책에 찬성합니다.”

    ‘원고의 소장엔 찬바람이 일고…’

    박 판사는 ‘형사재판에서는 엄격한 판결을 하지만, 민사재판에서는 합리적이고 따뜻한 판결을 하는 법관’으로 알려져 있다.

    2007년 겨울. 70대 노인이 지방에 주택을 소유하고 있는 딸의 이름으로 임대아파트 계약을 해서 주택공사로부터 퇴거요청을 받은 일이 있는데, 이때 박 판사는 “법도 따뜻해야 할 때가 있다”면서 노인의 손을 들어주는 뜻밖의 판결로 법조계에서 화제가 됐다.

    “(노인은)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던 분이었어요. 아내는 시한부 인생이었지요. (노인은) 뇌성마비로 신체가 마비돼 누워 있는 아내 곁을 잠시도 떠날 수 없어 딸이 대신 아파트를 계약한 경우였어요.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딸의 이름으로 임대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대한주택공사가 분양을 거절한 것은 형식적으로만 본다면 법 규정에 맞는 정당한 조치였습니다. 임대아파트는 5년이 지나면 분양을 받을 수 있지만 노인은 분양을 원하지 않았어요. 죽을 때까지 그 집에서 임대로 계속 살기를 원했어요. 법원에서도 임대를 계속하는 방안으로 조정을 모색하였지만 대한주택공사는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거절했어요. 사건의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은 딸이 자신의 돈으로 임대계약을 체결하고 부동산 가격이 오르자 분양받아 재산상 이익을 취할 생각에서 거짓말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할 겁니다. 판사도 의심을 하면서 심리를 했어요.

    대한주택공사는 관료적인 업무처리 관행을 갖고 있습니다. 당시 딸이 주택공사에 찾아갔더니 까다로운 서류를 요구하면서 아버지 이름이 아닌 본인 이름으로 임대계약을 체결하면 당일 곧바로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노인이 재산상 이득을 얻기 위해 소송을 걸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은 그 사건에서는 옳은 것이 아닙니다. 이 판결을 갖고 ‘아름다운 판결’이라고들 하던데 진짜 아름다운 생각을 담고 있는 것은 그 판결에 적용된 ‘임대주택법’이에요.

    (임대주택법은) 서민의 주거 안정을 위해 만들어진 법입니다. 노인은 75세였어요.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는 분입니다. 10년 동안 부인의 병수발을 들었고 딸한테 마음 편하게 몸을 의탁할 만큼 넉넉하지 않았어요. 집을 구하러 다니는 것도, 이사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임대주택법은 바로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정된 임대주택을 제공하려고 만든 따뜻한 법입니다. 저는 법의 취지와 목적에 따라 판단했을 뿐입니다.”

    당시 박 판사가 법정에서 읽었던 판결문은 지금도 법원 주변에서 회자된다.

    ‘가을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엔 빨간 감이 익어간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의 입가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바라보는 아낙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옷이 안 맞으면 수선해줘야”

    ▼ 판결문이 시(詩) 같습니다.

    “나름대로 멋을 부려본 겁니다. (판사는) 매일 책상에 앉아서 판결 쓰는 게 직업이다 보니 때로는 판결에 멋을 부려보고 싶어지곤 합니다. 그 판결을 쓸 무렵 퇴근 후 대전에 있는 도솔산에 올라 구상했어요. 산 위에서 가을 들판을 바라보니 그런 시적인 표현이 떠올랐어요. 사실 이 판결에서 제가 정성을 쏟은 것은 그 대목이 아닙니다. 가장 세심하고 사려 깊은 사람도 세상사를 모두 예상하고 대비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가장 사려 깊고 조심스럽게 만들어진 법도 세상사 모든 사안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의 지침을 제공하기는 어렵습니다.

    법은 장래에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사건을 예상하고 미리 해결방안을 만들어두는 일종의 기성복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다양한 치수의 옷을 만들어두어도 예상을 넘어 팔이 더 길거나 짧은 사람이 나오게 마련이지요. 미리 만들어둔 옷에 맞지 않다고 해서 ‘당신의 팔이 너무 길거나 짧은 것은 당신의 잘못이니 당신에게 줄 옷은 없다’고 말해선 안 됩니다. 다소 번거롭더라도 옷의 길이를 조금 늘이거나 줄여 수선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판사들은) 입법부가 만든 법률을 최종적으로 해석하고 집행하는 법원이 어느 정도 수선의 의무와 권한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회가 만든 법률을 제멋대로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률이 본래의 의미를 갖도록 보완하는 것이고 대한민국헌법이 예정하고 있는 우리 헌법체제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거죠.”

    재산분쟁 전문 박 철 판사가 들려주는 ‘따뜻한 법’ 이야기

    2008년 11월11일 ‘한 부모 가정 자녀를 걱정하는 진실 모임’ 회원들이 조성민의 친권회복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음주단속을 왜 하는지를 설명할 땐 법의 원칙을 강조하셨는데, 지금은 법적 논리에서 멀어진 것 같습니다. 부모상을 당한 상주가 장례식장 근처에서 잠깐 음주운전을 했다면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 봐줘야 할까요?

    “판사는 법 논리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거죠. 논리에 집착하면 정의가 더 멀어질 수 있어요. 법은 기계적이고 수학적인 논리로만 해석해선 안 됩니다. 논리라는 것이 인간의 사고를 올바른 쪽으로 이끌어가는 것이지만 이상한 논리도 만들어질 수 있는 거예요. 법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가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법은 전문화된 상식이어야 하는 거죠. 많은 사람이 옳다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게 법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원칙과 논리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학의 법률가들은 아카데미컬한 법의 이상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법관은 달라야 해요. 설득력을 요구해요. 어떤 결론이든지 편견 없이 설득할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저는 고등법원에 와서 음주운전으로 운전면허를 취소당하고 생계수단인 개인택시운송사업면허까지 취소당하는 사건에서 온정을 주장하는 판사와 법대로 재판해야 한다는 판사의 대립적인 견해가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언론은 한발 더 나아가서 음주운전자를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범이나 살인미수범 정도로 보면서 음주운전자에 대해 적의를 감추지 않기도 해요. 솔직히 판사로서 온정보다는 일관된 원칙을 따르는 것이 더 좋은지, 아니면 불쌍한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풀기 위해 원칙을 다소 희생시키는 것이 좋은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어요.”

    친권 분쟁에서 중요한 건 자녀의 복리

    최근 고(故) 최진실의 전 남편 조성민씨와 동생인 최진영씨 사이에 벌어진 친권 다툼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았다.

    재산분쟁 전문 박 철 판사가 들려주는 ‘따뜻한 법’ 이야기
    “최근 시민단체들의 친권법 개정 촉구가 빗발치지만 사실관계를 모르면서 입방아를 찧어선 안 됩니다. 저로서는 그들 사이의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어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모든 문제는 관점이 다르면 진실이 달라질 수 있고 견해도 달라지는 법입니다. 원기둥을 정면에서 보면 직사각형이지만 위에서 보면 원이듯이 진실이 하나밖에 없다고 고집 피우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요. 공적 문제에 대해 여러 사람의 의견이 모이면 아무래도 합리적일 수 있겠죠. 하지만 법관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합리성에 귀를 기울여야 해요. 어떤 의견이 합리적인지 아닌지를 봐야지, 얼마나 시끄럽고 거칠게 말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가장 중요한 것이 자녀의 복리입니다.

    제가 대법원에서 일할 때 이와 비슷한 사건을 겪었습니다. 친할머니와 큰아버지가 며느리의 친권을 박탈해달라는 소송이었어요. 사건의 내막이 이렇습니다. 아버지가 말기암 진단을 받아 투병생활에 들어갔죠. 자식이 둘인데, 엄마는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갔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인 딸이 아버지를 병간호하고 동생의 도시락을 싸줬어요. 1년쯤 지나 어머니가 이혼을 하자고 소장을 냈어요. 애들은 아버지가 키우라면서. 그 아버지가 소장을 받고선 펄펄 뛰면서 반소(反訴)를 냈어요. 이혼 못 해주겠다는 거였죠. 딸이 이런 과정을 지켜보았어요.

    1년 후 이혼소송 중에 아버지는 사망했고 보험금(보상금)이 나왔습니다. 그제야 어머니는 자식 둘을 자신이 키워야겠다고 나서며 친권을 주장했어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어요. 살기가 어려워 집을 나온 만큼 애들을 키울 수 없어 남편에게 맡겼는데 남편이 죽었으니 자식을 키워야겠다는 거죠. 두 번째는 애들 앞으로 나온 돈 때문입니다. 법원은 그래도 애들에게는 제일 나은 보호자가 어머니일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딸은 달랐습니다. 딸이 어머니와 못 살겠다고 탄원서를 제출한 거죠. 죽어가는 아버지 옆에서 동생을 돌본 딸은 어머니가 어떻게 했는지 다 적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가장 힘들 때 자식들을 버렸고, 그렇게 애원해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었어요. 어머니와 신뢰관계가 깨진 사연을 낱낱이 적었고 직접 겪지 않으면 적지 못할 상세한 내용까지 적어냈습니다. 대법원에까지 탄원서가 올라갔더군요.”

    ▼ 대법원은 어머니의 친권을 인정했나요.

    “네. 대법원은 어머니의 양육이 자녀의 최대한의 복리에 부합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저는 그 사건에서 자녀의 최대한의 복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친권상실 사건에서 판단의 기준은 ‘자녀의 최대한의 복리’이고, 법원은 후견적 기능을 수행합니다. 그렇다면 ‘자녀의 최대한의 복리가 판단기준이라면 자녀의 말을 들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 딸의 말이 친할머니나 어머니에 대한 주변의 비난에 의해 오염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탄원서를 읽어보면 어머니에 대해 정서적 관계와 신뢰관계가 무너진 과정을 설득력 있게 담고 있었어요. 저는 판사가 직접 그 딸의 말을 들어보고, 담임선생의 의견도 들어본 후 판단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딸이 미성년자라 해도 판사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법원은 절차적 권리 인정에 좀 소극적인 것 같아요.”

    퇴직금·임금 소송이 가장 많아

    최근 민사재판은 ‘세상은 요지경’이란 말을 실감케 한다. 민사소액재판에서부터 각종 손해배상청구소송과 재산싸움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인간군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경기침체로 ‘2000만원 이하’를 다루는 민사소액재판 법정은 발 디딜 틈도 없다.

    2008년 1월부터 10월까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접수된 민사소액재판만 하더라도 21만73건에 달할 정도다. 법원은 이를 감당하지 못해 담당재판부를 16개부에서 20개부로 늘렸다.

    임금이나 퇴직금을 받지 못한 근로자, 장사가 어려워져 물품대금을 받지 못한 자영업자, 은행과 카드빚을 갚지 못한 서민…. 그중 퇴직금과 임금을 받지 못해 제기한 소송이 가장 많다. 돈 대신 재산이라도 가져가려는 압류 및 추심 신청건수가 전년 대비 44.7% 늘었다.

    사태가 이렇다 보니 재테크 수단으로 호황을 누렸던 경매시장에서도 찬바람이 불고 있다. 내놓아도 낙찰이 되지 않기 때문. 경매 처리 건수가 22.2% 줄어든 상태. 법원은 경매담당 파트를 12계에서 10계로 줄여서 운영하고 있다.

    ▼ 고소고발 건수가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은 편이지요.

    “월등히 많아요. 일본 사람들은 남한테 모진 일을 하기 싫어해 범죄신고만 합니다. 범죄신고만 해도 고소고발처럼 다뤄요. 어떻게 처리되었다는 걸 통보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범죄신고에 대해 그렇게 안 해줍니다. 또 변호사 숫자가 대폭 늘어난 것도 소송이 늘어나는 데 한몫해요. 고소를 부추기는 게 아닌가 싶어요.”

    ▼ 최근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은 뒤 생활비를 제대로 주지 않았다면 물려받은 땅을 다시 아버지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와서 화제가 되었어요. 불효하면 물려준 재산도 돌려받을 수 있는 건가요?

    “증여취소처분입니다. 민법 556조 2호에 증여자에 대해 부양의무가 있는 경우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그 증여를 해지할 수 있다는 법 규정이 있어요.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봐야 합니다. 판사가 그런 종류의 소송에서 일반적인 견해를 가질 수는 없어요. 매우 다양해요. 요즘 젊은이가 예전보다 불효한다고 단정할 수야 없겠지만, 노후에 생활할 재산은 물려주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웃음)”

    ▼ 민사재판은 한쪽은 이익을 보지만 한쪽은 손해를 봐야 하잖습니까. 재산을 얻는 쪽과 뺏기는 쪽이 있으니 조정이 힘들 것 같아요.

    “(민사재판에서) 강요하는 걸로 비칠까 두려워 잘 못하겠더라고요. 조정과 화해는 두루뭉술하게 해야 하는데 정말 어려워요. 적당한 비율로 이익과 부담을 나눠가지게 해야 하잖아요. 당사자들이 받아들이면 좋지만 만족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수학 계산처럼 법적인 판결을 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법정에서 원고와 피고 모두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는 것에 대해 참 고마워해요. 그런 걸 보면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번은 이런 사건을 재판했어요. 동네 미용실에서 업그레이드 차원에서 남자 미용사를 스카우트하면서 계약서에 ‘계약기간 내에 나가면 반경 얼마 안에 개업할 수 없다’고 썼어요. (미용실의) 장사가 잘 되었어요. 스카우트된 남자 미용사가 봉급만 받고 일하려니 욕심이 생겨 인근에 미장원을 차렸어요. 주인 처지에선 계약위반이죠. (주인은) 남자 미용사가 영업하지 못하게 하는 손해배상청구를 했어요. 주인은 올바른 권리를 행사한 거예요. 이 상황에서 판사는 어떻게 조정을 해야 하는가. 이미 차린 미용실을 누군가에게 되판다면 그 사람도 미용실을 할 가능성이 큽니다. 미용실 시설이 있으니까요. 주인으로선 어차피 경쟁자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미 경쟁자가 생긴 상태죠. 반면 피고는 소송에서 지면 완전히 망합니다. 미용실 차린다고 투자한 돈이 상당할 것 아닙니까. 원고(주인)의 청구를 법원이 받아들이면 둘 다 패자입니다. 법대로 하면 계약위반이 분명하니까요. 제가 주인에게 어차피 앞에 경쟁자가 생겨서 수입을 나눠 갖게 되었으니 장사는 그냥 하게 하고 대신 남자 미용사에게는 매달 얼마씩 주인에게 돈을 주라고 조정했어요.”

    금액 클수록 거짓말 심해

    ▼ 우리나라는 계약서 쓰고 나서 공증과정을 거치는 것에 익숙하지 않지요?

    “그런 편이지요. 프랑스 같은 나라는 반드시 공증을 거쳐요. 예술의 나라, 감수성의 나라인 프랑스가 공증을 가장 좋아해요. 사실 구두계약도 법적으로 인정될 수는 있지만 입증하기가 힘들어요. 녹음이 되었다면 다행이고요.”

    ▼ 재산문제를 다루는 민사재판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 같아요.

    “인간성을 판단하기는 어려워요. 금액이 큰 사건일수록 거짓말도 심하죠. 뇌물사건이 좋은 예죠. 인간의 습성이랄까요. 돈도 돈이지만 이기고 지는 것에 사활을 거니 정말 합의가 힘들어요. 자꾸 돈 이상의 심리적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판사 초임 때 이런 걸 지켜보면서 인간에 대한 실망이 컸어요. 하지만 소액재판을 맡으면서 달라졌습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계기가 됐지요. (소액재판에서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잘 못해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건 옛말이고 돈이 피보다 더 진한 게 아닐까. 부모의 상속재산이나 가족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기업의 경영권을 놓고 형제자매끼리 치열한 혈투를 벌이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닐 것이다. 재벌도 예외가 아니다. 내로라는 재벌들의 집안싸움이 법정으로 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 재벌가에서 재산을 놓고 가족 간에 분쟁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지요?

    “그렇죠. 재벌들은 회사의 경영권 문제나 주식 귀속 문제로 다투더라고요. 요즘은 아내들이 부를 축척해나가는 과정에 자신의 몫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재산을 두고 민사소송을 해요. 기업인은 다음 세대에 기업이 쪼개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 아직까지도 첫째에게 넘기는 게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딸과 사위에게 재산을 나눠주는 걸 꺼려요. 반면 어머니는 두 마음이더군요. 딸 몫을 챙겨주는 어머니 때문에 소송이 벌어지는 경우가 부쩍 늘었어요. 재산이 많든 적든 부모의 상속재산을 더 차지하기 위해 형제자매가 법정까지 오는 일이 많아요.”

    ▼ 예전에는 정치인을 두고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너도나도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다고 표현해요. 불법 탈법 편법 없이는 돈을 벌 수 없다고들 합니다. 한편에서는 법이 현실을 너무 무시한다고 볼멘소리를 해요.

    “그런 점도 없진 않습니다. 간단한 예로 도서대여점을 들 수 있어요. 199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만화방이 있었어요. 그런데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 정부가 만화방을 규제하기 시작했어요. 책상이 너무 낮아 허리가 굽는 걸 방지하기 위해 의자를 규제했어요. 눈 보호를 위해 전구 밝기가 일정 조도 이상 되어야 한다고 명시했어요. 간혹 담배를 피우는 청소년이나 어른이 있기 때문에 환기시설도 통제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만화방에서 쭈그리고 앉아 만화를 읽는 아동이 거의 없어요. 더는 만화방에 가지 않는 거죠.

    대신 도서대여점에 갑니다. 도서대여점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작은 면적에 미닫이를 만들어 많은 책을 꽂아놓고 있습니다. 소파도 없고 환기시설도 없어요. 만약 도서대여점에 대해 만화방과 같은 규제를 적용하면 면적도 위반했고 환기시설도 위반했고 소파 규정도 위반했어요. 세월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법이 규제를 변경하거나 폐지하지 않은 거죠. 도서대여점 사장들은 자기가 하는 영업이 ‘만화방 영업’이란 걸 모르고 있어요.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세요. 다들 ‘도서대여점은 만화방이 아니다’라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규정을 어긴 도서대여점은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있어요. 대법원에서도 마찬가지고요.”

    문제 많은 특별사면

    ▼ 법이 시대 흐름에 맞게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는 건가요?

    “그렇죠. 법이라는 건 효과를 위해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겁니다. 만화방에 대한 네가지 규제는 어린이의 건강을 위해 만들었어요. 건강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규제를 두는 것이지, 규제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만화방 규제를 도서대여점에도 그대로 적용한다면 목적달성을 위한 편익이 없어요. 우리 사회가 이루고자 하는 이익이 없는 겁니다. 법이 본래 가졌던 목적 이상으로 자유를 제한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겁니다.”

    ▼ 법이 시대의 흐름을 쫓아오지 못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규제가 시대와 너무 안 맞으니 아예 법을 안 지키겠다고 작정하는 게 아닐까요?

    “법을 어기는 것이 돈을 벌기에 더 유리할지 모릅니다. 남은 다 지키는데 자기만 혼자 어기면 엄청난 혜택을 받겠죠. 적발만 안 된다면. 하지만 사회 전체로 봐선 법치주의가 잘 돌아가면 더 부유해질 수 있어요. 어떤 사람들이 법을 어겨 부자가 된다면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벌어야 할 돈을 뺏어가는 게 돼요. 법치주의를 통해 협력이 잘 되어야 전체 파이가 커지고 그 파이를 나눠 가질 수 있어요.”

    박 판사는 “사람들 사이에 사회적 신뢰가 쌓이게 하는 건 언론의 임무”라고 했다.

    “사회신뢰도 기본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대단히 낮습니다. 일본처럼 법을 잘 지키는 나라보다 낮은 건 물론이고 북유럽이나 다민족국가인 미국보다도 낮아요. ‘다른 사람은 법을 지키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거죠. 부정적 기사를 읽으면서 불신이 더 깊어질 수 있어요. 부정적 기사가 많을수록 신뢰도가 낮아지는데, 우리나라는 부정적 기사가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은 편입니다. 그런 뉴스를 보면서 법을 지키는 게 바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재산분쟁 전문 박 철 판사가 들려주는 ‘따뜻한 법’ 이야기

    2005년 7월 참여연대는 열린우리당의 부패정치인 특별사면 건의에 반대하며 효자동 구 합동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 ‘코리아타임스’ 2008년 8월15일자에 이런 사설이 실렸습니다. ‘8·15 특사로 기업인들을 내보냈는데, 한국이 일제시대에 고위계층의 비리로 인해 일본의 식민지가 된 나라다. 그런데 그 독립기념일에 고위계층의 비리를 사면한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왜 하필 그날인가.’ 판사님은 “법 안 지키는 고위층이 법치의 걸림돌”이라고 말하는 분 아닙니까.

    “그렇진 않아요. 우리의 생각 속에 불신이 깊어서 그렇지, 저는 고위층이 법을 더 잘 지키는 것으로 봐요. 하지만 지금의 특별사면은 저뿐 아니라 모든 판사가 반대할 겁니다. 가석방과는 달라요. 법의 심판이 응보형이던 예전엔 정해진 형량을 채워야만 석방됐어요. 이제는 교육형, 정리형이거든요. 형을 정할 당시 그 사람이 교화되는 데 얼마나 걸릴지 예측할 수 없으니 형의 상한만 정하죠. 교정을 담당하는 쪽에서 교화의 정도를 지켜봅니다. 그게 가석방의 취지입니다. 사면은 달라요. 일반사면은 의회의 동의를 거쳐야 하니 주로 특별사면을 하죠. 지금같이 이뤄지는 사면에 공감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지 않겠다”

    박 판사는 이례적인 판결을 과감하게 내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간통 혐의로 고소당한 사람은 대체로 구속한다. 그런데 그는 2006년에 이런 구속기준을 깨뜨렸다. 그는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도주의 우려가 없고 피의자의 간통이 가정파탄의 원인인지, 가정파탄이 간통의 원인인지 분명치 않다”고 했다. 이어 “가정이 복원되지 않더라도 피의자가 어린 아들에 대한 양육의 책임을 져야 하므로 피의자의 구속은 경제적 면에서 피의자 가정 구성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면서 “아버지를 잃을 위기에 처한 어린 아들의 상실감에 대한 이 사회와 국가의 무뚝뚝하고 차가운 응답이 아니라 관심과 동정과 공감의 마음에서 내린 고심의 결론”이라고 불구속 사유를 밝혔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딸을 강제추행하고 그걸 말리는 아내를 존속폭행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재판 중에 아내가 고소를 취하했어요. 두 가지 범죄 모두 친고죄라 고소를 취하하면 재판할 필요가 없죠. 그런데 생각을 해 봤어요. 석방하면 또다시 딸을 추행할 것이며 어머니는 맞을 겁니다. 위험한 상태였어요.

    저는 바로 석방하지 말고 검찰이 아동학대죄로 공소장을 변경하라고 요구했어요. (검찰이) 당연히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구금상태를 유지했어요. 그런데 검찰에서 돌아온 답변이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지 않겠다’였어요. 공소장을 변경하지 않겠다는 얘기죠. 제가 공소기각결정문에 ‘아동보호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의 의무사항’이라고 적었어요. 공소기각 하는 사건에서는 이례적으로 길게 적었죠.”

    박 판사는 “20년간 판결했지만 여전히 어렵다”면서 “(하지만) 판사는 법원을 대신해 특별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법을 통상적인 문구로 해석하면 결론이 하나입니다. 하지만 판사는 판례가 바뀔 정도로 고민해야 합니다. 통상적인 것보다는 비상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지요. 최선을 다해 논증하는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저는 ‘봉사한다’는 생각 없이는 판사 하기가 어렵다고 봅니다. 판사 생활이 화려하지 않거든요. 권력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큰 경제적 보상이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한다면 올바른 판사가 아니겠지요. 주어진 권력을 책임으로 느끼니 마음이 늘 무거워요. 저도 오판이 없었다고 자신할 수는 없어요. 초임 시절 자신 있게 유죄를 선고한 사건이 대법원에서 뒤집혔을 때 처음으로 판사 옷을 벗으려 마음먹었어요. 오죽하면 대법관이 퇴임사에서 ‘제 오판으로 고통 받았을 많은 분께 사죄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제게도 가슴을 찌르는 한마디였어요. 판사가 ‘절대 속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재판하다가는 되레 속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해요.”

    그가 기자에게 불현듯 질문을 던졌다.

    “유치장에서 구류 30일 사시겠어요, 벌금 10만원을 내시겠어요?” (박 판사)

    “벌금 10만원을 내겠습니다.” (기자)

    “(형법에 의하면) 벌금 10만원이 구류 30일보다 더 무겁습니다. 죄를 인정하는 것이니.”

    “그래도 전 10만원 내지 유치장에 가고 싶진 않아요.” (기자)

    박 판사는 “나도 벌금 10만원을 내는 쪽을 선택할 것 같다”고 했다.

    “누구나 즉결이나 약식명령, 1심 형사재판에 대해 불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불복했다가 괘씸죄로 더 무거운 형을 선고받지 않을까 두려울 수도 있죠. 그래서 법은 ‘불이익변경 금지의 원칙’을 두어 피고인만 불복했을 때(검찰이 항소하지 않은 경우) 더 무거운 형을 선고할 수 없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벌금 10만원이 구류 30일보다 더 무거운 형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법률가 외에는 없을 거예요.”

    “죽은 사람과도 대화해야”

    박 판사는 “상식과 동떨어진 결론을 내려놓고 이것이 법이라고 우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사법연수원 교수 시절 연수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하였습니다. 초등학생인 딸이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가족의 생활은 되돌아갈 수 없도록 변했어요. 식물인간이 된 딸의 욕창 방지를 위해 두 시간마다 몸을 뒤집어주어야 했습니다. 24시간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다가도 두 시간마다 일어나 뒤집어주고 안마를 해주었어요. 가족의 정신적 상처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는데도 딸은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딸의 친구들은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이제 딸과 이별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딸에게 연결된 인공호흡기를 떼었고 딸은 죽었습니다. 검사가 그 아버지를 살인죄로 기소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유죄입니까, 무죄입니까?”

    기자는 답변을 못했다. 그의 얘기가 계속됐다.

    “사법연수생은 안락사에 대한 여러 이론을 잘 알고 있어요. 대체로 안락사에 대한 여러 쟁점과 견해를 언급한 다음 유죄라고 답합니다. 이 경우 학점을 준다면 B정도죠. 진지한 고민을 담은 자신의 생각이 없다는 점에서 실망스러운 답입니다. 그 가족이 보낸 10년 세월의 의미를 ‘적극적 안락사’니 ‘소극적 안락사’니 하는 학문적 용어만으로 표현할 수 없어요.

    연수원생들은 4년간 법대에 다니면서 교실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을 겁니다. 저도 그랬어요. 제가 대학 강단에 섰는데, 학생이 ‘사랑’이라는 개념을 들어 논증하려 한다면, 사랑의 개념이 무엇인지, 사랑을 정의하는 내적 요소가 무엇이고 사랑의 개념이 미치는 외적 범위가 무엇인지를 따져 묻고, 그런 불명확한 개념을 들어 ‘법학이 요구하는 논리적 엄밀성을 양보하지 말라’고 가르칠 겁니다.

    판사로서 아직까지 ‘사랑’이라는 개념을 논증의 도구로 삼았던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불명확성이 두려워 ‘사랑’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판결한다면 때로 삶의 진실을 파악할 수단을 잃어버릴 수 있어요.

    만일 딸이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대답할 겁니까? ‘지난 10년 동안 제 생명에 관심을 두고 사랑으로 보살펴주신 분은 부모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국가는 무엇 하고 있다가 이제야 제 생명의 보호자로 자처하고 나타나 그동안 저를 보살펴주신 제 아버지를 살인자라고 말합니까? 국가가 그럴 권리가 있습니까? 저는 아버지의 처벌을 원치 않습니다.’

    이 질문을 하면 연수원생들이 일단 말문이 막힙니다. 많은 연수원생이 ‘아버지의 행위는 반의사불벌죄에 해당되지 않고 안락사를 원하는 것이 딸의 진정한 추정적 의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답할 겁니다. 만약 제게 ‘법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법은 사랑이다’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법을 공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연수원생들에게 ‘역사가는 암벽에 새겨진 마애석불을 바라보면서 그 마애석불을 새긴 수백년 전의 고려인과 교감하고 소통하고자 합니다. 당신은 죽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그 딸과 교감하기 위해 노력해보았습니까? 그런 노력을 해보지 않은 채 그 딸의 추정적 의사를 논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고 싶어요. 판사가 유연한 사고를 가지지 못하면 법과 국민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어요. 삶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애쓴 판결이라야 국민에게 존중받을 수 있어요. 법은 국민을 통합하는 데 이바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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