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글쎄요…. 내 모든 것이라고 말하면 너무 쉬운 것 같고…. 나무가 있음으로 제가 있으니 나무가 분명 제게 많은 걸 준 것이긴 한데…. 나무는 내 길이고, 생활이고 그래요. 난 나무 없으면 할 게 없어요. 그래서 나무만 붙잡고 살았지.”
박명배(58), 그는 나무 덕에 평생을 청춘처럼 산다. 1968년 소목(小木)에 입문해 40년을 하루같이 나무와 벗했기 때문인지 얼굴색이 나무처럼 싱싱하다.
그는 목수다. 목수는 건물을 짓는 대목장과 건물 안 가구를 만드는 소목장으로 나뉘는데, 박명배는 전통한옥에 걸맞은 가구를 만든다. 장, 농, 의걸이장, 3층장, 단층장, 경대, 혼수함, 반닫이 같은 안방가구부터 사방탁자, 문갑, 서안, 책장, 책탁자, 머릿장 같은 사랑방가구까지. 주방가구도 빠뜨리지 않는다.
나무는 켜봐야 안다
“전통가구를 한다고 해서 무작정 옛것만 흉내 내는 건 아니에요. 전통을 복원하지만 어떤 나무를 앉힐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 고르는 게 중요하다고들 하지요.”
전통가구에서 나름의 특색이 느껴지는 건 만든 이가 저마다 다른 나무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박명배의 특색은 결이 살아 있는 나무를 고른다는 데 있다.
“좋은 전통가구를 만들려면 무엇보다 나무가 좋아야 합니다. 목가구의 아름다움을 살리려면 나무 본연의 아름다움을 활용하는 게 제일 좋지요. 갈라지지 않고 고유의 문양이 잘 나타난 게 좋은 나무입니다.”
자연의 변화무쌍함이 잘 나타난 나무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러나 좋은 나무 만나는 건 좋은 배필 만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알판 나무 찾기 위해서 전국을 다 다녀요. 다니다 보니 ‘어디는 뭐가 좋다’ 정도는 알게 되지요. 전라도는 느티나무가 좋다, 강원도는 피나무가 좋다, 경상도는 참죽나무가 좋다…. 그렇지만 좋은 나무를 손에 넣는 건 여전히 어렵습니다.”
전통 목가구를 만들기 위해선 300~500년 된 나무를 써야 한다. 값이 비싼 건 당연하다. 그러나 베지 않은 나무는 켠 나무의 1/3 값에 살 수 있다. 제재소 나무가 900만원이라면 산에 있는 나무는 300만원인 셈이다. 그러니 산에서 나무를 고른 뒤 그 자리에서 켜는 게 낫다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위험부담이다.
“옛날엔 무작정 다 켜봤던 것 같아. 300만원 전세 살 때였는데 350만원 주고 나무를 베기로 했어요. 싸다는 유혹에 넘어가 나무를 벤 거지. 근데 정작 해보니 쓸 게 없는 거야. 2부 이자 주고 나무 값을 치른 건데 그 자리에서 그 돈 다 날렸어요. 지금 생각해도 답답한 일이죠.
몇 년 전 제자들이랑 나무 사러 간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도 정말 마음에 드는 나무를 만나 700만원 주고 사 갖고, 200만원 (베는 비용) 주고 나무를 켰어요. 그런데 나무 속이 갈라져 있는 거라… 남는 게 없었지요. 그 자리에서 900만원 고스란히 날렸지. 그 허탈감은 말로 못해요. 목상(木商)도 켜보지 않으면 나무에 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는데 괜한 일을 했던 거지, 뭐. 나름 통계를 내보니까 나무 켜서 성공할 확률은 20%도 안 되더라고. 내가 참 바보스러웠지.”
그가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건 ‘화수분 아내’ 덕택이다.
“목돈 들어가고 푼돈 나오는 직업 가진 남편을 묵묵히 받아줬어요. 돈 없다면 어디서 잘도 구해다주고. 미안하지만 어떡하겠어요. 이게 내 일인 걸.”
출렁이는 산맥을 담다
이제는 돈이 좀 들더라도 제재소에서 나무를 사니 돈 버리는 일은 줄었다. 제재소 주인들과 안면 트고 지내다 보니 좋은 나무를 구하기도 한다. 전라도 담양의 제재소에서 ‘평생 만나볼까 말까 한 나무’를 사올 수 있었던 것도 오랜 친분 덕택이다.
그렇다고 ‘직업병’이 없어진 건 아니다. 산에 가서 나무 사는 일이 드문 요즘도 어딜 가나 산이 보이고, 나무가 보인다. 톨게이트 지나가면서 좋은 나무가 눈에 띄면 즉시 그 마을로 직행하기 일쑤다.
용인에 있는 영산공방에서 도면을 보고 있는 박명배 소목장.
박명배가 자신의 영산공방 이곳저곳에 쌓인 나무를 보며 아기 안은 어미 표정을 짓는다. 야밤에 여길 떠나지 않는 것도, 합선되지 않게 전기선 하나하나 손수 만진 것도 아기를 안전하게 품고 있기 위해서다.
바깥에는 볕을 쬐고 있는 나무 기둥이 여럿, 공방 안에는 대패질한 나무판이 약간의 틈을 두고 켜켜이 쌓여 있다.
“여름엔 수분이 늘어 나무가 늘어나고, 겨울엔 수분이 빠져나가 줄어듭니다. 이렇게 늘고 줄고를 반복해야 어엿한 목재가 됩니다. 실외에서 3년, 실내에서 4년 이상 건조시키지요.”
그 다음엔 더 중한 일이 남아 있다. 나뭇결을 살리는 일이다. 박명배의 경우 낙송기법을 통해 결을 키운다. 목공예 분야의 대표적인 경연장인 전승공예대전에서 1992년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도 이 기법 덕분이다. 공방에 모셔둔 수상작을 보니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를 보는 기분이 든다. 검정색과 짙은 밤색이 어우러진 나뭇결이 출렁이는 산맥 같다. 고승이 머물던 산세가 이랬을까.
“전승공예대전에서 대상을 받는 데 9년이 걸렸어요. 그전에 입상, 장려상을 받긴 했지만 대가로는 인정받지 못했던 거지요. 그러다 낙송기법이 좋겠다 싶었습니다. 오동나무가 된다면 소나무도 되지 않을까 했어요.”
낙동, 낙송 모두 인두로 나무판을 지지는 것을 말한다. 지질 낙(烙), 오동나무 동(桐), 지질 낙(烙), 소나무 송(松). 그간 이 기법을 사용한 명장이 드문 건 제작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인두를 대면 봄여름에 자란 옅은 부분은 조직이 물러 쉽게 타고, 가을 겨울에 자란 부분은 도리어 제 모습을 유지한다. 이 작업이 어려운 건 인두 쥐는 힘이 다르면 색이 지저분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업이 잘되면 나무판엔 옅은 줄과 짙은 줄이 공존해 아름다운 무늬를 만든다. 편하게 지낸 시절, 호되게 보낸 시절 모두 한 인생이듯이.
1mm 차이
좋은 나무를 골라 결을 살리는 것 외에도 그만의 노하우가 있다. 바로 스케치다.
“방안지에 목가구를 여러 개 그려보고 최종적으로 하나를 고릅니다. 그러곤 원형 크기 그대로 방안지에 그리죠. 무늬, 결구 다 그리는데, 1mm 차이로 예뻐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합니다. 모양에 따라 알맞은 나무 종류가 다르니, 모양부터 잘 만들어야 해요.”
박물관, 인사동, 장한평 골목상도 빠지지 않고 들르며 모양을 찾는다. 장인은 그렇게 방안지를 붙들고 걸핏하면 날밤을 새운다. 납품 날짜가 정해진 경우 시간이 넉넉지 않아서다. 설계과정에서 무엇보다 힘이 되는 건 다름 아닌 사람들이다.
“저는 작품을 만들 때마다 사형들에게 연락해 조언을 구합니다. 사람마다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의견을 듣곤 나름대로 분석하고 조합해서 판단을 내립니다. 손잡이를 빼는 게 나은지, 쇠를 어떻게 구부려야 하는지 고민합니다. 박물관에 있는 목가구를 무작정 따라 하기보다 소실된 목가구의 모습을 궁리하면서 재현하려고 해요.”
그가 말한 사형이란 옛 직장 동료들이다. 열여덟 살 소년 박명배는 최회권 선생의 ‘오뉘(오누이) 아뜨리에’에서 서라벌예대 미술과 학생들의 졸업작품을 만들며 목수 일 전반을 배웠다. 그곳엔 그처럼 일하는 사람이 5명 있었는데, 그중 3명이 후에 대통령상을 받았다. 산업디자인, 전통공예품 등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형들은 든든한 우군이다. 본격적으로 전통가구의 제작기법을 알려준 소목장 허기행 선생도 그중 하나다.
“당시 허 선생님께 7년 정도 배우면서 어깨가 빠질 듯이 대패질을 하며 임무를 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제 노력만으로는 부족했어요. 그 인연들이 없었더라면 제가 성장할 수 없었겠지요.”
‘단아한 사랑방 가구전’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도 그런 인연 중 하나다.
“절 알게 된 최 관장님이 뭘 만들어 와 봐라, 하시면 만들어 가곤 했습니다. 청와대 어떤 가구를 만들어 와라 하면 가져가고. 무엇보다 선생님은 제게 ‘결구, 짜임보다 비례가 중요하다’는 걸 가르쳐주셨는데, 제가 그려 간 도면을 늘 손봐주셨지요. 그래서 저도 후학들 가르칠 때 도면 그리는 걸 강조합니다.”
그는 그 인연으로 로마 교황청박물관 내 한국관 가구뿐 아니라 LA한국문화원, 워싱턴한국문화원, 베를린한국문화원 가구를 만들었다.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을 받자 생활은 더 어려워졌다. “박명배는 잘 만들지만 너무 비싸다”는 소문이 돌아 주문이 끊겼기 때문이다.‘소문을 현실로 만들자’는 오기도 생겼지만 쉽지 않았다.
다행히 이름이 알려지면서 강사 자리는 많이 들어왔다. 용인대 문화재보존학과, 한국전통문화학교 소목학과에서 가르쳤고, 문화재청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소목반은 1994년부터 지금까지 맡고 있다. 처음 1개 반이던 것이 지금은 5개 반이 됐고, 20명이던 학생도 90여 명으로 늘었다. 그가 꾸려가는 영산공방에서 공부하는 후학도 40명에 달한다. 후학들은 선생과 함께 전시도 하는데, 새해 1월8일부터는 백악미술관에서 ‘단아한 사랑방 가구전’이 열린다.
40년 장인이 말하는 전통공예의 요체(要諦)는 무엇일까.
“전승공예는 옛 모습 그대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답습이고 재현이지요. 그렇지만 전통공예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의 고유한 공예품을 ‘계승’하는 겁니다. 그래서 과거 소목 방법과 모양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창조성을 발휘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전통가구는 원래 밝아요. 현존하는 전통가구가 어두운 색을 띠는 건 세월의 때가 묻어 변색됐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교가 아닌 자연 그대로가 담긴 가구, 그게 바로 한국 가구입니다.”
아무 것도 바르지 않은 여인은 게을러 보이지만
옅은 화장을 한 여인은 청신하다.
나무도 그렇다.
본래 그대로의 나무는 밋밋하지만
치장하면 아름다워진다.
소목장 박명배는 말한다.
뜨거운 인두를 대면 봄 여름에 자란
옅은 색 조직은 결이 물러 쉽게 타고,
가을 겨울에 자란 부분은 도리어
제 모습을 유지하게 된다고.
인두 쥐는 힘이 다르면 색이
지저분하게 나올 수 있지만,
작업이 잘되면 나무판에 옅은 줄과
짙은 줄이 공존해 무늬를 만든다.
편하게 지낸 시절,
호되게 보낸 시절
모두 한 인생이듯이.
01 1992년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 수상작인 의걸이.
낙송기법을 활용해 소나무 결을 살렸다.
02 현대 생활에 맞도록 그 크기를 키운 경상(책상).
03 먹감나무의 결이 잘 나타난 서안.
04 고유의 비례감이 느껴지는 이층장. 전면은 신비한 문양의 용목으로 장식하고 옆벌과 천판은 오동나무를 낙동처리해 끼웠다.
01 4층 책장과 사방탁자. 사방으로 트인 사방탁자에는 도자기, 책 등을 올려둘 수 있다.
02 조형적 비례가 뛰어난 강화 반닫이. 수복강령을 상징하는 박쥐가 표현돼 있다.
03 탁자장. 중앙의 책장과 좌우의 삼층 탁자가 조화를 이룬다. 낙동기법을 살린 중앙의 책장은 오동나무만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04 사랑방가구인 반닫이. 학문에 정진하라는 내용의 글귀가 적혀있다.